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명철보신明哲保身 : 사리를 밝게 헤아려 몸을 지킨다.

- 홍진

지난 3월 20일 베이징에서 열린 <민감지대敏感地带> 전시회에서 란저우兰州 출신의 행위예술가 청리成力는 옷을 벗고 파트너 여성과 성행위를 묘사하다가 공안국에 긴급 체포되었다. 청리 측은 논란이 된 <예술매비艺术卖比>가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예술계 관계자들과 비공개로 진행된 퍼포먼스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공안국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그의 ‘음란예술’에 대해 라오지아오劳教 (노동으로 가르침 : 쉬운 말로 강제노역) 1년을 구형했다.

개인적으로는, 기록 사진으로 본 그의 고추와 행위 예술에서 별반 새로운 매력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불완전한 퍼포먼스를 완성시킨 것은 오히려 정부와 사회의 대처이다.

50년대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노동교양소劳动教养所는 지주, 부자와 반동, 악인, 우파 地, 富, 反, 坏, 右 들을 잡아가 강제노동과 주입식 정신교육을 통해 새 사람(시계태엽오렌지의 알렉스)을 만드는 곳 이었다. 7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즉결심판이 횡횡하였으므로 노동교양소에는 의외로 파리만 날렸다고 하는데, 80년대 초 중국 공안부에서 새롭게 법을 제정함에 따라 다시 운영되고 있다. 현재 중국 각지 300여개의 노동교양소에는 약 26만명의 수감자가 있다. 주요 대상은 도박, 사기, 마약, 매매춘 및,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자들인데 정치범의 비율은 4% 정도. 강도 높은 노동과 정신교육으로 출소 후에도 수감했던 자들에게 각종 후유 병증이 보고되고 있다. 서방의 비난을 의식한 듯, 노동교양소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어린아이, 임산부의 입소를 금하고 있다는 친절한 안내문이 홍보되고 있는데, 허걱! 왠지 더 무섭다.

서양의 정치제도를 따르자면 공안국은 행정부로 분리된다. 독자적인 권력으로 사법부의 일반 징역형보다 무서운 행정 처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청리 퍼포먼스의 예술성과 의미를 판단하기 이전에, 그에 대한 정부의 폭력에 반대하기 위해 지지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인터넷 상의 관련된 글들을 검색해 보면, 인민 대부분은 도덕을 부르짖으며 청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예술이 현실의 법률을 초월할 수는 없다. 자기 몸을 적선? 해서라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래, 어디 해봐라.”, “부인은 청리를 지지한다고 하는데, 그럼 그 딸은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청리는 중국 사회의 도덕하한선을 무너뜨리려는 파렴치다.”

그중 ‘청리 한사람만 잡아가지 말라’는 결연한 제목이 섞여 있어 눌러보니, 하루 빨리 공평하게 당시의 여성파트너도 잡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식적인 지지의사의 표명은 조심스레 정부의 관용을 바라는 왕린 王琳 이란 학자의 글이 유일하였다. 나도 지레 조심스레 주위의 대학원생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대부분의 의견은 한가지로 모아졌다.
‘미친 X, 하지 말라는 걸, 왜 하니?’

음, 이 말을 어디서 들어봤을까? 불현듯 친구의 일화가 떠오른다. 군 생활 중 불합리한 명령 앞에서, 파업을 하겠다고 선언한 친구. 부대장은 읊조렸다. 군대에서 파업? 넌… 미친놈이야. 미쳤으니까 정신병원에 가야 돼. 그리고 정말로 그는 이송되었다. 병원에서의 말년은 쓸쓸했다고 한다. 군대라는 사회에서는 정치의 개념이 부재한다. 틀에 맞지 않는 개인은 이탈자이고 미친 것이며 격리의 대상일 뿐이다.

군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을 탈각시켜 버린 중국 사회에, 정치란 홍보일 뿐이다. 중국 공산당 90주년을 앞두고, 공산당의 이념을 재조명하는 대대적인 행사들이 준비 되고 있지만 일반인에게 별다른 감흥은 없다. 이념과 사상, 정치는 이미 ‘함부로 이야기 하는 게 아닌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고전인 시경에서 얻는 명철보신의 교훈이다.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면 된다.

중국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주된 해명은, ‘서양 정치체제의 눈으로 중국을 분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중국의 시스템은, 서양의 민주주의 시스템이 운영하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많은 인민들의 혼란을 막고 기본적인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계획적인 통제라는 것이다. 서양의 민주적인 정당제도가 허울 좋은 사기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가속 페달을 밟은 채 질주하는 중국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 빈자리는 너무도 불안해 보인다.

얼마 전 상하이에서는 길거리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한낮의 큰길에서 한 남성이 항거 불능의 여성을, 강제로 상의를 벗긴 후 마구 추행하였지만, 4-5분에 걸쳐 영상을 찍은 시민을 포함하여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로 공포 중에서 제일 무섭다는 백주 대낮의 폭력이었다. 청리의 부도덕함을 꾸짖고 성의 순결?을 수호하던 인민들은 그 때 모두 다 어디로 갔던 것일까? 어떤 사건을 두고 한 나라의 민족성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반대로 이를 핑계 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샤오관시엔쓰 少管闲事 라는 단어가 머릿 속에 떠오른다. 남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이 유명한 보신주의 문화에는 판단하고 개입할 권리를 빼앗긴 인민들의 수동적인 태도가 깊이 맞물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부재한 꼬뮤니스트 90주년의 중국사회에서, 정치적 연대 이전에 생물학적 연대조차 불가능해진,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전혀 공명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대중이야말로 가장 무섭고도 슬픈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성추행의 피해자인 여성과, 가해자로 매도되는 청리는 다시 인터넷에서 뜨겁게 소비된다. 청리의 기록사진을 다시 퍼 나르며, (스스로 재생산하고 있는) 시선의 폭력을 욕하는 인민들은, 성추행 동영상을 보며 사회를 비난할 것이다. 이를 보니 이전에 이남이(불세출의 베이시스트!)가 나와서 노래를 부를 때 마다, 우는 소리 때문에 복 떨어진다는 둥, 수염 좀 제발 깎으라는 둥, 신나게 욕을 하며 이남이를 소비하셨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정치가 탈각된 공간의 이 거대한 틈을 메우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명철보신의 통찰을 배운 나는 한글로 된 이 공간에만 우선 조심스레 의견을 적어 놓는다.

http://hzx194765.blog.163.com/blog/static/6161651620114611327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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