편집실에서

네오 나치, 악령의 속삭임

- 고병권(수유너머R)

<어둠 속의 댄서>로 잘 알려진 라스 폰 트리에 감독. 그가 지난 18일, 칸 영화제에서 자신을 나치라고 말해 행사장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영화제 사무국은 당장 그에게 행사장 출입금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트리에 감독이 기자회견에서 말한 내용을 순서대로 짚어보면 ‘나치 커밍아웃’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미묘한 대목이 느껴집니다. 독일계 혈통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그는 ‘독일인 혈통’과 떼놓을 수 없는 ‘유대인’ 문제를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이스라엘로 이어졌지요. 기자의 질문에 감정이 상했던 걸까요. “나는 히틀러를 이해한다. … 조금은 그에게 공감한다.” 그러다가 “2차 대전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며, 유대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고 해놓고는 다시 “유대인은 조금 싫어한다. 이스라엘은 골칫거리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고 있는 악행을 떠올렸기 때문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지금으로서는 폰 트리에 감독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한 해프닝인지, 그저 빈정상해서 마구 엇나가다보니 자기도 감당 못할 곳에 이른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유럽에서 나치즘은 조크만으로도 쇼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나치즘이 더 이상 우리에게 조크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열흘 전쯤 미국에서 있었습니다. 제프 홀(J. Hall)이라는 미국 나치운동의 지도자가 열 살 먹은 꼬마 아들에게 살해당했답니다. 그 아들이 어떤 생각으로 아버지를 죽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들에게 총기 사용법을 알려준 게 나치 지도자였던 젊은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저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백인우월주의나 인종주의를 공공연하게 표방하고, 심지어 아예 나치즘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그룹이 미국에 꽤 많다는 군요. 주로 가난한 백인들인데요. 이번에 살해된 홀이 이끈 그룹 -NSM(National Socialist Movement), 지금까지 알려진 미국 내 최대 나치 그룹입니다-의 활동을 보면 단순히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없는 대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부는 이제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월스트리트의 살진 고양이라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누구의 말일까요. 신나치주의자 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그의 말처럼 천문학적 구제금융 덕에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 제공자였던 월스트리트는 상당한 수익을 내거나 최소한 위기를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닥친 삶의 위기는? 신나치주의자들은 분노하며 그렇게 묻습니다. 그리고는 월가에 대한 구제금융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이들의 분노에는 분명 수긍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들은 갑자기 월가에 대한 분노를 인종주의적으로 전환합니다. 즉 분노를 월가를 지배하는 유대인들에게 돌리는 거지요.

이들 신나치주의자들은 공화당의 새로운 운동 기반인 티파티에도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불법이민자들에 대한 공격적 시위의 선봉을 맡습니다. 폭스뉴스의 유명 앵커 글렌 벡(G. Beck) 같은 이들이 백인이 차별을 받고 있다고 떠들어대고, 보수 정치인들이 문제는 불법이민자들이라고 소리높일 때, 가난한 이들의 영혼에는 극우 인종주의의 악령, 나치즘이 곰팡이처럼 급속히 번져갑니다. 제프 홀이 이끌었던 NSM의 주요 활동 중 하나가 국경순찰이었습니다.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애국심이라 칭송해마지 않았던 ‘자발적 국경감시’의 실체가 이렇게 드러나는군요.) 이들은 총으로 무장한 채 야간투시경과 무선통신장비를 갖추고 국경을 넘는 이민자들을 감시합니다.

아직 한국에 나치를 표방하는 단체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군복을 입고 가스통을 들고 나오거나 각목을 휘두르는 이들이 언제부턴가 참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언젠가 TV를 보니 용돈 벌이 삼아 돈을 받고 그렇게 나서는 가난한 할아버지들도 있더군요. 하지만 극단적 보수주의 이념을 외치고 다른 이념이나 다른 피부를 가진 이들에게 배타적 공격성을 보이는 것을 마냥 용돈 벌이 연극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과거 식민지 피해자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가학성에 대한 자각은 부족한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공격적 인종주의 내지 민족주의자로 행동하면서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기사를 보니 부자들 중에 진보적 이념을 가진 사람, 소위 ‘강남 좌파’가 늘었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이 말이 얼마나 사회적 근거를 갖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일어날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극우적이고 공격적인 보수주의를 갖게 될지, 상호 연대를 통한 체제 전환의 힘으로 등장할지,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프 홀이 죽은 건 5월 1일 새벽 4시쯤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10살박이 아들은 소파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향해서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날 어린 여동생과 다투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 그날 밤 아버지가 국경 순찰 중 발견한 부패한 시체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도 합니다. 에이즈에 대한 혐오스러운 이야기를 듣기도 했구요. 하지만 누구도 그 아이의 가슴에서 일어난 일의 정체를 모릅니다. 그는 신나치 지도자인 아버지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서 이번 주 표제를 장식한, 신현주님의 <나만의 선곡표>를 소개하려고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정말 대책 없는 음치인데다가 연주할 수 있는 악기 하나 없고, 귀마저도 신통치 않아서, 음악은 정말 ‘멀리 있는 당신’이었습니다. 노래나 악기의 연습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저 듣는 일, 그저 내맡기는 일조차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신현주님 올려주는 음악을 가볍게 클릭하다 지긋이 눈을 감기도 하고, 볼에 가벼운 미소를 짓기도 하는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언젠가 신현주님이 이런 말을 쓰셨지요. “어떤 음악이든 무조건 들어야한다. 많이 들어야 한다. 반복적으로 들어야 한다. 그렇게 그 음악의 흐름을 익혀야 한다. 음악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계속 듣다보면 친숙해진다. 친숙해지면 비슷한 음악을 듣고 싶어지고 그렇게 이전과 다른 감성의 음악을 듣는 습관이 생긴다. … 생각하지 말고 우선 그냥 듣자.” 네, 열심히, 우선 그냥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현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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