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역사 87’의 말뚝

- 심범섭(대학교 앞 서점아저씨)

인간은 창조의 마술사다. 인간의 역사는 마술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하나 하나의 기록은 모두가 기적이었다. 그저 영원이거나 무한일 수 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에 말뚝을 박고 매듭을 지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출발점엔 인간의 생각이 있다. 생각의 주인은 ‘나’였으나 인간은 그 나를 묶어 ‘우리’로 만들었다. 역사는 바로 그 ‘나와 우리’가 시간과 공간에 아니 그 각각의 매듭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갔다. 인간의 역사는 진화이자 창조의 강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붕괴시킨 이후 그리고 87년 우리의 6월 혁명 이후 세계사와 우리의 역사가 맞물린 이 두 사건은 인간의 역사 전반과 우리 역사의 뒷걸음질을 재촉하고 있음을 읽어내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지금 신자유주의라는 악마가 인간의 정신을 늪에 빠트렸고 앰비정부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땅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 원인과 책임을 두고 이런 저런 말이 많지만 나는 그 원인과 책임을 첫째부터 끝까지 진보진영 특히 진보진영의 지식인들에게 묻고 싶다. 보수란 무엇인가 보수란 원래 자연의 원리를 바탕으로 탄생한 인간동물의 약육강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지금 막 세계화의 문턱을 넘어선 인간세상은 이제 비로소 그 동물인간의 탈을 벗어야 하고 그 책무야말로 인간진화의 앞장을 서온 진보지식인의 몫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마주보고 대립하는 분단구조에서 그 장치의 하나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우리 87년 민주항쟁의 모든 주체와 이론가야말로 이제는 그 때 그 함성의 용기를 넘어 우리의 분단구조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진정한 창조의 영역으로 나가라고 이쪽 동물인간의 세상에서 강을 건너 대안의 세상인 인간의 세상으로 헤엄을 쳐 가라고 주제 넘는 줄 빤히 알면서도 삿대를 들어 매를 치고자 한다.

음 그렇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 놈의 좌파라고 하는 딱지 바로 저 보수가 던진 딱지가 좌파의 고삐이고 목줄인줄 알아야 한다는 잔소리로 시작하자. 왜냐고…… 우리의 자랑스런 6월의 혁명가들이 자신들이 겪어낸 저 빛나는 성채 바로 ‘87역사’의 말뚝에 스스로 목을 내어 고삐를 매고 거기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거기 갇힌 노병이니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나갈 길을 열어주기는커녕 기왕에 만들어진 것조차 잃어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딱 잘라 말하면 87년 6월의 주인공들은 이제 청맹과니에 불과하다.

이 글은 원래 80년대를 경험한 50대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는 인식과 성찰과 물음을 통해 앰비정권의 현실과 이후를 고민하는 수유너머 웹진의 주문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4.19와 5.16 그리고 5.18과 87년 6월 항쟁까지를 지켜 본 세대로서 그리고 줄곧 그 운동의 주변을 서성인 선배로서 또 그들이 그렇게 갈구 했던 지식의 산실인 사회과학의 한 서점을 운영하는 아주 특별한 경험의 소유자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의 민주주의의 꽃이랄 수 있는 87년 6월 항쟁을 중심에 놓고 생각나는 몇 가지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따라서 지금 이 땅의 진보진영이 단순히 앰비정부를 몰아내고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으로 정권을 교체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해도 세계라는 공간과 세계 역사라는 큰 흐름으로부터 생각과 논리와 힘과 가치관을 읽어내고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늘 과학적 인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자본주의 승리가 명확한 이 때에 아직도 자본주의 이후에 사회주의가 올 것이라는 마르크스주의에 이끌려 정권교체를 준비하다가는 어이 없는 정도를 넘어 우스개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진보진영에서 변증법은 폐기되어야 한다. 변증법이 유물론의 전유물인 줄 알지만 이는 오해다. 변증법은 둘을 다 아우를 뿐만 아니라 생래적으로 관념론의 유전인자를 가졌기 때문에 관념론에 더 충실한 논리적 도구다. 역사의 반복과 순환을 논증하는 보수의 집권기반을 다지기에 더 적합한 논리라는 것이다. 관념론에 대응하는 역사발전의 법칙은 축적론이다. 상식적이지만 시간과 공간은 존재의 생존과 삶의 방식과 인식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논리이자 절대적인 인식의 지배자다. 시간과 공간은 해와 달, 별의 뜨고 지는 변화의 주기는 삶의 방식을 결정해 주는 생리적 인식이다. 그러나 이 반복 순환의 법칙은 당연히 유물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사고와 삶의 틀이란 점에서 상식이자 논리로서의 관념론이 기대는 바탕이 되고 있다. 관념론이 지향하는 상향식 논리이며 인간의 역사가 거기에 그대로 적용되고 녹아 있는 역사의 법칙이 되고 이는 지배자들의 권력을 생성시킨다.

