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두메 앉은 이방 꼴

- 김융희

지금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에 살지 않았을 때에도, 어려서부터 늘상 산울림인 메아리 소리를 들어왔다. 정적이 흐르는 중첩의 깊은 계곡에서 듣게 되는 메아리는 태고를 떠올리며 이승의 소리가 아닌 신비와 두려움도 느낀다. 나는 높은 산 정상에 오를 때면, 우선 숨도 고르기 전에 그 메아리치는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충동질이 솟구치기도 한다.

그 산울림의 메아리가 반갑지 않는 태풍으로 변해, 금년 들어 첫 손님으로 상륙했다. 미리 떠벌린 메스컴의 호들갑처럼 메아리는 심한 난동을 부리지 않아 다행이다. 다만 나에게 아주 고약한 짖을 벌리고 갔다. 외출중, 집안 보수공사로 사용한 스치로폼 잔해를 온 집안은 물론 울 밖에까지 모두 흩날려 퍼뜨려 놓았다. 비를 맞으며 대충 주워 추수르고 숨을 돌리는 참, 그동안 메아리가 궁금해 TV를 켰더니 먹통이다. 이도 메아리 짖이렸다.

때마침 TV 말이 나왔으니 우리 집 사정을 좀 이야기 해야겠다. 요즘 시청료 인상 문제로 국회에서, 메스컴에서도 떠들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전기 요금에 감춰 걷고 있다는 시청료가 얼마인지는 물론, 그동안 내가 내는 줄도 모르고 지낸 시청료를 알게 되었다. 그럼, 전기를 두 종류로 쓰고 있는 나는 이중의 요금을 내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궁금증을 비롯해, 그동안 난시청으로 겪는 고통을 생각하면 새삼 마음이 편치를 않다. 남들처럼 쉽게 볼 수 없는 난시청지역의 그동안 겪었던 고통에 짜증스러움 말이다.

변방이나 두메에서만 살아온 나는 그동안 이사때면 제일 고역이 티비 설치였었다. 지금은 유선방송에 의존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옥외 안테나는 하나쯤 집안에 갖고 있었다. 그 안테나 설치가 쉽지 안는 꽤 까다로운 일이다. 더구나 손재주가 서툰 나에게는 여간 고역이였다. 겨우 설치를 하고도 늘상 어설프거나 온전치 못해 곤욕이었다. 유선방송의 지덕으로 지금 그런 문제는 없지만, 매월 사용료가 적지 않아 힘겹다. 월 7000원에 부가세를 포함하면 매월 8000천여원을 지불해야 한다.

사용 시청료를 알기 전에는 방송사를 전혀 원망치 않았다. 특히 내가 주로 보는 KBS는 광고 수익도 없이 계속 좋은 프로그램을 방송해 주어 고맙게 생각해 왔다. KBS가 우리의 수신료를 받아서 운영을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사용료란 사용에 대한 그 대가이다. 사용료를 받는다면 불편없이 사용케하고 사용료를 받아야하지 않는가! 또한 그 사용료는 누구나 공평한 사용료여야 한다. 그런데 난청지역은 전혀 이외의 중계료를 지불하면서 시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비싼 중계로를 내면서 말이다.

나는 비싼 중계료를 지불하면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쉬이 납득할 수 없는 속 상한 일이지만, 더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왜 프로그램의 질이나 공정성에 대해서는 그토록 온통 모두들 열을 올려 관심을 보이면서, 시청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보다 절실한 난시청 지역의 근본 문제에는 전혀 일언반구의 관심도 없는 현실이다. 여러 유관처나 메스컴, 그리고 일반의 어느 곳,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발상이나 의식이 전혀 없다.

그동안 몇 십 년을 TV를 시청키 위해 인상코자 한 요금액 1000원의 8배를 매월 지불하면서 지낸 난시청지역의 시청자들이다. 세상 힘있는 유리한 자들의, 별 볼 일 없는 이웃에 대한 의식과 관심을 기대함이 무리인가! 어찌보면 난시청 지역에선 호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무슨 보도의 공정성이니 정치적 편파성은 열을 올려 거론하면서, 보다 이전의 원초적 문제에 대한 배려는 그 어데도 감감이다.

특별 지역에 대한 난시청 해결의 소식을 메스컴의 보도를 통해서 언젠가 듣는 기억은 있다. 한정된 특정 지역의 선심을 쓰기 위한 시정이나 정치적 배려로 이용할 때면 있는 일이다. 그 때의 공덕 제공자의 배려는 유난스레 요란스럽다. 그 선심을 좀더 확대하여 더 많은 배려는 왜 안되는 것일까. 물론 실리가 없어 안중에 없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부담할 것은 모두 감당하면서 엄청난 차별을 받고 있는 변방이나 두뫼의 별 볼일 없는 우리는 분하고 서글프다.

태풍의 위력은 강하나 산울림은 없었다. 태풍 메아리를 이야기 하다보니 요즘 시청료 인상문제로 여야의 심한 기싸움을 보면서 메아리태풍의 메아리를 대신해 난시청문제로 비약했다. 난시청으로 불편한 나의 입장이라면 올리겠다는 천원보다 더 올려서라도 이번 기회에 난시청지역이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너무 간절한 마음으로 대세에는 안중에 없이 내 불편만 지나치게 내세운 것 같아 또 민망하다.

매사에 대세를 외면한 채 비록 사소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문제를 꺼내어 문제삼는 내가, 생각하면 때로는 못마땅하다. 이런 일들로 남들에게서도 가끔 지적을 받고 불평도 듣는다.

그래서 가능한 대세를 따르려고 내심 노력한다. 더구나 나이들면서는 더욱 절감한다. 양극 사이에 내가 때론 비참할 때도 있었다. 우리 속담 “두메 앉은 이방이 조정일 알듯”을 자경용으로 마련하여 늘 떠올리고 있다. 현장과는 전혀 무관하거나 뚝 떨어져 있으면서 현장 일에 밝은 듯이 말하는 비웃는 말로 인용되는 그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닐까 싶어서이다.

태풍 메아리가 상륙하여 전국을 통과한다는데, TV가 감감이다. TV는 유선에 의지해 보지만 라디오는 전혀 수신이 안된다. 태풍 동태며 모든 뉴우스가 먹통이다. 요즘은 TV나 래디오등을 대신한 인터넷이 있고, 모바일을 이용한다지만, 아날로그세대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두뫼 산촌에서의 노독거는 여러 어렵고 불편한 일이 많다. 태풍이 지나면서 메아리 대신 나무 흔드는 소리만이 요란한 채, 먹통 티비앞에 앉아 있으려니 난시청에 대한 불만에 속이 부글거린다. 분통의 소회가 또 지나쳤나 싶다. 아무래도 나는 두뫼의 이방 꼴을 못 면한다.

응답 1개

  1. cman말하길

    어디 선생님의 경우 뿐이겠습니까? 나라는 마땅히 약하고 힘 없는 이들의 형편을 살펴보아야 하고, 모름지기 권세 있는 이들이 기본과 약속을 먼저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앞서야 함에도 별 수 없는 사정이 너무 많고 예외가 흔하다보니 공영 텔레비젼의 수신료가 십수년째 논란거리가 되어 오고 있는 것을 볼 때 성적으로 보면 등외요 괄악인데도 뭐 그리 미련이 남는지 붙잡고 있는 꼬락서니가 안타깝습니다. 잡을려면 깔끔하게 정리를 하던지, 내 그릇이 아니면 놓으면 될 것을 연연해 하는 것이 추해 보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