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강좌후기

- 오노아

개별의지와 상관없이 두 노동 신체 사이의 결합에서 발생한 힘에 의하여 불가항력적으로, 어쩔 수없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채 구성-사육당한 신체가 삶의 주변 환경 배치와는 전연 무관하게 책과 인문학을 향한 자연발생학적 관심 때문에 사설 인문학의 성지 수유너머 측에서 개설하는 강좌나 세미나들을 코뮤넷에 공지할라치면 사이트만 한참을 기웃거리며 애꿎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 창닫기 버튼을 누르고 마는 그런 부류의 소시민(小市民), 아니 소심인(小心人)입니다. 기회만 된다면 자주 방문하여 함께 공부하고 싶지만, 저와 같은 소심인에게는 열린 광장[아곤]에 걸어 나가 남들 앞에서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무척 부담스럽고 두려운 일이랍니다.
그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주권 대표들께서 수많은 소심인들이 열린 광장에 걸어 나올 수 있게 힘과 용기와 의지를 부여해 주시며 학습한 것을 직접 실천해 볼 수 있게 돕는 정치를 하시니 얼마나 훌륭하신 분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그렇게도 기대하고 고대하던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어 버리는 건 아닐는지요.
아마도 한민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민족에게 부여된 유전메커니즘이 있는 듯합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언제부턴가 콩 한쪽도 함께 나눠먹기를 실천하더니만 어느 날 영토도 절반으로 나누더니 이젠 대학등록금 마저도 반으로 나누려 합니다. 그런데 절반만큼은 꼭 자신들이 부담하겠다는 소심인들과 함께하니 그분들도 심중에 기쁨이 가득한 나날을 보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여튼, 세상에 나고 보니 선진들의 노고로 민주화가 이룩된 국가에서 태어나고만 겁니다. 아니 정확히 하자면 태어날 때는 민주화를 위한 투쟁 중이였지만, 공교육기관에 강제입소당한 후에는 진정한 민주주의로 불리는 국가가 되고만 겁니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자질이 부족해 입법자는 못된다고 하더라도 민주적으로다가 공교육과정에 대한 거부발언 정도는 해봄직도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민주화 운동의 주체로 결격사유를 지닌 자가 어찌 대인들에게 -정말 대인[巨人]들- 반론을 아니 의견 내지는 조금 다른 견해를 제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저 제가 민주화를 위해 한 일이라고는 군 입대를 하기도 전에 최루가스를 조금 마셔본 일 밖에 없다보니, 이런 상황을 굳이 비유할라치면 끼니를 위해 어른들이 밖에서 피땀을 흘려 돈 벌어 쌀 사고 찬거리를 마련한 뒤 쌀을 씻어 솥에 담고 불 뗄 때 괜히 옆에서 알짱거리다가 메케한 연기 들이마신 정도 밖에 안 되겠지요. 하여, 제 자신이 나서서 딱히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논리적으로 논박할 다른 말도 없고 심히 송구스러워 고개 숙인 인간으로 12년 동안 앞만 보고 내달렸지 뭡니까. 고개는 숙였으나 어찌 순간순간 의구심이 들지 않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괴이한 민주적 통제 방식은 이해하기도 힘들고 그에 맞춰 적응하기도 힘들지만 둘러보면 죄다 그러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 않았겠습니까. 훗날 소를 키워보니 제가 그때 지닌 생각과 반응들이 이제는 이해가 된답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서도 목자와 양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설명해 주더군요.

아참, 전 지금은 소를 키우는 목축업자입니다. 그렇다고 소떼를 끌고 전국을 유랑할 기술은 없답니다. 한때 이 땅에도 꽤나 유명한 유목인이 있었더랬지요. 유목인들의 아버지 격인 그는 자전거로 쌀을 배달하셨는지, 쌀을 팔다 자전거를 타신 분인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 전설 속 인물이신데, 어느 날 소떼를 끌고 국경을 넘나드셨다고 합니다. 저도 열심히 키우다 보면 소떼를 끌고 4대강 정도는 건너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사실 소를 키운다고 하지만 소를 키워본 적은 없습니다. 소들이 알아서 크더군요. 무슨 말인고 하면 ‘네가 아무리 고민한다고 한들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는 성경말씀을 떠올리면 됩니다. 엄밀히 따져보면, 소들이 성장하는데 제가 방해요소만 되었을 뿐입니다. 도리어 소들이 자신들의 살과 피로 저를 키워주고 있는 것이죠. 갑자기 예수님이 생각나면서 인도인들이 소를 왜 신격화했는지 그 이유가 오버랩 되는 군요. 어느 날, 저를 키워준 소들이 죄다 부활하면 어떡하죠?
그건 그렇고, 전 좋아서 목축을 하는 건 아닙니다. 뒤늦게 공부다운 공부를 알게 되니 그렇게 하고 싶었고 또한 삶을 마감하기 전에 못다 읽을 책들을 읽고 싶어 도서관을 전전하던 중 가족들에게 붙잡혀 민주적인 회의와 절차를 거쳐 목장에 팔린 겁니다. 지금도 틈만 나면 탈주를 거듭합니다만 추적자들의 기술이 만만치 않더군요. – 참고로 고병권 선생님의 『추방과 탈주』가 목장(시설)탈주기술을 익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도망만 칠 줄 알았지, 삶의 배치를 바꾸기엔 기술과 완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런 찰나에 이 시대의 제도와 툴을 이해하면 부족한 능력을 채우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싶어 강좌에 참여케 되었답니다. 후기를 청탁받은 원고의 분량은 다해가는데 이제야 참석 이유가 밝혀졌군요.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가 되어 버렸네요. 급히 마무리 해보겠습니다. 아마 이것이 성공하면 목축업자 중에서 세상에서 제일 글 잘 쓰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겁니다.

강좌에선 우리가 민주화된 시공간에 산다고 생각했던 탓인지 스스로 민주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품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그 미지의 영역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디오게네스가 자신에게 스스로 부여한 개 이미지와 디오게네스와 플라톤과의 길거리 대화를 통해 새롭게 사유한 샐러드 이미지를 통해 세상과 마주침이 그리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그리고 데모스의 힘이 무화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의되지 않는 영역을 만들며 삶을 꾸려 가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데모크라시)’임을 새롭게 공부했답니다. 민주주의의 스타일로 삶을 살아가는 것. 정말 매력적인 일이였더군요. 기회가 된다면 여러분도 동참해 보시지요. 허망한 빛의 광량에 눈이 멀어 스스로 불로 뛰어들어 삶을 소진해버리는 불나방으로서가 아닌, 실의와 절망만이 가득한 칠흑 같은 진정한 어둠속에 끈덕지게 머물며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감각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탐색하며, 닿는 것을 친구로 만들며 어둠을 직시할 수 있기까지 서로 눈이 되어 연대하는 능력을 부여해 줄 책과 강좌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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