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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문희 홍대청소노동자 “한편의 드라마 찍었죠”

- 은유

홍익대학교 인문사회관 B동 3층, 복도 끝에 창고방이 있다. 책상 하나에 꽉 차는 네모난 공간이다. 먼지 낀 창틀사이로 뒷동산 나무가 짙푸른 가지를 드리운다. 청소노동자 노문희는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할 때까지, 짬이 나면 이곳을 찾는다. 2003년부터 사용한 ‘나만의 방’이다. 책상 위에 로션, 성경책, 노트, 필기도구 등 살림이 가지런하다. 바로 옆이 화장실. “쏴아~” 변기에 물 내리는 소리가 이어폰을 낀 듯 생생히 들리는 이 자리에서, 그는 다리를 쉬고 마음을 닦는다.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색연필을 꺼내 그림을 그리거나 일기장을 편다.

예쁜 소녀가 그려진 스프링 노트. 어느 학생이 버린 걸 주워서 만든 일기장이다. 홍익대에서 일하면서부터 쓴 일기가 2011년 5월 9일로 이어진다. ‘어제 내린 비로 인해 날씨가 쌀쌀하다. 꽃샘추위인가. 5월 7일 토요일에 동지들과 함께 백운대로 단합대회를 갔다….’ 조합원끼리 가는 첫 야유회. 버스에 타자마자 술 마시고 소란피우는 남자 동지가 거슬렸고 너그러이 이해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썼다고 한다. 빼곡한 사연 반듯한 글씨 사이로 ‘동지’라는 단어가 심상하다. 나이 예순에 처음 써보는 단어. 지금은 입에 붙어서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말이다.

“성당에 가서 우리 동지들은~ 그러면 교우들이 ‘동지란 말 좀 쓰지 마. 북한 사람 같아’ 그래요(웃음). 근데 나도 모르게 나와. 49일을 쓰다보니까.”

청소노동자 8년, 소리 없이 아팠다

노문희는 2003년 홍익대학교에서 일을 시작했다. 인문사회관 B동 3,4층과 1층 공용남자화장실을 담당한다. 8년 째 같은 자리를 쓸고 닦았다. 작년 여름 노조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힘든 거 없다’며 피했다. 이웃한 연세대 이화여대는 노조가 있지만 홍대는 노조를 절대 할 수 없는 학교라는 얘기를 들었다.

12월에 다시 노조결성 움직임이 일었다.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간 억눌렸고 힘들었다. 어떤 소장은 아파도 병원을 보내주지 않았다. 3년 전 일하다가 계단에서 굴렀다. 산재로 처리하면 그만둬야 하므로 괜찮은 척 일했다. 치료시기를 놓쳐 고질병이 됐다. 퇴행성관절염. 15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 걸려서 걷는다. 50대에 건강하게 들어왔는데 남는 건 병 밖에 없었다.

“노조가 생기면 힘들면 힘들다 소리, 아프면 아프다 소리를 할 수 있대요. 마음이 동요된 거죠. 내 소리 낼 수 있다는 것에 자신을 갖고 노조에 가입을 했어요. 12월 말일에 노조 결성식을 마치고 1월 1일에 잘 쉬고 3일에 출근하니까 전원해고 됐다고 일하지 말래요. 어안이 벙벙한 거죠. 막막해서. 나는 내가 가장이니까 눈앞이 아득하더라고.

농성에 들어가는데 우리 노조원이 뿔뿔이 흩어질까 걱정했지만 다 모였어요. 확신이 가더라고요. 우리가 힘은 약하지만 하나가 되고 한 목소리가 되면 이길 수 있구나. 서경지부 분들이 다 왔죠. 우리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같이 농성을 하는데 붙잡고 울었어요. 너무 고마워서.우리 부모형제간도 안 해주는데 누가 해주겠어요. 고맙더라고요.”

