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무한독전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 얌송(수유너머R)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찰스 유/ 조호근 옮김 / 시공사
원서 : How to Live Safely in a Science Fictional Universe

주인공 : 찰스 유
거주지 : 31번 우주, 뉴 엔젤리스/로스트 도쿄-2 (속칭 루프 시티) 그렇지만 벌써 10년 째 TM-31 타임머신에 머무르며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다.
직업 : 타임머신 수리
최근 마지막으로 한 일 : 미래의 자신을 총으로 쏘았다.

“SF공간 안에서, 기억과 후회는 하나로 모였을 때 타임머신을 만들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한다. 타임머신을 만드는 일에는 다음 이상의 재료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1) 기록장치 아래에서 앞뒤 양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종이 (2) 설명과 과거 시제의 직접 적용이라는 기본 동작이 가능한 기록장치.” (59)

여기는 SF공간이 아니다.
음…….
아마도 아니다.
따라서 기억과 후회가 모여도 타임머신은 만들어 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소한 사실을 빼면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기억도 있고, 후회도 있다. 집에 굴러다니는 펜, 쓰다만 노트면 기록 장치로 충분하다. 그러니 이곳을 SF공간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시간문법학적 공리에 따라 이미 타임머신을 소유하고 있다. 이 타임머신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 “만약에-”로 시작하는 가정법의 시공간으로 소유주를 데려다준다. 내가 그러지 않았었던, 그래야만 했었던, 그럴지도 몰랐던, 그럴 수도 있었던, 그랬었던, 그런, 그럴 수도 있는 온갖 종류의 시공간에 머무를 수 있다

“타임머신에 들어가는 일반적인 고객은 말 그대로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통 처음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예상해보라. 아니, 예상할 필요도 없다.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테니까. 바로 그의 삶에서 가장 불행했던 순간이다.” (76)

어디로 갈까.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랬었더라면―이런 순간들이 너무 많이 때문에 대체 어느 지점에서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소박하게 더듬어보면 대략 삼주 전이다. 돈은 없지만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지나가는 길에 있던 옷가게 들렀는데 너무 마음에 드는 흰색 비키니를 발견했다. 비키니를 들고 살까말까 안절부절 가게 안을 뱅글뱅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이번 달은 지출이 많으니 고작 이틀 뒤인 6월이 되면 사겠다고 결심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냥 그 때 살 걸 그랬다. 이건 타임머신씩이나 타기엔 너무 작인 일인가? 수강신청 전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과감히 지금껏 들은 전공과목들을 버린 셈 치고 복수전공을 포기할 것이다. 복수전공 덕분에 지금 나는 대학생활의 흑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예 복수전공 신청 자체를 하지 않겠지.
입학한지 4년 쯤 된 것 같다. 아직까지 수능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른 중반이 되었는데도 그 때 재수를 했어야 했다고 미련을 가지는 사람도 보았다. 입을 열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된다. “그 때 내가”, “만약에 내가…….” 남들이 무척이나 선망하는 S대 법학과에 다니는 OO양은 사람들이 자신을 만나면 왜 그렇게 자신들이 S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변명을 늘어놓는지, 그리고 그 이유들은 어찌나 모르겠다고 했다. 변곡점이라 부를 수 있는 순간들이 있겠지만 많은 경우 인생의 불행이 어떤 사건 하나로 시작 되었고, 그 순간으로 돌아가 조금이라도 방향을 다른 쪽으로 튼다면 지금은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변명거리로 삼는 것이 그렇게 되었어야만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위안이 되었던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당신은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나쁜 소식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하든, 당신은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듣지 않는다. 그들을 나무랄 생각은 없다.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 어차피 내가 여기서 일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인간의 본성 덕분이다. (32)

