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와 떠난 여행

6화 넌 내게 정말 특별한 존재란다.

- 배문희

풀여치를 만난 이후 내게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골칫덩어리로만 여겨졌던 고장난 물건들 하나 하나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고물들은 그저 어디 한 부분이 고장난 것일 뿐 존재 자체가 모조리 쓸모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풀여치만 해도 그랬다. 페달이 떨어져 나가고 타이어에 빵구가 나긴 했지만 종을 튕기면 찌르르 찌르르 기분 좋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뿐만 아니라 연둣빛의 늘씬한 몸매는 마치 풀잎 위에서 사뿐히 균형을 잡고 있는 풀여치처럼 늠름해 보였다.

그즈음 내게는 새로운 일이 맡겨졌다. 바로 얄리의 다락방에서 보조일꾼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수자언니는 나를 바리스타로 키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난 도무지 주방 일에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결국 수자언니는 나를 카페 다락방으로 올려 보냈다. 나무 계단을 밟고 다락방에 올라서자 망치와 톱, 페인트와 사포, 그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공구들이 가득한 공간이 펼쳐졌다. 마침 얄리는 한쪽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새로운 다리를 만들어주고 있던 참이었다.

고장난 물건들을 고치는 얄리의 모습은 무척 진지하고 정성스러웠다. 그는 고장난 물건을 이곳저곳 부드럽게 어루만진 후 한참동안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나선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구나. 마음이 많이 아팠겠구나.”, “오호! 빨간 페인트로 칠해달라고? 알았다.” 등등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곤 했다.

얄리는 물건을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쓰임을 개발하기도 했다. 구멍 난 운동화를 화분으로 만들거나 고장난 오븐을 예쁘게 색칠해 우편함으로 만들거나 밥그릇을 종으로 만드는 식이었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물건들은 갖가지 상상들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운동화 안에서 피어난 꽃송이들이 뚜벅뚜벅 걸어간다던지 오븐 우편함에서 꺼낸 편지들이 따끈따끈하게 데워져 있다던지 하는 상상들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밥그릇 종이 은은한 종소리를 낼 때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살포시 눈을 감는 습관도 생겼다.

굳이 새로운 쓰임을 만들지 않아도 상상만으로 충분한 물건들도 있었다. 고장난 타자기는 그 자체로 완벽한 악기였다. 나몽달 씨와 그의 친구들은 기타연주를 할 때 타자기를 끌어 들이곤 했는데 기타의 ‘둥둥둥’과 타자기의 ‘첩첩청청’이 자아내는 화음은 풀벌레들까지 연주를 멈추고 귀 기울일 정도로 멋드러졌다. 그런가하면 랭보 엉아는 고장난 타자기에 종이를 끼우고 혼자만이 해독할 수 있는 시를 써내려가기도 했다.

고장난 공중전화 부스는 뻥쟁이 염씨 아저씨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특히 비가 오거나 안개가 짙은 날이면 공중전화 부스 안에 들어가 나올 줄을 몰랐다. 마냥 서서 끊어진 수화기를 붙들고 통화하는 것이다. 도라에몽 아저씨는 찌그러진 전신거울에 모습을 비추며 도라에몽 춤을 연습하곤 했다. 이제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도라에몽 춤을 유일하게 보아주는 존재는 찌그러진 거울 뿐이었다. 어쩌면 찌그러진 거울 속에서만큼은 춤을 못 춘다는 이유로 도라에몽 역할을 빼앗긴 이름 없는 곰돌이가 아니라 당당하고 늠름한 도라에몽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단다.”

나는 그제 서야 히피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고물투성이들은 대체 뭐죠?”라는 나의 질문에 “대체 어디에 고물이 있다는 거냐”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던 이유에 대해서도. 정말이지 이곳에 고물은 하나도 없었다.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후, 한 곳도 없었어. 나를 받아주는 일터가. 단지 손가락만 고장 났을 뿐인데 왜 다르다고만 생각할까. 그제 서야 알게 됐지. 고장난 것은 내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 카페를 만들었는지도 몰라. 그리고 이 물건들을 통해 사람들의 고장난 기억 속 어딘가에 잊혀져버린 것들을 되살리고 싶었는지도.”

얄리는 고장난 것은 물건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분명 이 물건들도 처음엔 누군가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물건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에게 버려져서 이곳까지 흘러 들어왔다. 이곳의 물건들은 미지의 공간에서 흘러 들어온 것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장난 기억 속 어딘가에서 빠져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이곳의 물건들은 더 이상 고물덩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고물들을 보물로 변하게 했을까. 그건 값비싼 장신구나 탁월한 기술 같은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해. 그러면 말을 걸어 올 거야.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너에게.”

하지만 얄리의 이 말 만큼은 믿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도 눈과 귀가 달려 있다니. 게다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내게 말을 걸어 올 거라니. 설령 그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 온다고 해도 나는 답해줄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여지껏 내가 어딘가 대단하다거나 남에게 도움이 될 만큼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눈꼽 만큼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 ‘고장난 기억’ 카페에서 가장 고장난 존재는 다름 아닌 나일 것이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나만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락방 구석에 콕 박혀 남몰래 한숨을 쉬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 카페 친구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괴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가 되면 다시 불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어느 순간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벗어났고 내 또래와 동 떨어져 혼자만 고립돼 있는 기분이었다. 패자부활전은 게임 속에서만 존재하는 규칙이었고 진짜 현실에서는 한번 미끄러지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날은 유독 달 밝은 밤이었다. 뜰앞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으려니 갑자기 먹먹한 설움 같은 것이 밀려왔다. 아마도 달빛이 너무 밝은 탓이었을 게다. 얼굴을 무릎에 묻고 한참을 울고 있었을까. 어디선가 맑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지 마. 모모.”

고개를 들어보니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나. 풀여치.”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 풀여치가 서 있었다.

“그래, 너였구나.”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풀여치라는 멋진 이름을 지어줘서 정말 고마워.”

“이름이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네가 무척이나 외로워하고 있다는 걸.”

“치이. 네가 내 심정을 어떻게 알겠니.”

나는 눈물을 닦으며 풀여치를 바라봤다. 풀여치의 몸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나 역시 너를 만나기 전에는 내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척 괴로웠어. 하지만 너를 만난 후 모든 것이 달라졌어. 넌 내게 정말 특별한 존재란다.”

응답 2개

  1. 소우주말하길

    얄리네 다락방에 가보고싶네요. 매번 재미있게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 나무야말하길

    풀여치 많이 기다렸습니다
    어디갔다 이제 왔니 풀여치야^^

    이번 글 마치 내이야기 같군요… 나도 어디엔가 쓸모가 있겠죠ㅠㅠ
    풀여치가 “넌 내개 정말 특별한 존재란다”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 기분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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