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나와 60대의 정치적 경험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 어린 시절의 선거와 4.19 경험

맘에 드는 선택지가 없다면 거짓말이 되지만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라던가. 1950년대 미국식 교육 과정을 거의 그대로 베끼던 초등학교 때 생생한 내 기억에는 무기명 비밀 보통 평등 선거로 반장을 선출했다. 내가 중학교 마칠 때까지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담임이 임명했다. 우리는 선거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지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기에 박정희 군사정권의 선거 공포증과 혐오증으로 선거를 기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담임이 ‘오늘부터 아무개가 반장이다’ 하면 그걸로 끝이었고 그 신나는 선거 운동도 못하고 그 떠벌리던 유세를 못 들어 허전했다. 그 뒤 노태우 정권까지 임명이었다. 그러나 나는 1968년 교사 발령 받던 해부터 다른 교사들은 용의 수염을 건드리는 것만큼이나 큰일 날 것처럼 걱정했지만 신나는 선거로 반장을 뽑았다.

내가 선거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은 할아버지가 면장에 출마하셨을 때이다. 할아버지는 4·19 직후 시골의 면 단위까지 지방자치를 잠깐 실시할 때 면 의회 의장이셨는데 주변에서 면장을 나서야 된다고 부추겨서 마지못해 출마하셨다.

사랑방에 각 마을 조직책들이 가득이 모여서 한다는 소리가 서로 자기 마을에 돈을 써야한다고 주장하니까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돈 봉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낙선하셨고 그 뒤 수많은 배달 사고로 조직책들의 배만 불린 것을 알았다. 결국 할아버지는 돈 잃고 사람까지 잃어 크게 낙심하셨다.

또 하나의 정치적인 경험은 4·19였다. 내가 14세 때니까 4·19 학생 운동의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나에게도 많은 경험을 주었다. 1960년 봄 개학하면서부터 내가 다니는 중학교 교장 선생은 훈화를 하고 싶어 아침 조회를 자주 가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산꼭대기에 이 초봄의 찬바람 속에 어린 우리들과 별로 상관없는 얘기를 하려고 이처럼 오래도록 우리를 세워둘 이유가 없었다.

‘대학생들이 공부는 않고 나랏일에 뛰어드니 이 혼란 통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 이러다가 북괴가 쳐들어올 수도 있다. 여러분은 그런 일에 관심 갖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고 효도하는 길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교육청의 훈화 지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름 방학 끝나고 나서 어쩌면 저렇게 한 입으로 두 말 할 까 싶게 훈화 내용이 확 바뀐 것이다. ‘수많은 학생들의 희생으로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정권을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여러분은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하는 게 아닌가.

4.19와 5.16은 우리 집에도 가정불화를 가져왔다. 당시 할아버지는 민주당 면당의 주요한 역할을 하셨던 것 같고 아버지는 33세에 초등학교 교감을 39세에 교장을 하셨다. 두 분이 아침 밥상머리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시다가 할아버지가 ‘교장이나 한다는 놈이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헛소리만 하느냐’고 화를 내시면 ‘교장은 저절로 됐나요. 운동을 했으니까 됐죠. 아버지 때문에 그것도 못할 뻔 했어요.’하고 말대꾸를 하고 자시다 만 수저를 놓고 출근해 버리셨다. 한 지붕 밑에 여당과 야당이 한 살림을 하니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4·19는 옳았으나 5·16은 잘못된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반대였다. 내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언제나 붙박이 야당 편이고 아버지도 변함없이 여당 편이었다. 나는 언제나 할아버지가 존경스러웠으므로 할아버지의 말씀이 항상 옳게 들렸다. 만약에 나에게 정의감이나 정치의식 있다면 그 씨앗은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반대로 아버지는 반면교사의 역할에 충실 하셨다. 첩을 얻어 어머니를 학대한 일이나 가끔은 일본 군가인지 유행가인지를 흥얼대시는 것이나 할아버지는 학비를 넘치게 주시는데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깎으려고 흥정하시려는 것들을 겪으며 나는 나중에 절대로 아버지처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내 나이로 보아 뒤늦게 교육 운동에 참여했을 때 아버지가 출세를 위해 노력하신 것을 두고 그것도 운동이라고 강변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운동이라는 것은 목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임을 확실하게 알고 시작했다. 아마 아버지는 일제의 학창시절에 학생들이 사회주의 운동을 보고 들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출세를 위해 환심을 사는 노력조차도 운동이라는 아버지의 논리는 힘과 이익 추구의 논리였기에 힘과 이익이 쏠리는 쪽으로 말을 바꾸는 데도 앞서의 중학교 때 교장만큼이나 능란하셨다,

