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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초현실, 그 사이의 마법의 순간들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요즘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일부러 목적지를 남겨놓고 한 두 정거장 미리 내려서 걷는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남은 거리를 유유히 걸을 수 있는 여유로움까지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이 여백의 시간에 아주 가끔 기대치 않은 장면들을 볼 때가 있다.

사진 제공 : 에르메스

오늘 오후가 그런 날이었다. 달력은 분명 6월 초를 가리키고 있는데, 정오에 내리쬐는 태양은 한여름 그 자체였다. 그 강하고 밝은 햇볕 아래, 머리가 아주 하얗게 새어버린 두 할머니가 위에는 분홍색 블라우스를 걸치고 굽은 등에는 가방을 멘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연신 손부채를 만들어가며 햇빛을 가리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 할머니들은 햇빛은 전혀 문제될게 없다는 듯이 깔깔대며 걸어가고 있었다. 구부정한 허리에 손에는 지팡이를 든 채, 할머니들은 마치 지구에 소풍 나온 사람들처럼 그렇게 내 앞을 지나갔다. 난 그저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사소한 풍경이 내게는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살다보면 밝은 대낮에도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 순간들은 매우 사소하고 미약하지만, 갑자기 우리 삶에 들어와서 가던 길을 멈춰 세우고 머뭇거리게 만든다. 이 마법의 순간들은 나를 흥분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이 순간을 기다리게도 되지만, 원한다고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므로 이럴 때에는 그저 더듬이를 치켜세우고 세상을 주시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어느 날 문득 이 마법의 순간이 또 찾아온다. 이걸 기록해 두어야지. 그러나 어떻게? 혹시 사진으로 찍어두면 이 마법의 순간이 오롯이 필름 안으로 들어올까?
이럴 때는 다른 사람이 기록해 둔 ‘마법의 순간’을 빌어야 한다. 그것이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배움이다. 시각적인 이미지로 때로는 時의 언어로 드러나는 그것. 최근 몇 년간 보았던 가장 흥미로운 이미지들은 회화가 아니라 영화였다. 그 중에서도 중국 6세대 감독인 지아장커 영화들이 특히 주목을 끈다. 그는 1997년 북경영화학원을 졸업하고 <소무> <플랫폼> <임소요> <스틸라이프> 등을 만들면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영화가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광적인 속도로 변화해가는 중국 사회와 그 속에서 욕망과 절망 사이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인민들의 모습이다.

그의 영화는 초현실주의 작품이 아니다. 혹은 대사가 너무 많거나 아예 거의 없어 뭘 보고 들으라는 건지 난해한 유럽의 예술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인간 극장’과 같은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지극히 소박하고 촌스러운 주인공들이 등장해서 그들만큼이나 평범한 환경 속에서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특별한 사건이나 낭만적인 사랑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그런데 이 평범한 일상 속에 그 ‘마법의 순간’의 등장한다. 그의 데뷔작 <소무>에서 그것은 매우 미약하고 사소한 순간이었다. 이를테면 주인공 소무가 형광들을 바꾸는 장면에서 깜박깜박 거리는 암전의 순간이 등장한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그래서 그저 평범한 일상의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그 불빛과 사람들의 움직임이 아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지아장커는 이런 사소한 장면을 일상 속의 장면들에 아주 살짝 끼워놓고 관객들과 게임을 벌인다.

<세계>라는 영화는 북경의 놀이공원인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 공원은 잘 정돈되고 세련된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 찬 꿈의 공간이다. 영화는 이 꿈의 공간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최하층 노동자인 민공들이 주인공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주인공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하얀 드레스를 걸친 모델들 가운데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주인공 자오타오가 서 있다. 그녀가 그렇게 원하던 그 곳은 가상의 공간인 무대 위다. 이 가상의 무대에서 민공들이 느끼는 현실과의 괴리감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결국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들은 신혼여행을 간 부부를 대신해서 집을 봐주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그들이 다른 사람의 공간에 머물고 있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순간 자신들의 죽음을 알게 된다. “우리 죽은 거 맞아?” “아니…, 우린 이제 막 시작하는 거야.” 현실감의 상실과 함께 증폭되는 몽환적 분위기의 비애감.

