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85호 타워크레인, 나는 데모스의 힘을 보았다

- 박정수(수유너머R)

쥐 그래피티 후원을 위한 ‘파티하쥐’가 멋지게 치러졌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야마가타 트위스터와 ‘저질, 돈만 아는 저질’을 외치며 디오니소스 제전의 무리들처럼 춤추며 가두를 점거한 게 압권이었습니다. 두리반은 살아있고, 우리는 여기서 얼마든지 즐기며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저들에게 보여준 파티였습니다. 그 때문인지 6월 8일에 시행사는 두리반에 새 점포를 마련해주겠다는 합의문에 서명했습니다. 철거싸움의 역사에 승리의 일획을 긋는 데 일조하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파티 중에 유선이가 제게 와서, 기분 좋다고, 그런데 자꾸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150일째 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이 생각난다고, 오빠 꼭 한번 가 보라고, 아니, 꼭 가야 한다고 울먹였습니다. 그전까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 싸움도 몰랐고 김진숙이란 이름도 처음 들었습니다. 다음날이면 일본으로 또 다른 싸움을 하러 떠나는 유선이의 간절한 요구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6월 11일 아침에 차를 몰고 부산 영도로 출발했습니다. ‘쥐 20’ 티셔츠 쉰 장과 쥐 그래피티 실습 도구들, 그리고 쥐 포스터 현수막을 싣고 한진중공업으로 갔습니다. 왜 6월 11일날 가라고 했을까 했더니 그날 밤에 ‘희망의 버스’가 온다고 하더군요.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 그리고 구로노동자문학회 시절에 친했던 경동이 형이 불러모운 김진숙 응원부대 700여명이 온다고 하더군요. 노동조합 농성장에 촛불집회의 시민들이, 날나리들이, 동원된 조직이 아니라 자발적인 개인들이 연대하러 간다니, 참 놀라운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무슨 일일까? 무엇이 저 외부세력들을 85호 크레인으로 불러 모았을까? 궁금한 마음을 싣고 한진중공업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100여명의 지역 주민들이 모여 있더군요. 조남호 회장이 ‘CJ 시큐리티’에 외주한 사병들이 공장을 침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희망의 버스를 환대하기 위해 아침부터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용역깡패들 바로 앞에 피켓을 들고 서 있으면서 영화 <친구>의 현장에 와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한때 건달이었던 건설노조원이 용역깡패들을 향해 “주먹은 주먹을 쓸 줄 아는 사람한테 써야 한다. 이 선량한 사람들한테 주먹을 휘두르는 건 양아치다. 내일 영도다리 밑으로 와라 시언하게 한판 붙어 주께” 라고 합니다. 정말 ‘깍두기’처럼 생긴 용역깡패가 욕을 하는 주민에게 “욕하지 마소! 나도 묵고 살라고 이러는 거 아닙니꺼?” 라고 항변합니다. 여기 저기서 주민들과 용역들 간에 거친 욕설과 주먹이 오갑니다. “내 동생이 조폭 출신 아잉교. 점마들도 참 안 된 기라예. 가난한 집에서 나 고등학교 때리치고 저 짓하다 중간보스 되믄 술집 하나 차릴 꿈으로 저러는 기지예. 자들 중 70% 이상은 알바하러 온 대학생 아니면 고등학생이라예. 자들한테는 티셔츠도 안 줘요. 검은 색 옷 입고 오라고 경비알바 공고보고 온 거지예. 저 보믄 동의공전 티셔츠도 있어요.”

그 분 말씀 중에 피가 거꾸로 솟는 말이 있었습니다. “자들 뭐 알고 왔겠습니까? 오믄 윗대가리가 세뇌시킨다 아입니꺼. ‘저 사람들 중 태반이 너희들처럼 돈 받고 동원된 거라. 장애자 많이 왔제? 집구석에 쳐박혀 있을 장애자가 이까이 온 거 보면 알겠제? 다 돈 받고 온기라. 그러니 다 똑같은 기라’고 가르친다 안 합니까?” 제게도 발언기회가 주어져서 그랬습니다. “나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장애인분들과 맑스, 푸코, 루신을 공부하고 있다. 장애인들은 그 누구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당신들 눈엔 저들이 돈 받고 온 것처럼 보이나?”

희망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세 차례 집회를 했고 중간에 많은 분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부산에 사는 날라리 외부세력 여대생들에게서 부산에도 ‘수유너머’를 밴치마킹한 공부공동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15년동안 전교조 활동을 해 오신 선생님은 “정말 무서운 건 학교에서 지문감식장치를 도입해도 별다른 반발이 없다는 거다. 통제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현실이 무섭다.” 라며 용역들이 입은 티셔츠 등판의 ‘security’란 글자를 보며 말씀하십니다.

