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노동잔혹사

퇴근

- 김민수(청년유니온)

“벌써 가려고? 작업분량이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약정 된 퇴근 시간을 10분 가량 넘긴 시각. 인간미를 발휘하여 10분 씩이나 유예 된 노동력을 투입해 주었건만, 주섬주섬 짐을 싸는 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음성이 전해온다. ‘벌써’라니? 이봐 친구, 지금 네 눈에는 시침에 6이라는 숫자에서 왼쪽으로 살짝 벗어난 거 안 보여? 유아 교육과정에서 시계 보는 법을 못 배운거야? 아니면 ‘약정 근로시간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라는 근로계약 내용에 대한 난독증인거야? 둘 중 하나라면 심란하고, 둘 다면 더욱 심란하다.

‘노동’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되는 나의 정체성은 -‘강남에 위치한 회사 사무실의 사무보조’이다. ‘연령’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되는 나의 정체성은 ‘청소년’이며, 대전에 사는 부모님과 떨어져 산다는 단서를 포함하면 가출, 아니 출가 청소년 쯤 되겠다. 이 지면에 나의 인류학적 연대기를 기록할 것은 아니니,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에서 지내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아무튼 교복을 입고, 내신점수의 경제학적 가치와 모의고사 등급이 남친(혹은 여친)의 외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찰하며 성숙하는 또래의 친구들과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점만 알아주시면 감사드리겠다.

청년유니온에서 같이 활동하는 형들과 자취를 하며 잉여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가끔 청년유니온 일정이 있으면 결합하고, 저녁이면 술 먹고, 새벽이면 술 먹고, 오후에는 잠 자는 한량 생활을 지속하던 나에게 뜻 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너 일 안할래?”

일을 소개 받게 된 내막에 대해서 주절주절 설명하면 길어지니 각설하고, 아무튼 여차저차하여 면접을 보고 여튼 합격했다. 월 급여 100만원에 나의 잉여생활이 청산 된 것이다.

“각 병원에서 올라 온 차트 확인하고 엑셀로 정리하시면 돼요.”

내가 맡은 일은 간단(?)하다. 이 회사가 사업을 진행하는 병원에서 자료가 넘어오면, 그 자료를 엑셀로 정리하는 것이다. -인류가 접하는 모든 노동이 그러하듯, 말은 쉽다. 엑셀이라면 초등학교 시절 컴퓨터 시간에 무궁화 마크가 박힌 저질 컴퓨터로 일주일에 한 번 끄적여 본 경험밖에 없지만, 면접 합격을 위해 대충 뻥을 쳐 놓은 상태였다. 첫 출근 전날 새벽에 함께 자취하는 청년유니온의 실무대마왕을 닦달하여 1시간 동안 속성으로 엑셀을 습득하였다지만 이것으로는 당연히 부족하다. 여튼 출근.

처음 며칠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사업이 진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리해야 할 자료도 많지 않고, 높은 수준의 실무능력을 요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나도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국에서 진행되는 이번 사업의 자료를 정리하는 인력은 나 뿐이다. 사업 초기에는 정리해야 할 자료가 많지 않아 적당히 널널했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이것은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중간에 담배 한 대 못 태우고 눈을 벌겋게 하루종일 타이핑했건만, 업무량은 줄어 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당하게 주어진 1시간의 점심시간을 FM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밥만 후딱 해치워가며 컴퓨터 앞에 매달렸지만, -택도 없다. 내가 처리해야 할 업무량은 점점 쌓여 갔고,

“벌써 가려고? 작업분량이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의 퇴근시간도 점점 미뤄졌다.
연장근로에 대한 수당은 주어지냐고요? -그 딴게 어딨나..

한 번 지나가듯이 초과근로에 대한 급여책정은 어떻게 되냐고 물었는데, 당신이 일처리 제대로 못해서 업무량이 밀렸고 그래서 연장근로를 하게 된 것인데 무슨 수댱이냐는 ‘퐝당한’ 메아리만 돌아왔다. 다시 말하면, 일주일에 44시간을 일하든 50시간을 일하든 나의 급여는 100만원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이 인간들은 월 100만원에 나를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자유이용권이라도 구입한 줄 아는 것인가?

디질 것들. 일이 많으면 사람을 더 뽑아야지, 왜 한 놈을 영혼까지 빨아먹는 것일까. 형들과 기울이기 시작한 술잔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새벽 4시이다. 아, 출근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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