지아장커가 보여주는 이 ‘낯선 순간’은 비교적 최근작인 <스틸라이프>에 이르러 보다 더 강하게 사회적인 층위와 맞물린다. 중국 산샤라는 지역에서 대규모 댐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여기에서 세계 최대의 수력발전소가 지어지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이 동반될 것이다. 그에 비해 2천년의 문화가 사라지고 백만 명의 이주민이 생기는 문제는 저들에게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지금 진행중인 4대강 공사의 대륙판이라 생각하면 된다.

<스틸라이프>는 영화의 첫 장면은 주인공이 강물을 따라 배를 타고 싼샤댐 공사 현장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외지에 살고 있는 그는 떠나간 아내와 딸을 찾으러 이곳에 오게 되었으나 이미 물에 잠긴지 오래된 곳에서 그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기다리기로 한다. 영화는 동일한 장소에 도착한 또 다른 외지의 여성을 오버랩 시켜 보여주는데, 그녀는 2년 동안 연락이 끊긴 남편을 찾아 여기에 도착했다. 영화는 시종일관 헤어진 가족들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들을 쫒아가며 변해가는 싼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일상적이고 느슨한 플롯을 전개해가는 영화에서 갑자기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삽입되어 보는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사실 이 혼재의 방식은 지아장커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으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씬들을 교차로 편집하거나, 배우와 비전문배우를 섞어 캐스팅을 하는 것에서 이미 발견된다.

“나는 현실 생활 속에서 초현실주의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인 요소들을 바라보는 순간을 좋아한다. 이것은 없는 것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일을 단지 확대하거나 강조했을 뿐이다. … 내가 좋아하는 방식은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것, 즉 현실을 대상으로 그 안에 있는 추상적 부분과 표현주의적 요소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지아장커, 중국 영화의 미래> 중에서)

<스틸라이프>에서는 영화 중반에 난데없이 UFO가 날아가거나 갑자기 건물이 솟아오르는 등의 비현실적인 장면들이 나와 보는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 기이한 장면들가운데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마법의 순간’은 ‘노동’의 장면이다. 이 댐 공사에 동원된 철거현장의 노동자들은 웃통을 벗은 채 곡괭이를 내리치고 깨진 돌을 운반한다. 문득 이 철거현장에 소독작업반원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장면이 매우 기이하다. 그들은 실험실에서 금방 튀어나온 과학자들처럼, 혹은 지구밖에서 날아온 외계인처럼 방독면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그들이 저렇게 무시무시한 보호장비를 갖추고서야 들어오는 이 철거의 현장이, 그럼 이제까지 마스크는 커녕 옷조차 제대로 입지 않은 노동자들이 먹고 자던 바로 그 삶의 터전이었다는 말인가.

지아장커는 다큐멘터리 기법을 선호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삶 속을 파고드는 다큐멘터리 방식에는 저항하고 방어하기 때문이다.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해진다. 거꾸로 영화를 보는 우리들로서는 평범한 순간에 등장하는 이 사소하고도 낯선 장면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방출되는 기이한 기호들을 해독해 내야 한다. 들뢰즈는 “기호에 민감한 것, 그리고 세계를 해독해 내야 할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확실히 타고난 재능”이라고 말했다.(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중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무지와 게으름 때문에 이 기호들을 흘려버리지만.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해독의 고통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배움의 과정이 아니던가.

응답 2개

  1. 에르메스말하길

    글쎄. 예술이 곧 정치는 아니니까 너무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 해요. 사실 모든 ‘일상적임’에는 ‘비현실적임’이 함께 있는거죠.

  2. 말하길

    음, 꼭 보고 싶어요. 이 잔혹인 현실에 초현실적인 기적이 어슬렁거리며 걸어다니는 걸 언제쯤 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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