새해 벽두 일자리를 잃은 홍대 경비청소노동자 170명은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문헌관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조차, 그런 용어조차 몰랐던 노문희는 빨간 조끼를 입고 투쟁 대오에 섞였다. 냉기 오르는 맨바닥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해를 맞았다. 날마다 아침밥 챙겨 먹고 서둘러 교문을 나가 전단지를 돌렸다. (그걸 뭐라고 하더라? 선전전이요) 점심 먹고 또 선전전하고. 저녁에는 노래하고 영화 보고 문화공연을 구경했다. 어느 날인가는 동료들과 7000~8000원짜리 ‘추리닝’ 바지를 자랑하는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49일 동안 다 친해졌어요. 다 언니동생 돼서 너무 좋아요. 한편 홍대 이사장님이 고맙기도 해요. 생각해보세요. 한꺼번에 싹 자르니까 우리가 뜬 거지 하나 둘 자르면 우리 같은 사람을 누가 알아줬겠어요. 그 전에는 용역회사가 달라서 우리끼리도 서로 몰랐어요. 지금은 하나로 뭉쳐서 힘이 더 세졌죠. 서로 아픈 거 힘든 거 보듬어 주고 감싸고 격려해요. 악을 통해서 선을 이룬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요.”

노동자 울부짖음이 들리고 학생들 인사가 들리고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맵찬 날씨. 100년 만의 추위였다지만 노문희에게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수많은 사람의 체온 덕분이다. 농성장으로 전기장판과 이불, 쌀과 김치가 답지했다.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김여진 씨가 특별히 고맙다. 농성시작하고 제일 먼저 달려왔고 같이 김장해주고 바자회를 열고 끝까지 함께 했다. “너무 예뻐서 국회의원 나가라고 그랬다. 찍어준다고.” 홍대 학생들도 든든했다. 울산초등학교, 성미산초등학교 학생이랑 학부형이 왔다. 강원도에서 딸내미 둘 데리고 찐빵 200개 쪄서 온 사람, 서초동에서 다섯 살짜리 딸 데리고 온 가족 등 일일이 꼽을 수가 없을 정도다.

“다 추억이죠. 한 편의 드라마를 찍은 거 같아. 세상은 아직 살만하구나. 나쁜 사람은 일부구나 느꼈죠. 전에는 TV에서 농성하는 거 나오면 저 사람들이 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까, 보기 싫어서 채널 돌렸어요. 피부에 와 닿지 않았어요. 어른들이 말씀하길 북한 사람들 불순분자가 공장을 마비시킨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어요. 그게 아니더라고. 내가 느끼고 닥치니까. 이제 가슴으로 알게 된 거죠. 노동자의 아픔과 슬픔을 저렇게 발산하는 거구나. 지금은 그런 거만 나오면 가슴이 찡하고 아파요. 울부짖는 소리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린다. 노동자의 함성에 숨어 있는 큰 울음이 들리고, 수고하세요 학생들의 낭랑한 인사 소리가 들린다. 농성하기 전에는 1700명이 들락거리는 건물에서 한두 명이 인사를 할까 말까였다. 본체만체 하던 교수들과 교직원들이 눈을 맞춘다. 인사 한마디에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다. 나도 변하고 남도 변하고. 월급이 오르고 휴가가 늘었다. 일 년에 2만원씩 오르던 것이 15만원 인상했다. 월급이 75만원에서 93만원으로, 휴가가 이틀 더해져 연 17일이다. 가장 큰 변화는 이것이다.

“할 말은 할 수 있다는 거. 내가 싫은 일 부당한 일을 시키면 항의할 수 있다는 거. 그전에는 불이익 받을까봐 소리도 못 냈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종 모냥 노예 모냥 살았는데…..지금은 말할 수 있죠. 당당하게.”

