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생존과 유산

- 윤여일(수유너머R)

1.

위클리 수유너머 편집진은 수유너머R의 작은방에서 편집회의를 합니다.

수개월 내 편집회의 장소가 바뀔 것 같습니다. 수유너머R은 이사 가기로 정했습니다.

도시살이에서 이사가 특별할 것이야 없지만, 연구실에서는 가장 중요한 결정사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어느 정도의 규모에서 어떻게 공간을 배치하고, 어떤 활동으로 채워나갈 것인가. 월세는 어떤 방식으로 마련할 것인가. 어느 마을로 들어가 어떤 생활의 기반을 활용하고 누구와 만나기를 기대하는가. 연구원들이 공부할 수 있는 한적한 공간을 고를 것인가 외부의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접근성이 좋은 장소를 물색할 것인가. 이사를 논의하다보면 어떤 요소들을 고려하고 우선시하는지에 관해 서로가 지닌 생각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그 차이를 생산적으로 조절하려면 수유너머R의 작은 역사를 되돌아보며 미래상을 함께 모색해야 합니다.

2.

운동하는 존재가 과거를 되돌아볼 때 중요한 것은 지난 과거에 관해 성공과 실패의 단일의 서사 같은 것을 쓰는 게 아닐 것입니다. 대신 그 과정을 분석하고 남겨진 흔적들을 살펴보며 운동과 사고의 자원들을 건져내야 할 것입니다. 사건의 과정과 흔적들을 단일서사로 매끄럽게 다듬거나 정돈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다시 통과하는 과정에서 이해의 지평을 재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경험을 섣불리 일반화하지 않되, 동시에 경험의 직접성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공유가능한 형태로 숙성시켜내야 할 것입니다.

3.

수유너머R의 작은 역사에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이하 수유너머)의 지난 역사도 배어 있습니다.

수유너머는 “좋은 앎과 좋은 삶을 일치시킨다”를 모토로 삼았습니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살면서도 도시의 중산층적 삶의 방식에 편입되지 않고 생활의 코뮨을 만들고, 제도권 바깥에서 지식의 향연을 열고자 했습니다. 지식이 향연이 되려면 분과의 벽을 넘고 스승과 제자의 위계관계를 극복하며 강렬한 문제의식을 생산해야 했습니다.

수유너머는 코뮨을 구성하고자 할 때 특정한 이념적 지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외부와의 접속’ ‘경계의 횡단’을 활동의 지향성으로 삼았습니다. 그 지향성이 이름의 절반인 ‘너머’에 담겨있습니다. ‘너머’란 넘어서다의 명사형이죠. 그러나 그저 말에 그친다면, 유행하는 가벼운 말이 될지 모릅니다.

무언가를 넘어선다는 말은 대게 사변적인 넘어섬이며, 넘어선다는 사변 속에서 대상을 추상화하고 단순화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수유너머의 일상 속에서 ‘너머’란 지난한 것이었으며, ‘너머’를 위한 숱한 마찰들이 수유너머의 개성을 발효시켰습니다. 수유너머에게 ‘너머’란 문제의 극복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제기를 뜻했기 때문입니다. 수유너머의 ‘공간’도 고정된 건물이나 구획을 뜻한다기보다, 시간의 축적을 거쳐 이루어지는 활동의 배치이자 문제의 장으로서 동적이며, 개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현장(現場)’이었습니다.

4.

이제 수유너머R은 새로운 현장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수유너머R은 이제 만들어져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며 앞으로의 독자적인 생존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수유너머R의 독자적 생존을 위해서는 수유너머의 유산을 생산적으로 계승하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계승이려면 마이너스의 유산으로부터도 배워야 합니다. 수유너머의 유산을 역사화하려면 수유너머를 실패의 서사로 뭉뚱그려서도 안 되지만, 회고조로 미화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좋은 것만이 유산은 아닙니다. 유산은 역사에 속해있기에 구체적인 한계를 지니며, 뒤에 오는 자가 그 한계에 내재함으로써 지금의 가능성으로 전화시킬 때, 유산은 진정한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수유너머는 문제가 있는 장이었고, 문제를 생산하는 장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해결한 것과 남은 것을 가려내지 못한 채 수유너머의 서사를 뭉뚱그린다면 그 실험과 노력들은 헛되이 흘려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유산에 짓눌려서도 안 되지만, 유산을 헛되이 낭비해서도 안 됩니다.

5.

저는 수유너머에서 함께 읽었던 사상가들의 사상적 생애를 이렇게 이해합니다. 기성의 정신적 체계가 비틀린 자리에서 한 사상, 한 사상가가 출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 사상을 간직한 사상가의 내적 모순이 평정되어 긴장을 잃는 때가 찾아옵니다. 내면의 모순이 사그라들면 사상은 평면화됩니다. 어둠 속에서 토해낸 사상이 빛 아래서 형상을 갖춰가다가 굳어버립니다. 안정이 도래합니다. 이후로는 지속의 나날입니다. 그러면 타락합니다. 남들이 바깥에서 볼 때에는 발전으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생명력을 소진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응고되지 않으려면 내부 모순을 간직하고 버티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운명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는 생명체여야 하고 생명체라면 수명을 갖습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부침이 있고 성장과 노쇠가 있고 에너지로 등장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굳어갑니다. 그러나 그 생명체는 외부와의 만남 속에서 다시 생의 동력을 얻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유너머R은 이사를 가며 다시 한 번 낯선 생존의 환경 속에 놓입니다. 아직 미래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지만, 새로운 환경이 척박하다면 그럴수록 질긴 생명력을 갖고, 생명이 다한다면 그 살아간 과정에서 거둔 성과를 다른 운동과 사고에 생산적 자원으로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이사 얘기로 에둘러 갔습니다. 사실 이번주 특집은 “두리반에서 마리로”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 빠른 뉴스, 아니 한 주 빠른 편집자의 말을 지난주 정수형께서 써주셨습니다. 거기에 보탤 말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신변에 닥친 연구실 이사 일을 매개 삼아 “두리반에서 마리로”를 바짝 끌어와서 그 말을 음미해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리반에서 마리로”는 그저 철거투쟁의 장소가 옮겨졌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에서 –로”란 조건은 다르지만 투쟁이 이어진다는 의미, 나아가 투쟁을 계승한다는 의미일 것이며, 그러려면 두리반에서의 경험은 마리의 투쟁을 위한 유산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리반에서 싸워낸 열정, 동력에서 기술까지 두리반을 둘러싼 연대감마저도 자원으로 마리로 이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가지 운동(혹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고투들이 이후 유산으로 남겨지고, 그 유산들이 다른 운동을 위한 자원으로 전환될 때, 그 개별 운동들은 단편으로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써야 할 역사로 새겨질 것입니다. 어떤 역사가 그 개별 운동들의 생존들에 힘입어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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