2. 뙤똥이의 군대 생활

나의 어린 시절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은 뙤똥이였다. 지금은 듣기 어려운 형용사인데 ‘뙤똥하다’의 뜻은 ‘높고 위험한 곳에 놓여 있어 떨어질까봐 아슬아슬한 상태’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것이 옳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니까 내가 왜 뙤똥한지 몰랐지만 친구들에게는 내 말과 행동이 또래의 통념에 벗어난 것으로 비쳤나보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그들 눈에 벗어나서 잘난 체하는 나를 따돌리려고 붙인 별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정작 문제가 된 것은 내가 뙤똥이라 군대 생활이 고달팠다는 것이다. 요즘 애들이 어른에게 딴지걸듯이 ‘왜 그래야 하죠’ ‘이러면 안 될까요.’하고 한마디 하면 고참들이 다 들어보지도 않고 ‘군대에서는 까라면 까는 거야 임마’하고 몽둥이찜질을 한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상대가 듣든 말든 하고 싶은 말을 기록용으로라도 남겨야만 시원했다. 사실은 내가 그 현장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흔적을 남기려는 의무감도 있었다.

월남가면 다 같이 총을 들고 전투하므로 고참이 괴롭혀서 함부로 원한을 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용병인 줄은 알았지만 여러 번 자원하여 드디어 월남으로 피신했다. 거기서 영어 시험을 치러 사이공 호텔에서 월남어 배워 통역을 했으므로 고참 손아귀에 벗어날 수 있었으니 뙤똥이에게는 천만 다행이었다. 복종심을 기르려고 고참을 통해 신참을 부려먹고 괴롭히는 군대 문화에 적응할 수 없었던 나는 한국에서라면 맞아서 병신이 되거나 자살하거나 탈영했을 것이다.

3. 연수원 사건

나를 뙤똥하게 만든 것은 존경하는 할아버지와 반면교사로서의 아버지였고 또 한 분이 더 있다. 중학교 때 한국 신학 대학을 갓 졸업하고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이재욱이라는 전도사였다. 그분의 설교와 삶도 존경스러웠고, 그의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나에게 지적 호기심이 채워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다. 신학 책만이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 서적들이 서가에 가득 꽂혀 있어 공주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도 입시 준비보다는 그 책을 빌려다가 탐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당시에 읽었던 책이 내가 교사가 되어 일정 연수를 받는데 커다란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 책들 때문이었다. 1981년에 충북 대학에서 1급 정교사 연수를 받을 때 김영삼이라는 국민 윤리 교수가 있었다. 그의 강의 제목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이었지만 당시 정치적 변화를 바라던 이들에게 구세주로 기대되었던 김대중을 빨갱이로 모는 내용이었다.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근거로 김대중을 돕는 주동 인물의 하나인 문동환 교수(문익환 목사의 동생 지금은 작고)는 당시 유신 시절 반독재 운동의 주요한 근거지였던 한국 신학 대학 출신이고 한국 신학 대학은 독일의 몰트만 신학에 물들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이 없는 무신론적 사회주의 혁명 신학이라는 것이었다. 3단 멀리 뛰기 논리로 그러니까 김대중은 빨갱이가 틀림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강의가 듣기 싫어서 그 시간에 다른 책을 꺼내 읽었다.

내가 읽었던 몰트만을 빨갱이로 몰아 내가 기대를 거는 김대중에게까지 결국 빨갱이 딱지를 붙이려 하자 기가 막혀서 기록용 발언으로 한마디 던졌다. 점심시간이 다 됐기에 “교수님 점심 먹고 하지요” 하자 얼굴이 빨개진 그가 “너 김대중파지.”하고 나에게도 빨갱이 딱지를 붙이려 들었다. “교수님, 정말 몰트만을 읽어 보셨어요. 제가 읽어보니 빨갱이가 아니던데요.” 이렇게 시작된 언쟁이 종 날 때까지 계속되고 무대가 연수원생(교사)들 수백 명이 식당에 가기 위해 쏟아져 나온 중앙 현관으로 옮겨졌다. 그는 들고 있는 부채로 삿대질을 하면서 실추된 권위를 찾으려고 고함을 쳤고 나도 지지 않으려고 그 부채를 잡고 맞고함을 쳤다.

