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고향, 그리고 장소

- 이계삼

고향으로 내려온 지 10년이 되어 간다. 이제 촌놈이 다 된 것이다. 가끔 서울에 볼 일이 있어 다니러 갈 때마다, 내가 이런 곳에서 어떻게 10년이나 살았나 싶어진다. 서울역 대합실에만도 1~2만명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데, 그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마음에 남는다. 한껏 성장(盛裝)을 하고 오가는 아리따운 여인들, 줄 세운 전투복에 반딱반딱 광을 내고는 겅중겅중 걷는 이등병, 신문을 말아쥐고 카트를 밀고 가는 중년, 이 많은 인간들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남’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밀려오는 외로움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집과 학교를 오고가는 20여분 동안에 늘 꼭 몇사람씩 아는 이를 만난다. 여든이 넘어서도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오가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분을 뵐 때가 있다. 인사를 올려도 그 분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 분께 남아 있는 쓸쓸한 병마의 시간을 생각하며 잠시나마 마음을 여민다.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알바하는 졸업생 아이를 서점에서 만나기도 한다. 클락션 소리가 귓전을 때리기에 쳐다보니 차안에서 씨익 웃으며 손을 쳐드는 우리 ‘너른마당’ 조합원이 있다. 이 작은 도시의 거리에서 부딪치게 되는 그 누구라도 ‘남’ 같지가 않다. 실제로 한 두 다리만 건너도 이런저런 연줄로 엮어지는, 그들은 정말로 남이 아니다.

밀양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줄기가 있고, 그 강 건너편, 500년 세월을 한 자리에 서 있는 밀양의 랜드마크 영남루가 있다. 나는 하루에 두 번, 혹은 네 번 다리를 건너며 그 누각을 바라본다. 푸른 하늘에 잇닿은 처마의 곡선은 내 마음에 옅은 평화을 준다. 내 삶은 영남루를 바라보며 하루하루 풍화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사라져도 영남루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가 나처럼 매일 이 강을 건너며 영남루를 바라볼 것이고, 그렇게 또 하루하루 녹슬어갈 것이다. 나의 생이 누군가의 생으로, 또 다른 시간으로 이어질 것임을 생각하며 나는 마음 설렌다. 내가 조금씩 뿌리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다른 존재로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을, 나는 이 구체적인 장소에서 시시각각 느낀다. 그렇다. 이곳이 사람 사는 곳이다.

고향으로 옮긴 지 10년, 그러나, 이 도시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일에는 기쁨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무수한 일들이 있었다. 대체로 그것은 내가 여러 선배들, 벗들과 함께 ‘지역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도모하면서 생겨난 일들이다. 그것은 <무진기행>의 화자 윤희중이 말하듯, ‘시체가 썩어가는 듯한’ 냄새, 이 도시의 뼛속까지 박힌 속물적 인생관과 극우적 멘털리티를 견디지 못한 극소수 사람들이 자아낸 모기소리 같은 비명일 것이다. 예컨대, 이곳에서 시장(市長)이라는 자는 조선 말기의 고을 원님들이 누렸던 막장 관료의 위세를 거의 그대로 물려받았다. 공무원이라는 자들 또한 그 시절 아전들이 누렸던 권세를 물려받았다. 4년전이었을 것이다. 지역의 장애인 동지들이 시청 앞에서 처절하게 싸웠던 적이 있다. 그때, 40일 넘게 이어진 이 지역에서는 전무후무한 점거농성의 첫날 싸움판에 수십명의 장애인들을 둘러싼 수백명의 공무원들, 그 중에서도 몇은 이렇게 가슴을 치며 고래고래 신세한탄을 터뜨렸다. “병신들한테 욕먹고도 듣고만 있는(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결코 듣고만 있지 않았다), 아이고 내 신세야, 지기미 씨부랄꺼~” 그들의 무참한 얼굴들이 스쳐간다.

얼마 전, 신공항 입지 선정을 둘러싼 똥바람이 극으로 치달을 때, 아닌게아니라 시장이라는 작자는 신공항 유치 반대 유인물을 돌리던 내 고등학교 동기이자 농사꾼인 내 친구에게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면서(녹취록이 남아 있다), 주먹으로 때렸다. 그는 처벌받지 않았고(벌금 얼마로 약식 기소되었단다), 지금껏 내 친구에게도, 시민들에게도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유유히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여기 남은 내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는 한나라당 청년 끄나풀이 되어 수십년전 선배들의 완장을 물려받아 설치는 철딱서니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달리 나는 어디 갈 데가 없다.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살다가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이런저런 매체에 글을 쓰는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서울사람들 들으라고 ‘변방’이라 부르지만, 실은 내가 사는 이곳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내심 철썩 같이 믿고 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여기 살고 있기 때문이고, 그래도 서울보다는 수십배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내 고향이고, 또한 ‘장소’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들 고향이란 게 있어서, 육신의 탯줄을 묻은 고향이건, 정신의 고향이건, 고향이 없으면 사람은 외로워서 살 수가 없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디서 살다가, 어디서 죽을 것인가? 나는 고향이라는 한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권정생 선생님이 당신을 찾아오신 도법 스님과의 대거리 끝에 던진 말씀이다. “다들 고향이 있지 않습니까?―” 고향, 그리고 장소에 대한 나의 화두를 이렇게 던져 본다.

응답 1개

  1. unlimited말하길

    이계삼선생님 글을 여기서 뵙다니! 감동이 더 큽니다. 내가 태어나서 죽을 곳, 고향. 일단 던져주신 화두를 덥석 받아 안겠습니다. 서울은 고향이 될 수 없을것인가, 연구과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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