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연예인과 정치인: 수많은 ‘김여진’들을 위한 예술정치학적 성찰

- 이진경

잘 알려진 것처럼 팝아트는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것과 상품으로 만들어진 것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교회의 벽에 그려진 벽화나 건물의 벽에 그려진 광고판의 그림 사이, 박물관의 아케이드와 백화점의 아케이드 사이에서 사람들이 발견하던 차이를 그들은 모두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예술품과 생산물의 분할을 넘어 양자가 하나된 새로운 합일의 세계를 ‘발견‘했던 셈이다. 이전의 합일이 생산물이 곧 작품이고 예술이던 장인적인 생산의 시절에 속한다면, 지금은 예술품마저 상품으로 생산되는 상업화된 예술의 시절이 된 것이다.

팝아트의 ‘스타’ 앤디 워홀의 작품은 표현의 형식에서나 내용의 형식에서나 모두 반복을 기본적인 모티브로 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판화라는 복제적 표현형식을 이용한 것이나, 마를린 먼로나 브릴로 박스, 캠벨 수프 등을 상하좌우로 병치하는 방식으로 내용물을 반복한 것은, 상품이 대량생산의 형식으로 반복되는 세계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는 그러한 반복에 탁월한 색감으로 차이를 새겨 넣는다. 상품세계의 반복에서마저 차이는 존재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을까?
그런데 그는 마를린 먼로 같은 연예인과 더불어 마오 쩌뚱 같은 정치인의 이미지 또한 반복하여 사용한다. 여기서 반복은 상품의 반복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것 같다. 누가 ‘스타’인가? 혹은 누가 ‘스타’가 되는가? 미인? 연기를 잘 하는 사람? 말을 잘 하는 사람? 그렇지 않다. TV 같은 대중매체에 반복하여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 스타고, 그런 사람이 스타가 된다. 연예인이 스타의 주된 표상을 형성하는 것은, 그들이 가장 빈번하게 대중매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운동선수나 아나운서 등도 스타의 중요한 계열을 형성한다. 정치인 또한 그렇다. 이점에서 연예인과 정치인은, 마를린 먼로와 마오쩌뚱은 생각보다 매우 가까이 있다.

워홀이 반복을 통해 형성되는 이런 인접성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연예인과 정치인의 인접성은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된 80년대 이후에는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레이건이나 슈워제네거, 혹은 이주일, 이순재, 정동영 등 수많은 연예인이 정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대로 정치인들은 매체에 등장할 기회를 얻기 위해 연예인처럼 쇼를 한다. 이명박이 자주 하는 짓이지만, 툭하면 시장이나 재난현장에 찾아가는 것이 사진을 찍기 위한 것임은 이젠 다들 잘 아는 바다. 심지어 오세훈이나 김문수처럼 그들은 ‘노이즈 마케팅’을 하기도 한다. 그들로선 좋은 이유로든 나쁜 이유로든 이름이 매체에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면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잊은 채 그의 이름만 기억하기 때문이다(인터넷이 기억장치 역할을 하는 지금은 꼭 그렇지 않은데, 그들은 아직 이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인접성 속에서도 정치인과 연예인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첫째, 정치인은 연예인처럼 되기 위해 악평조차 기회로 여기며 과감하게 행동하고 때로는 추할 정도로 과감한데 반해, 연예인들은 정치적 발언에 매우 조심스럽고 지나칠 정도로 소심하다는 게 그것이다. 그 차이는 무엇보다 양자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차이에 기인한 것일 게다. 정치인은 집단적으로 조직된 권력망을 갖고 있어서 하고 싶은 대로 마구 행동하지만, 연예인들은 방송국이나 대중매체의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면 스타의 조건, 즉 반복적인 출연의 기회를 상실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을 할 때는, 권력자들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통상적이다. 반대로 권력자에 반하는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연예인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짤리거나 출연정지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김미화의 경우는 아주 잘 알려진 사례다.

