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인간을 되살려내다

- 풍경지기 박혜숙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지음, 돌베개

2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막막한 느낌만 가득했다. 무거운 안개가 내려 회색빛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볼 수 없었다. 최근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무거운 안개 속으로 조금씩 걸어들어갔다.

내 옆에는 프리모 레비가 함께 있다. 그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나무 신발을 신고 힘겹게 나를 수용소로 안내한다. 온통 어두운 잿빛이다.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들이 보인다. 그러나 한결같이 표정이 지워져있다. 그들의 팔다리가 움직인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

내가 수용소로 걸어 들어갔지만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 눈동자에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인간이 담겨있지 않다. 추위와 배고픔이 일상이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의 빵을 남과 나눌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들은 묽은 죽을 받지 않기 위해 배급 줄에서 싸운다. 자신이 가진 낡은 물건들을 누군가 훔쳐 갈까봐 한 순간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빵으로 바꾸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훔쳐낸다. 불시의 선발에서 가스실로 향하게 된 동료를 바라보며 자신이 그 속에 있지 않음을 안도한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그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추위와 싸우고 배고픔과 싸우고 있었다. 생존하기 위해, 엄밀히 말하자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그들은 누군가의 빵을 훔치고 물건을 훔치고 있었다. 어떤 도덕적 책임도 느끼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이곳에 이성이나 토론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들을 이 공간에 가둔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이성이나 토론을 빼앗아갔다. 더 이상 이성이 통하지 않고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은 도덕적 의무도 사라진 공간이 되었다.

그들은 그들을 가둔 존재조차 직접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그들을 감시하는 존재는 그들과 같은 해프틀링(포로) 중에서 카포(반장)로 선발된 사람들이다. 이런 존재가 되기 위해 그들은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갇혀있는 존재가 갇혀있는 존재를 더 가혹하게 가둔다. 이중 삼중의 수용소이다.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할 정도로 수용소는 인간도, 신도 지워낸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은 연민과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시간은 그런 지옥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으로 가득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갑갑하다. 그들의 눈빛이 누군가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의 눈빛이 그러하고, 동료들의 눈빛이 그러하고, 아이들의 눈빛이 그러하다. 점점 닮아간다. 생존에 대한 공포로 인해 주어지는 것들을 소화도 하지 않은 채 먹어대는 존재가 되어간다. ‘지식’으로 포장된 불안과 공포가 교사와 학생의 머리를, 가슴을 채우고 있다. 생존 본능만 남고 이성과 토론을 잃어버리는 교육현장에는 점점 인간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 지점에서 ‘인권’ 문제조차도 왜곡된다.

얼마 전 여름방학에 열릴 김해 청소년 인문학 읽기 전국대회를 위한 교사 워크숍에서 도정일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선생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결코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무정한 세계이며 목적없는 세계, 의미없는 세계라고 정의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인 채 살아갈 수는 없다고 했다. 이런 세계를 너와 나의 관계가 따뜻하게 확장되는 유정한 세계로, 목적있는 세계로, 의미있는 세계로 만들기 위해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통해 인간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에게 선생의 이야기는 더욱 절실하게 와닿았다.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도 프리모 레비는 단테의 신곡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책의「오디세우스의 노래」편을 보면 레비가 장에게 단테의 신곡 한 대목을 들려주려 애를 쓰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노력이 레비를 그런 생활 속에서도 ‘나에게 배급된 빵’만이 아니라 ‘그 속에 놓여있는 사람’을 바라보게 했다.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레비였기에 독일군들이 모두 퇴각한 후 죽음의 그림자가 자욱한 수용소에서 그는 사람들을 해프틀링에서 인간으로 서서히 변모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세상이 모두 이런 수용소로 변해버리지 않도록 이 공간에서 일어난 일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그 속에서 인간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프리모 레비는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책은 여러 가지 사건을 겪었고 너무나 평범한 나의 현재와 잔인했던 아우슈비츠에서의 과거 사이에 끼어들게 되었다. 아주 신기한 방식으로, 인위적인 기억처럼, 또 그러면서도 방어벽처럼. 사실 나는 냉소주의자로 치부되는 게 싫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지금 수용소를 떠올리면 격렬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짧았지만 비극적이었던 포로 생활의 경험이 길고 복잡한 증언 작가로서의 경험과 합산되어, 그 결과는 분명 긍정적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나의 과거는 나를 더욱 풍요롭고 자신감 넘치게 해주었다. 새파랗게 젊은 시절 라벤스부르크 여자 수용소에 끌려갔던 내 친구는 수용소가 자신의 대학이었다고 말한다. 나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그런 사건을 경험하고 글을 쓰고 관조하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결과를 얻은 운 좋은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둘러 밝혀야겠다. 예를 들어 수용소에 끌려간 이탈리아인들 중 귀향한 사람은 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그 5퍼센트 중 대부분이 가족과 친구와 재산, 건강, 균형감각, 젊음을 모두 잃었다. 내가 살아남아 무사히 돌아온 건 대부분 운이 좋아서였던 것 같다. 수용소로 들어가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것, 그러니까 등산으로 체력이 단련되어 있었다거나 화학자였다는 것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화학자라는 직업 덕분에 마지막 몇 달 동안 약간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보다는 지칠 줄 몰랐던 인간에 대한 관심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만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흑과도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306-307

철학자 강신주 선생은 국어교사에게 당부했다. 우리 아이들이 시를 한 편씩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수업을 해달라고. 물론 아이들이 시를 배우는 시간을 즐거워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게 시는 어렵기 때문이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건져올릴 때의 치열한 고민을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아이들이 간직한 시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일 수 있도록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 내 자신이 인간일 수 있을 때 내 옆의 존재를 인간으로 바라보고 존중할 수 있다. 이렇게 시 한 편 가슴에 담고 있는 아이는 사람을 해칠 수 없다고 강신주 선생은 강조하셨다.

우선 나부터 시 한 편 가슴에 담아야겠다. 그리고 그 시를 아이들에게 나눠주어야겠다. 시가 입시를 위한 도구가 아님을, 불안과 공포가 우리를 잠식해가고 있는 세상에서 인간을 되살려낼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런 아이들은 불안과 공포가 우리가 사는 공간을 또다시 아우슈비츠수용소로 만들지라도 그 속에 침몰되지 않고 그 시대를 사유하고 증언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것이 프리모 레비의 노력을, 죽음을 헛되지 않게 만드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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