그러나 역사의 지배적 유산을 폐기하고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논리와 가치관 또한 그 대척지점에 있어야 한다. 유물론은 당연히 자연현상에서 추출되는 존재현상의 발전의 법칙을 따라 창조돼야 한다. 그건 반복 순환되는 논리가 아니라 그 반복 순환을 관념론으로 가져가서 지배논리로 활용하고 있는 지배자들의 논리와 가치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축적과 소멸의 논리여야 한다.

둘째, 역사가 지향해야 할 목표와 과정이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좋은 세상’과 나쁜 세상에 대한 명확한 그림표는 대안 세력이 기득권을 제압하고 몰아 낼 수 있는 근거다. 그래야 진보의 주장이 그냥 패거리 짓기가 아닌 대안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 그림은 이제까지의 역사 흐름에 대하여 분명하게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의 강바닥으로 흐르는 새로운 가치관의 흐름이 선명하게 들어 나야 한다. 이제까지의 역사가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에서 인간동물로 살아온 것이라면 그 것을 대체 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의 흐름이 제시되어야 한다.
동학혁명이나 4,19가 실패한 것은 이런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해 우리 진보진영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나쁜 세상에서 좋은 세상으로 건너가는 돌다리는 없었다. 돌다리는 고사하고 역사상 처음 정권을 맡은 진보집권에 대해 첫날부터 빵을 내 놓으라고 웃음과 행복을 내 놓으라고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기도 전에 우리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강물에 빠뜨려 허우적거리게 했다. 그리고 보수집권을 불러 들였다. 앰비정권은 바로 무능한 우리 진보진영의 결과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다. 오늘의 현실에서 대중들이 느끼는 진보는 진보라기보다 보수들이 규정한 ‘좌파’이거나 정치의 꾼이거나 어쩌면 ‘검투사’ 또는 ‘투우사’ 같은 것으로 비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두 87민주 항쟁의 주체가 그 87의 말뚝에 매여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지적 창조물을 내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민족분단의 좌표 인식의 문제다. 세계 열강이 설치한 우리의 분단구조는 우리가 풀어야 할 모든 문제의 족쇄다. 우리가 걸아 가야 할 좋은 세상과 폐기해야 할 나쁜 세상의 문제가 모두 그 족쇄에 연동하는 하위개념이 다. 그리고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그 족쇄에 걸려 있는 우리를 갈갈이 찢어놓고 있다. 분단구조를 설치한 자들의 의도와 세계화를 이끌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두 괴물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진보운동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을 읽어내고 대안을 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속으로 갈무리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넷째, 그리고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2만 달러시대에 진입하고 지금 급히 다가오는 문제가 있다. 바로 지난 2월에 있었던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에 이은 원전사고에서 발견되는 문제다. 우리가 다 인정하다시피 일본은 우리의 미래다. 그러나 이번에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일본의 모습은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일본의 역사가 늘 그랬지만 아직도 국가라는 괴물이 엄연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21세기라는 문명사회에 그리고 저들이 자랑하는 4만 불의 시대에 아직도 그렇게 또렷이 존재하고 있는 국가의 신격화 현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특히 ‘질서’라는 이름으로 저들 4만불 시대 시민사회가 들어내고 있는 화석화된 인간의 얼굴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고, 마치 개미나 벌 같은 사회생물의 모습 그대로였지 말이다. 그렇잖아도 자본주의에 날로 화석화되는 인간의 모습이 두렵던 차에 발견되는 이런 국가주의 중독과 l시민사회의 시높티콘적 자기 검열에 전율이 온 몸을 오싹하게 한다.

끝으로, 이제야말로 진보는 창조의 마당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 다시 읽어야 한다. 세계를 다시 읽고 우리 역사를 다시 일고 현실을 다시 얽어야 한다. 진화는 진보의 몫이다. 국가는 원래 보수의 몫이어서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기득권이다. 보수의 사유물이다. 그것을 빼앗는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아직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고 그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짓고 논 밭을 개간하고 좋은 종자를 구해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능력 있는 머슴을 고용하고 그를 부려 농사를 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 했던가 땅을 찾고 머슴을 고용하자마자 밭도 갈기도 전에 씨앗도 뿌리기 전에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기도 전에, 열매를 내 놓으라고 행복을 내 놓으라고 빵을 내놓으라고 머슴의 등 짝에 매질을 가했다. 그리고 쫓아 냈다. 참으로 한심하다. 이게 과연 역사의 주인이란 말인가 진보는 역사를 짓는 농사꾼이다. 스스로 씨앗이 되고 역사의 밭이 되고 농사꾼이 되어야 한다. 이제 진보진영은 자신들을 묶고 있는 역사87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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