그는 연수원 징계위에 나를 제소해서 내가 교수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니 자발적으로 퇴소해 달라, 아니면 강제로 퇴소시키겠다는 연수원 측의 서면 통보를 받았다. 나는 ‘해명 기회도 주지 않은 결정에 불복하고 연수를 마칠 것이며 만약에 해당 교수도 같은 정도의 처벌(직위해제)을 받는다면 수용하겠다’고 연수원장에게 입장을 밝혔다. 이 징계 내용을 알고 국어과 연수생들이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여 내가 무죄임을 주장하는 진정서에 거의 전원이 연대 서명하여 대학원 당국에 제출했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에 전 연수원생의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 서명 용지를 연수원 중앙 현관에 게시하였다.

이 사실이 내가 근무하는 청주 운호 고등학교에까지 알려지고 가까이 지내던 친구 교사가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삼청 교육대에 끌려가려고 일을 키우느냐고 걱정하였다. 그의 말은 지금은 가장 센 수사기관이자 권력 기관인 보안대가 이 사건이 시위로 이어질 것을 알면 어떤 구실로든지 나를 얽어 감방에 처넣을 것이란다. 그러니 선수를 쳐서 청주 지구 보안 대장에게 직접 찾아가 사건의 전말을 알리고 별것 아니라는 사실과 이럴 경우 어찌하면 좋으냐는 자문을 구하자는 것이다.

나는 은근히 삼청 교육대가 겁이 나서 과일을 사들고 그 친구가 미리 알아두었던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청주지구 보안대장은 의외로 친절했고 판단은 간명했다.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내가 자진 퇴소하고 내년에 연수 받으면 된다는 것이고 김영삼 교수가 내가 제출한 논술형 답안지의 일부를 절취하여 불온서적 탐독으로 고발한 부분은 검찰에 가서 소명하라는 것이다.

연수원에서는 제 2차 징계회의를 열어 연수생들의 시위로 번지지 않도록 나를 강제 퇴소시킬 것이며 김영삼 교수는 직위해제했다는 공고를 붙였다. 현실과 타협한 나는 국어과 연수원생들에게 보안대에서 알고 있다는 사실과 김영삼 교수가 고발한 사실을 밝히고 사건을 더 이상 확대시킬 수 없어 퇴소하겠노라고 밝히고 호출 받은 대로 검찰청으로 담당 검사를 찾아갔다.

우선 고발장을 보자고 했다. 답안 결론의 일부가 절취됐으며 문제 되는 부분에 빨간 줄이 쳐져 있었다. ‘역사 발전은 자유의 확충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검사는 이 문구가 내 생각이냐 아니면 인용이냐고 묻는다. 그는 김 교수가 낸 ‘공산주의 비판’이라는 논제를 왜 강의 내용으로 뒷받침 하지 않고(사실은 다른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았느냐고 따진다. 내 답변의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 곤란하게 될 거라고 겁도 주었다. 나는 그 부분은 인용인데 그 책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으니 생각나면 그 책을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세 차례 호출될 때까지 그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다가 우연히 그 책이 학교 도서관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4층 도서관으로 단숨에 뛰어 올라가 서가를 훑었다. 문득 한 곳에 시선이 멈춰졌는데 이규호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책이었다. 그 당시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의 가까운 친척 오빠로 알고 있는 이규호는 1979년 말 12.12 사태 이후 신군부의 국토 통일원 장관으로 발탁되고 1980년에 문교부 장관이 되어 이른바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신군부의 위장 간판을 만든 자의 책이었다. 책을 펼쳐보니 헤겔의 말이었다.

이튿날 이규호의 책을 보여주자 검사는 군말 없이 내 사건에 ‘혐의 무’라고 써 넣었다. 엄혹한 시절이라 직위해제 된 김영삼의 앙갚음으로 무고를 당하여 한 달 가까이 삼청 교육대에 끌려가지 않을까 떨고 지내야 했었다.

4. 교육 운동 경험

학교를 대전 신설 사립 고등학교로 옮겼다. 어느 날 책상에 놓인 전단지에 교사 공부 모임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다섯 명이 인도자도 없이 매일 토론하며 교육운동 이론을 공부하며 틈나는 대로 세를 불리기 위해 전단지를 돌렸다. 드디어 전교조의 전신인 전교협이 발족되고 내가 각 시도 대표로 민주당사에서 단식 농성 시작하면서 1989년 5월 전교조를 결성했다. 이어서 곧바로 해직의 칼바람이 춤추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도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며 나를 지키려고 시위를 계속한다는 소식을 농성장에서 들었다. 어떤 학생은 4층 유리창에 매달려 나를 면직시키면 뛰어내리겠다고 격렬하게 저항했다고도 한다. 내가 농성 마치고 출근했어도 아이들이 무서워 징계위원회를 열지 못하다가 보충 수업도 없는 8월 말에 징계위원회를 열고 나를 불렀다.