둘째, 특히 현정부 들어 더 그렇지만, 정치인들은 사적으로 행한 행동들이, 불법적인 것이거나 비리가 있어도 그저 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눈감아주고, 공적인 것만 눈에 보이게 만든 자리에 들어서 있는 반면, 연예인들은 연애나 결혼/이혼, 혹은 학력이나 이력에서 의복에 이르기까지 사적인 모든 것이 드러나고 기이할 정도로 일방적인 기준에 의해 문제시되지만, 사회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 등 ‘공적인’ 것에 관한 언행은 최대한 보이지 않게 되는 자리에 들어서 있다. 그래서 종종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선, 어떤 경우에는 “네가 뭘 알아서 그런 말을 하니?”라는 식으로, 어떤 경우에는 “연예인은 그런 것에 대해 말하거나 하면 안돼. 그저 엔터테이너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면 돼”라는 식으로 무시하거나 비난한다.

김여진 씨에 대해 지금 보수 언론이나 방송국, 혹은 보수 정치인들이 하는 말들은 바로 이런 이중의 이유를 갖는 것 같다. 한편에서 그들은 연예인이 저렇게 과감하게 말하고 용기있게 행동하는 것에 당혹하고 놀란다. ‘대체 뭘 믿고 저러나?’ 싶은 것일 게다. 다른 한편에서 그들은 그의 언행이 연예인으로서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을 벗어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관해 말하고 행동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네가 뭘 안다고…” 하는 생각이 반, “너는 엔터테인먼트나 해”라는 생각이 반일 것이다.

그런 행동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인기를 얻기 위해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인 듯하다. 주연 아닌 조연이라고 조롱하며, “연예가 뉴스에 나올 일 없으니 9시 뉴스에 나오려고 저런다”는 식의 비난이 딱 그런 것이다. 이런 식의 여러 종류의 유치한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아니 더욱더 열심히 밀고나감으로써 김여진은 이런 어리석은 생각들을 와해시킨다. 무시하는 방법이 통하지 않는 조건에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언제나 하던 것처럼, 권력을 이용한 적대적 공격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엔터테인먼트에서 벗어나 사회적 문제에 참여하는 연예인(이른바 ‘소셜테이너’)의 방송출연을 금지하는, 전세계가 놀랄 기가 막힌 규칙을 만들어냈다. 개그프로에서나 나올 반어적인 사건을 우리는 다시 현실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비겁함의 정치학, 혹은 유치함의 정치학이란 관점에서 한국 정치의 역사를 쓰게 된다면, 아마도 이것이 그 역사의 정점을 차지할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확신한다.

연예인이 정치가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 시대에, 연예인의 정치적 행동을 가로 막는 저 이중의 장벽은 아마 어느 나라에나 정도를 달리하며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양상은 나라마다 아주 다를 것이다. 가령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한창 광기의 극에 달했을 때, 헐리우드 연예인들 가운데 빨갱이들을 색출하려는 시도를 했고, 채플린 같은 탁월한 사람조차 추방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을 보면, 미국 연예인은 이미 그때부터 충분히 정치적이었음이 틀림없다. 하긴 그걸 생각하면, 한국의 언론인과 방송인들에게, 연예인들의 손발을 묶어두려는 최근 한국의 시도들이 갖는 이 놀라운 창조성을 전세계에 알리고, 미국 역사의 중심부와 직접 이어지는 역사적 전통 속에 확고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게 어떨지 권하고 싶다.

내규인지 뭔지, 일반화된 규칙이 만들어진 것을 보면, 확실 지금 ‘김여진’이란 이름은 단지 한 사람의 연예인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턱도 없는 억압과 비난, 권력 앞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지 않았던 수많은 연예인들의 공동의 이름이다. 수많은 보호막으로 가려도 냄새나는 비리를 감추지 못하고, 수많은 돈과 인력이 옆에 있어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 정치인들과 비교하자면, 그들과 상반되는 열악하고 어려운 조건에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용기있게 행동하는 이 연예인들이야말로 그들보다 몇 십 배 탁월한 정치인이라고 해야 한다. 연예인이 정치인이 되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정치인들이 하는 정치보다는, 이들에게 정치적인 자리가 주어질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정치가 훨씬 더 나을 것이란 점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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