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 윤여일(수유너머R)

1.

“술자리로 간 가게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대학원생인 이탈리아 여성에 관한 일입니다.

현재 외국인 유학생으로 결성된 자원봉사자 센터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진재해 후 고국의 부친이 티켓을 보내 3월 16일에 일단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이 시칠리아 섬인데, 리비아로부터 포탄이 날아온다는 소문이 돌아 곧바로 이탈리아 본토로 피난했습니다. 거기도 위험했는지 파리까지 도망쳐야 했습니다.

불과 며칠 동안 벌어진 일로 자지도 못하고 태어나고 처음으로 파리의 정신과에서 진찰을 받으며 수면제를 복용했다고 합니다. 16시간을 자고 일어나서야 간신히 회복했다네요.

그 후 일본에 돌아왔습니다. 곧바로 자원봉사센터의 활동에 참가하고, 벌써 몇 차례나 재해 지역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의 비참한 상황을 접하고 놀랐습니다.

도로나 큰 건물은 자위대나 전문업체가 아니면 처리할 수 없지만, 일반 민가는 자원봉사자가 들어오지 않으면 정리가 안 됩니다. 해일이 감싼 이후 집에는 진흙이 들러붙어 있는데, 없애려면 힘든 육체노동이 필요합니다.

5월이 되자 학기가 시작되어 주말에만 자원봉사 활동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왕복 기름값, 고속도로 요금, 철거 작업의 장비를 마련하는 데 돈이 듭니다.

현지에는 화장지도 티슈도 마실 물도 부족합니다.

자원봉사 활동을 위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휴대폰으로 찍힌 사진을 보니 외국인의 활동에 머리가 수그러졌습니다.

저로 가을에 한 번씩 현지의 철공 단지 합동 강연회를 하기 때문에, 거기서 강사로 초빙해 조금이라도 사례를 할 생각입니다.”

2.

이상은 ‘다케우치 요시미를 기록하는 모임’의 사이토 씨가 동회원인 혼다 히로코 씨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혼다 씨는 내게 그 편지를 옮기시며 이렇게 적으셨다.

“우리 일본인은 우리나라가 지금 직면한 커다란 곤경에 눈길을 빼앗긴 나머지, 세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일, 그것이 자연재해의 참화가 아니라면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이토 씨도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려 지금의 생활로 머리가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가 리비아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전혀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사람의 심정을 이 여성의 이야기로 처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머릿속에는 세계의 지도가 들어 있지 않음을 통절하게 느꼈습니다.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곧바로 자원봉사에 다시 나섰습니다.

공부에 힘쓰면서도 “외국 사람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꼼작 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이토 씨와 절실하게 지금 자신의 상태를 곱씹고 있습니다.

‘감사’라거나 ‘머리가 수그러진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가슴을 파고드는 심정.

사이토 씨와 함께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이토 씨는 이 여성분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소속한 모임에 부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또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되겠죠.

당신에게도 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사이토 씨에게 허가를 받아 메일의 일부를 첨부합니다.”

3.

이 메일의 공개를 혼다 씨에게 허락받았다. 그리고 지난 메일을 번역해 이번 주 ‘일본에서 온 목소리’에 올렸다.

그녀와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2008년 12월의 일이었다. ‘다케우치 요시미를 기록하는 모임’이 발족하던 자리였다. 당시 나는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일본의 사상가를 번역하고 있어 그 자리를 찾았다.

비록 그의 육체는 생을 잃었지만, 그가 남긴 글들에 다시 시대의 호흡을 주입하려는 후세대의 노력에 힘입어 그는 사상적으로 되살아나려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 역할을 혼다 씨가 맡고 계셨다. 그녀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유족분이시다.

그날에는 열 분 가까이 자리에 모이셨다. 다케우치의 제자 혹은 그와 연을 맺은 분들이셨다. 그래서 모이신 분들은 대개 오육십대셨다. 회고조의 이야기도 흘러나왔지만 몹시 진지한 회의였다. 1910년생인 다케우치 요시미는 1977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다케우치가 생을 마감한 그 연배의 분들께서 이제부터 다케우치를 기록하겠다고 다짐을 밝히신 것이다.

그날 나는 ‘세대’에 관해 생각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시대의 과제에 답을 제시하기보다 묵직한 물음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다케우치의 물음에 다시 시대의 호흡을 입히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놓은 물음들 가운데 얼마간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 다케우치가 내놓은 그 물음을 받아들이며 그 분들과 나는 나이는 다르지만 어떤 세대를 함께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혹은 앞 세대의 과제를 자신의 환경 속에서 음미할 때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나는 그 자리에 모인 분들의 다음 세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떤 종류의 세대 감각에는 누적되는 시간보다 고민의 연대가 더욱 중요하게 작용할지 모른다.

4.

그리고 2년 반이 지났다. 일본에 큰 재앙이 닥쳤다. 나는 그분들과 다른 사회, 다른 세대에 속한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재앙이 닥치자 그 분들과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정도는 분명히 다르지만 동시대의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지금 그분들은 여러 소식을 전해주고 계신다. 그중 한 가지가 위에 담은 이탈리아 여성의 이야기다. 국적과 세대는 다르지만,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누군가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재앙이 찾아왔지만, 사람의 이야기도 찾아왔다.

며칠 전 아는 후배가 일본으로 떠났다. 애초 프랑스로 갈 계획이었지만, 일본에 재앙이 닥치자 일본행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재해 현장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수개월 간 동요하는 일본사회를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비록 국적은 달라도 여러 사람들이 ‘일본에서 온 목소리’를 수놓고 있는 중이며, 수놓아 갈 것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