사실 나는 지난 기억에―좋았던 추억도, 후회도―큰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가정법과 시제변환을 썩 좋아하지 않고, 자의식 때문에 뻔뻔하게 잊어버리는 쪽을 택한다. 어째서 “만약에”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는지 생각해 봤는데, 어린 시절에 이미 질려버린 것 같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몰라서 순진하게, 알면서도 잔인하게 우리 둘 다 알고 있지만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들로 엄마에게 상처를 줬다. 싸움의 패턴은 대체로 반복된다. 비슷하게 시작하고, 비슷하게 전개되며, 비슷하게 끝난다. 그러다 가끔 둘 중 하나가 그런 반복을 끊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만드는 말을 내뱉는다. 어느 날인가 엄마는 바락바락 대드는 내게 “네가 아빠가 없으니까 무서운 사람이 없어서 나(엄마)를 우습게 알고 대든다”고 말했다. 아빠는 없고,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해도 불가능한 가정에서 출발하여 도달한 결론에서 의미를 생각해보자. “아빠가 있었으면”으로 시작하는 가정법의 세계에 존재하는 그렇지만 존재하지 않는 모녀가 있다. 그런데 그들을 나와 엄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게 나라면 어느 시공간에 있건 간에 그 상황에서 똑같이 대들고 있을 것이다.(자랑은 아니지만.)

“그럼 이건 뭐죠? 환상인가요? 꿈인가요?”
“창문 쪽에 가깝죠”
“당신은 지금 거짓된 과거, 자기 자신이 가고 싶은 과거를 보기 위해 시간과 공간과 빛을 왜곡하고 있는 겁니다. 이 구멍을 통해서 그쪽 우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볼 수는 있지만, 실제로 할머님 옆에 서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의 우주 우리 우주 안에 있는 겁니다. 실제로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는 거예요.”(74)

그러면 SF의 세계에서 타임머신 수리공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런 형태의 무능력한 타임머신이 어떻게 고장이 날 수 있을까.

“나는 자살을 막아보기도 했다. 사람들이 헤어지는 것, 결혼이 천천히 와해되는 것을 보고 또 보았다. 잘못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겪어보았고, 현대 시간 여행 기술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다양하고 괴상한 문제들을 보아왔다. 이 직업에 오래 종사하다 보면 그 실체를 알게 된다. 이 일은 자의식을 다루는 일이다. 나는 자의식 산업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다.” (77)

SF의 세계에서 안전하게 사는 방법이란 이런 모든 상황을 피해 어떤 시공간 속에 속하지 않고, 즉 자신의 사건과 마주치지 않고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어떤 시간축에도 얽매이지 않고, 특별한 길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이 있어야할 장소를 벗어난다. 『SF』의 찰스 유가 타임머신 수리공으로 10년간 31번 우주가 아니라 TM-31 타임머신에 머물러 있고, 그의 어머니가 1시간짜리 가상의 행복한 기억을 반복 재생시켜 주는 타임 루프 안에 10년간 머물러 있는 홀로그램 아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것처럼.

내 생각에 현재는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 시간 속의 삶은 일종의 거짓이다. 내가 거기서 벗어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존재란 한쪽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다른 쪽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비해 특별히 더 많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인생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달력의 순서대로 살아가는 삶은 규제된 삶일 뿐이다. (…)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꾸준히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면서, 언제나 과거만을 돌이켜보고 있다.(44)

나는 헷갈리곤 한다. 어떤 것을 현재라 불러야 할까. 내가 놓여 있는 시간축과 중요한 사건들, SF 공간과 같은 일종의 가상적 전제와 삶에 대한 집착 계수. 조금도 성장하지 못하고 특정한 실수의 연쇄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 결국 ‘현실’은 곧 졸업이니 더 이상 엄마한테 빌붙지 않고 내 손으로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확실하게 적어도 나는 찰스 유처럼 미래의 자신을 총으로 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과거의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는 타임 루프에 갇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 부록 : 자신이 타임 루프에 갇혔다는 것을 알아챘을 경우 해야 할 일 (p141)
1) 타임 루프를 구성하는 연속된 사건들을 파악할 수 있는지 확인하라.
2) 타임 루프에 갇히게 된 것은 전반적으로 당신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3) 어떤 이유가 있었든, 어떤 생각을 했든 간에, 당신 자신과 직접 접촉한 사람은 바로 당신 본인이다.
4) 현재 본인이 있는 우주에 머물고 싶다면, 자신의 과거를 바꿔서 다른 평행 우주로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이 원래 했던 행동을 완전히 재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5) 연속된 사건들을 확인한 다음에는, 그런 식으로 사건이 발생하는 이유를 파악할 수 있는지 확인하라.
6) 그 타임 루프 안에서 자신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지 확인하라.
7) 대부분의 경우,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지겨워서 도망치고 싶어질 때까지 계속 같은 곳을 돌기만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일어버리고, 이 우주를 벗어나 다른 우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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