전교조 조합원들과 나는 내가 전교조 깃발을 들고 다른 조합원들은 각서를 쓰고 학교를 지킬 것을 결의한 후 징계위원회에 갔다. 회의만 열어놓고 교장이 나를 한 쪽으로 데려와 전교조 탈퇴 각서에 서명만 하면 교감 교장 시켜주겠다고 한참이나 회유했다. 나는 우리 학교의 악의 근원인 이사장의 동생 서무과장과 함께 나간다면 더 이상 출근 투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회의 마치고 서무과장 퇴진 약속을 조합원들에게 밝히고 눈물을 흘리며 교문을 나섰다. 그러나 2년 뒤에 서무과장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대치하는 힘의 경계선인 법제도의 뒷받침이 없는 사립학교 개혁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절실하게 느꼈다.

5. 나의 세대의 정치의식

내가 교육 운동에 참여한 것은 신앙적인 결단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자연의 법칙조차 불확정적인 통계라며 진리를 일축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생명이 진리의 증거라고 믿는다. 프랑스 혁명정신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 등 인간이 잘 살기 위해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들이 적어도 인간에게는 진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 진리는 내가 믿는 하느님의 뜻이며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생명을 더 잘 살리려는 그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입시지옥에서 탈락하여 체념하고 순종하는 값싼 노동자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주물되고 있는 아이들이 시들어가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전교협의 주장은 하느님이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나는 투옥되고 해직되는 수많은 동료 교사들을 보면서 저들은 무엇에서 동기부여를 받고 어디서 자기 확신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지 늘 궁금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에서 진리와의 만남과 그에 대한 투신과 충실성과 일관성으로 자신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윤리적 행동의 근거라는 주장이 떠올라 이제야 비로소 희생당한 수많은 동료 교사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과 나의 차이는 진리와의 만남 여부가 아니라, 만난 진리를 신격화하느냐 않느냐의 차이였다. 당연히 그들도 만나고 믿었던 진리에 투신하여 일관성에 충실했으나 그들이 만난 진리는 신이라는 이름이 필요 없는 진리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들이나 내가 만났던 궁극적인 진리는 생명을 더 잘 살리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었다. 교육운동을 하는 우리는 사랑하는 아이들을 보다 더 잘 살리는 것이라면 다 진리라는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1940년대 출생한 내 또래의 60대나 나의 앞 세대는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네 가지 진리(정치·과학·예술·애정)의 형식 중에 특히 정치적 형식의 진리를 만나기는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만약에 정치라는 것을 소박하게 자유와 권리를 찾는 활동이라거나 이해를 조정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면 우리 세대는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찾는 것이나 자기의 이익을 주장하기보다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가정이나 직장 또는 국가의 지배자나 지배 집단 논리에 종속되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자유나 권리 또는 이익을 배반하며 살았다. 지금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60대와 70대들이 무슨 전우회니 군경회니 또는 용사회니 하여 사회운동 단체들을 찾아가 각목을 들고 행패를 부리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애국 애족하는 방식이다.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살았던 우리 세대의 경험으로는 진리와의 만남으로 보다 나은 대안적인 삶을 꿈꾸고 실현하려는 노력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 60·70대가 이리된 것은 그들이 군사독재 시절에 그들이 보낸 청장년 30년 동안 반공 논리와 발전 논리에 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미국식 민주주의를 배웠지만 선거를 통한 선택지는 언제나 덜 썩은 생선을 고르는 문제였다. 개발 독재 시대에 승자 독식의 경쟁 사회, 힘의 논리가 판치는 사회, 돈이면 다 되는 사회, 출세 지상주의 사회, 수단 방법은 따지지 않는 결과 지상주의 사회가 우리 세대가 살았던 물이니 물고기인들 온전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세대의 대부분은 진리보다 힘과 돈이라는 물신에 경배하고 그것을 추구하던 세대였다.

60·70대 삶의 굴절과 속물적인 가치관을 보여주는 표본적인 사례가 바로 인간 이명박이다. 같은 대학 같은 학번인 최장집과 함께 한일 회담 반대 투쟁과 반독재 운동에 나섰지만 최장집의 삶은 학창 시절의 신념에 일관성과 충실성을 보였고 이명박의 삶은 철저하게 천민자본주의의 속물근성에 일관성과 충실성을 보였다. 이렇게 변절한 자가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 뜻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관 속의 가치관이라는 주관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들의 청장년 시절이 분단국가에서 군부 독재 기간이 너무 혹독했고 길었다는 객관적인 요인도 컸다.