쓸쓸한 환갑, 유령에서 표지모델로

노문희는 홍대노동자 유명인사다. 자분자분한 말투와 연꽃 같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닌 그. 농성기간 중에 인터뷰를 전담하다시피 했다. 한 시사주간지 표지에도 얼굴이 실렸다. 유령 같은 존재에서 모델로 피어났다. 51년생. 올해로 환갑이다. 60대를 화려하게 시작한 걸까. 고개를 가만히 젓는다. “나는 60대를 슬프게 시작했다.” 치부가 다 드러났고 어려운 가정형편은 여전하다. 삼남매는 결혼해서 분가했다. 97년 남편의 사업실패로 거리에 나 앉은 상태에서 일하러 나왔고 보증금도 없는 셋방에서 살고 있다. 고개를 숙여 두 손을 매만지던 그가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내 손가락이 참 가늘고 예뻤는데 지금은 다 퉁그러졌어요. 훈장이지 뭐(웃음). 힘들 때는 저 창밖을 보면서 마음이 평화를 얻어요. 가을에 한 잎 두 잎 나뭇잎 떨어지는 거 보면서 나무랑 대화해요.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있잖아요.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봐라, 나도 부모형제 다 떠나보내고 이 자리에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거 같고. 단풍이 다 떨어졌다가도 봄이 되면 새순이 나고 잎이 무성해지잖아요. 그런 게 위로를 줘요.”

나무는 그의 가장 오랜 동지다. 8년 세월 날마다 빛깔을 바꿔가는 나무와 교통했다. 비에 젖고 물에 잠겨도 미동도 않는 나무처럼 살자했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이성복)’는 시구처럼 노문희는 꿋꿋했다. 삶의 자리를 지켰다. 휴식과 체념의 자리, 사색과 구원이 솟아나는 그 자리. 나만의 방이 있는 그곳을. 그래서 3층 계단을 아픈 무릎을 끌고 더듬더듬 오르내릴지언정 “이 방을 떠나기가 싫다.”

“힘들게 사는 거 알아주니까 좋아”

뒷동산에 올랐다. 친구-나무를 보자마자 잰걸음으로 다가가 두 팔 벌려 와락 안긴다. “바로 이 나무에요.” 오렌지빛 햇살보다 더 화창한 웃음이 터진다. 극적인 상봉. 감격의 해후. 대학교에서 일하지만 파란 유니폼을 입고서 교정을 산책하는 일이 여의치 않은 까닭이다. 가슴보다 큰 슬픔을 다 받아주는 나무. 둘레를 어루만진다. 등 돌려 기댄다. 하늘을 바라본다. 남편은 지금 병원에 있다. 알콜릭으로 입퇴원을 반복한다. 작년 12월 경비원으로 취직해서 세 달간 일하고 다시 들어갔다.

“내가 농성할 동안 돈 벌고 끝나니까 또 들어갔어. 죽으란 법은 없지?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해요. 내가 사는 걸 보면 다들 그래.”

그에게 가난은 절망적인 가난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가난이다. 질긴 생계 걱정의 도정, 그 다다름, 그 불가피성의 원리를 수락하며 살아온 생이 아닌가. 살아온 기적은 살아갈 기적이 되리라 믿는다. 지금 상황이 안 좋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소하는 일이 아니면 내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니 힘들다고 생각 안 하고 고맙다고 생각한다. 대학교도 고맙고 공부하러 오는 학생도 고맙다.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도와준” 서경지부 사람들도 고맙다. 마냥 고마워서 요즘은 기도할 때 노조간부들을 꼭 넣는다.

“내 나이 육십에 노조에 가입하고 농성하고 동지가 생기고 이런 변화가 생길지 몰랐는데, 일하는 데도 힘이 나죠. 누가 그러더라고요. 형님이 그동안 힘들게 살아서 보상해주고 위로해주는 거 같다고.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우리가 힘들고 아프게 살아가는 거, 노동자를 알아봐줘야 뭐 그렇지만(웃음) 그래도 알아주니까 좋아.”

* 사진: 박정훈(다큐멘터리사진가)

응답 1개

  1. 말하길

    ‘나무’란 별칭을 가진 친구들을 더러 봣지만 이분처럼 나무를 이해하는 분은 처음인 것 같아요. “부모 형제 다 떠나 보냈지만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그 자리에서, 모습을 바꾸며. 항상 이처럼 새롭게.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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