여러 분들한테 김진숙 지도위원을 아느냐. 어떤 사람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길래 노동조합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700명의 외부세력을 불러 모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다들 김진숙씨에 대한 개인적인 감회를 술회하십니다. 김진숙은 그렇게 부산 지역 주민들 한명 한명의 마음과 인연의 끈을 맺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현대자동차 비정규지회 부위원장이었다 해고되어 지금은 노동자신문 기자로 있는 조성웅씨로부터 김진숙과 부산지역 대공장노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진숙이 어떤 사람이냐고? 그 사람은 도사다.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도사고 사람을 모우는 데 도사다. 그녀는 참으로 강한 사람이다. 대공장노조집행부가 그동안 한 짓을 봐라. 지난 10년 동안 정리해고 싸움을 할 때마다 ‘몇 명 자를 게 몇명 살려다오’ 식으로 회사와 거래만 해온 그 겁많고 이기적이고 관료적인 노조집행부에 대해서는 욕 한마디 않고 저 위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못나고 불쌍한 노조원들을 지켜달라고, 소금꽃을 피워가며 처자식 먹여살리는 그들의 일상을 지켜달라고 죽음의 크레인 위로 묵묵히 올라간 걸 봐라. 얼마나 강하냐? 그건 식물성 투쟁의지다. 화염병과 쇠파이프로는 가 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집회 중에 놀라운 장면을 봤습니다. 민노당 지회 간부가 연대발언을 하려는데 여기저기서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코빼기도 안 뵈더니. 니들이 여기 뭐하러 왔노? 또 수습하고 협상하러 왔나?” 그렇습니다. 민주노조, 민주노동, 민주노동당, ‘민주’란 말을 걸고 있는 조직이 그동안 한 일은 ‘대의’와 ‘협상’밖에 없었습니다. 노동자를 향해서는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된 노동자 대의기구니 내 말을 들으라며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자본가에 대해서는 ‘몇명 자를게 몇명 살려다오’ 식의 협상으로 일관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같이 일하고 술 먹던 노동자들을 해고시키자는 협상문에 도장을 찍으면 평생 가슴에 한이 되지 않을까요? 그 치욕과 자책감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그분이 피식 웃습니다. “자책감? 지난 10년 동안 민주노조는 그런 일을 밥 먹듯이 해 왔습니다. 죄의식은 고사하고 당당히 자신의 협상능력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 말 때문인지 사회를 맡은 노조간부의 ‘민주노조 사수하자’라는 구호가 귀에 거슬렸습니다. 지켜내야할 민주노조란 어떤 것이었던가요? 오직 형식적 절차와 대의, 협상과 거래만 있는 민주노조였습니다. 그 절차적 민주주의 하에서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와 죽음으로 내 몰렸습니다. 노동자들을 추방하는 절차적 민주주의였습니다. 노예 같은 고용의 자격과 무자격자를 선별하는 죽음의 체로 기능하는 민주주의였습니다.

시를 쓴다는 조성웅씨는 민주노조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켜야 할 민주노조가 아니라 새로운 민주주의가 도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직 공장만 보고, 자기 밥그릇만 보고, 노동조합만 보는 민주노조의 담이 허물어져 공장이 사회로 열리고, 조합이 삶의 네트워크로 열리는 새로운 민주노조가 도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밤 오는 희망의 버스가,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이 관료적 거래집단인 민주노조의 담벼락을 허물고 새로운 감성과 활발발한 에너지의 주체를 형성하는 시발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온 날라리 외부세력은 공장 담을 넘어 85호 타워크레인의 김진숙과 만났습니다. 밤새 열띤 토론을 벌렸고 서로의 얘기를 나눴으며 오전에는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해고자 가족들이 준비한 양말 한 켤레씩 들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귀성버스에 올랐습니다. 조성웅씨의 말처럼 희망의 버스가 민주노조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의와 협상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노동자의 정체성과 촛불시민의 정체성이 허물어지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노동과 놀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익과 생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름붙일 수 없는 ‘데모스의 힘'(democracy)이 도래하기를 희망합니다. 6월 11일 밤 85호 크레인 밑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연설(http://www.youtube.com/watch?v=Nwloxtf7k8Q)을 들으며, 그 연설에 공명하는 날라리 외부세력 속에서 저는 도래한 민주주의, ‘데모스의 힘’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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