60·70대는 50대와 40대에게 경제 발전의 주체인 양 우쭐하지만 그들에게 엄청난 민주화에 빚을 진 세대이다. 반공이나 개발 논리에 충실한 60대나 70대의 정치의식을 말한다면 자신이 정치의식을 가졌다는 것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이 정치의식을 가졌다는 사실을 혐오하던 세대였다. 주체적인 삶을 위해 정치의식을 가지고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는커녕 자기가 물들어 빨갱이로 몰리거나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봐 정치의식을 가지고 민주화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멀리했다. 내가 교육 운동에 참여했을 때 대전에서는 내 또래의 동지가 아주 없어 외로웠고 그럴수록 내가 정상이 아니라 뙤똥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세대이다,

교육 또한 콩나물 교실에서 토론하기 보다 더 빠른 결과를 얻는 필기와 암기의 시대였다. 사회과목 특히 국민 윤리는 반공과 효도와 충성이라는 복종의 논리를 암기하는 것이지 자유와 인권과 평등이라는 주체의 논리를 토론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학교부터 입시교육을 통하여 뒤처지는 아이들에게 체념을 내면화시켜 허드렛일을 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실업학교에서는 주체적인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고 노예적이고 피동적인 근로자의 직장 윤리를 주입시켰다.

30년이 넘는 군부 독재의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서 60대 이상은 어느 분야나 영역에서도 주체적인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실현해 줄 진리의 횃불을 만나기는 참으로 힘든 세대였다.

6. 무기력한 현재의 모습

그러나 지금 나는 전교조에 실망하고 있다. 결성초기에 네이스(교육정보 전산화 체제) 반대투쟁으로 좋은 세월 다 보낸 것이 한스러웠다. 차라리 교장 선출 보직제 등 학교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벌렸더라면 교사 대중과 국민들의 더 많은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비록 일정선에서 타협했거나 아니면 눈에 띄게 얻은 것이 없더라도 보이지 않게 얻은 자율성으로 교장의 억압이나 눈치에서 벗어난 교사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학생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더 큰 실망은 결성하기 전과 결성 초기에는 주동자로 몰리는 책임 있는 자리를 자기는 무능하다고 사양다가 전교조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정파 사이의 자리다툼이 지나쳐 서로를적대시하기까지 하였다. 그 엄청난 열정과 그에 따른 희생 위에 건설된 전교조라서 희생자들이 소금이 되어 전교조에는 그 치사한 정파 다툼이나 자리다툼의 이전투구는 없으리라고 장담했던 내가 어리석었다.(그렇게 되게 마련이거나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내가 정말로 어리석다.) 혁명의 열기가 식으면 얼마나 냉기가 도는지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식은 까닭에 이젠 사회주의 이상도 시들해졌다. 내게는 생산 수단의 공유 주체가 국가나 국민이나 노동자나 협동조합 등 누구여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잘못하는 사례의 하나겠지만 이를테면 한국 방송공사는 시청료를 내는 국민의 소유이다. 그러나 정권의 하수인을 시켜서 정권의 나팔로 활용하고 있다. 소액 주주와 대주주인 국가가 공유하는 그 수많은 공사들은 정권 창출의 공신들이 연봉 챙기러 가는 곳이다. 그렇다고 각종 공사의 노동자들이 공공재를 국민을 위해 쓰려고 투쟁하는가. 그도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공유된 생산 수단의 경영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과 시장이 아닌 다른 분배의 방법이 무엇인지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또 공동 소유와 집단 경영으로도 생산성을 높여 생산자와 소비자의 이익을 다 같이 만족시킬 수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또 일상이란 전선에서 자본 논리에 싸우다 지친 대다수의 현장 활동가들의 무관심으로 참여가 저조한데 어디까지 어느 영역까지 민주주의를 작동시킬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공산주의는 논외로 치고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보다는 아마도 경험의 축적에 따른 점진적인 민주 사회주의에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게으르고 무식한 내가 한국의 경험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성공한 다른 사례들도 공부하라거나 상상력을 가지라는 충고는 당연히 들어야 하지만.
지금은 조그마한 신앙 공동체 실험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무기력한 내 모습이 나의 하느님과 자식들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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