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나의 ‘애착’이 너의 ‘애착’과 만날 수 있을까? -6.11탈원전 데모, 공통의 언어를 찾아서-

- 신지영

# time1: 6.11 & 6.10

6월 11일은 지진, 츠나미,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3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신주쿠에서 대규모 집회가 기획되었고 일본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데모가 일어났다. 이날은 탈원전을 위한 세계동시행동의 날이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아메리카, 캐나다, 한국, 홍콩, 타이완에서도 집회가 있었다. 도쿄만 해도 10군데에서 일어났으니 규모도 규모지만 각지가 링크되어 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신주쿠 집회의 요구사항은 가동중인 원전폐지, 정기검사 등으로 멈춰있는 원전을 재가동하지 말 것, 원전 증설 중지, 아동의 허용피폭량(년간20msv/h) 완전철회, 원자력 발전에서 자연 에너지 발전으로 정책을 전환할 것이었다. 3시에 출발한 데모 행렬은 6시 신주쿠의 아루타앞 광장에 모였다. (영상http://www.youtube.com/watch?v=lqKaC23g2b0&feature=player_embedded#at=663/ 영어영상http://www.youtube.com/watch?v=nDwl_Nla4Kk&feature=player_embedded)“내가 바로 에너지다”라고 외치며 모두가 함께 점프해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집회는 끝났지만, 아루타 앞의 음악과 춤과 외침은 오래 계속되었다. 이시하라(石原) 자민당 간사장은 14일 기자회견에서 대규모 집회를 “집단 히스테리”라고 말했지만, <가난뱅이들의 반란>의 마츠모토씨는 이시하라를 비판하면서 “이제 겨우 제 정신이 든 것”이며 “서서히 바람구멍을 열어가고 있다(松本哉「オピニオン」朝日新聞 2011年6月16日)”고 말했다.

세계 각지에서 6만 7천명 정도가 모였다고 추산되는 6.11을 하나의 목소리로 정리할 수는 없다. 다만 몇가지 공통점은 있다. 나는 쿠니타치 집회에 참여한 뒤 신주쿠로 합류했는데 개인 참여자들이 자발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여성과 아이들의 참여 비율이 매우 높음을 느꼈다. 다양한 퍼포먼스가 펼쳐져 표현의 밀도가 강해져 있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지만, 나이드신 분들이나 처음 참여하는 분들이 쉽게 끼어들지 못할까 싶어 다소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날 집회의 원동력은 일본의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해선 안된다는 절박함이었다. 일본의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생각할 때, 나는 결혼해서 낳을 아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6.11 탈원전집회에 참여하는 내 속에는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6월 11일은 6월 10일 다음날이다. 1926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장례식을 계기로 일제에 저항해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이자, 1987년 전두환 정권에 저항해서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던 날. 이날 한국에서도 탈원전 집회가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크게 6.10 24주년을 기념한 반값 등록금 대규모 촛불집회가 있었다. 최근에는 연예인, 학자, 등도 참여하면서 미래를 짊어질 다음 세대에 대한 응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6.10과 6.11. 미래를 위한 이 두 공간의 집회 속에서 나는 내 몸이 사안의 절박성과는 관계없이 6.11보다 6.10과 더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6.11 집회 등 최근의 활동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내가 감성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몇 가지 벽을 느끼고 있음을 비로소 알아챘다. 후쿠시마에 지역에서 있었던 무신전쟁 때부터의 오래된 갈등도, 도호쿠 지방에 속속들이 배어있는 독특한 언어와 역사와 풍경과 감성도, 일본 집회의 구호들도, 깊이 알려고 하면 할수록 어딘지 모르게 이물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물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내 안에 있는 익숙한 것들 또한 얼마나 단단한 벽처럼 돌출되는지….. 나는 그 익숙한 것들을 또한 마치 생전 처음 본다는 듯이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묻게 된다. 외부의 벽을 느끼는 내 내부의 벽이, 오히려 우리들 사이의 그러한 벽들을 넘어서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 스스로 태어나고 자란 동네와 모국어에 대한 애착이, 다른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의 동네와 모국어에 대한 애착과 만나 이물감을 느낄 때, 그 이물감이 오히려 서로를 만나게 하는 보편적 지반이 될 수 있을까?

* time2: 6.11 in 国立

쓰나미와 지진의 피해를 입은 토호쿠 지방의 사람들과 후쿠시마의 원전 근처의 사람들이, 아마도 스스로에게 무수히 던졌을 질문, 그리고 수많은 이주자들이 던졌을 질문, “일본에서 대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3.11 쓰나미, 지진, 원전사고 속에서 나도 던지게 된다. 우리는 6.11이라는 같은 시공간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자라난 문화가 다르고 따라서 같은 상황을 다르게 경험한다. 그러나 그 감정을 나눌 단어를 아직 발명하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아직 그것을 생소한 질문으로만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비단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쿄 신주쿠의 집회는 이날 각지 세계 각국의 시간과, 그리고 직접적으로 후쿠시마나 토호쿠 지방과 어디까지 링크될 수 있을까?

6월 11일 낮, 나는 타마에 있었다. 신주쿠 집회와 별도로 타마 지역에 사는 시민들의 모임과 히토츠바시 대학의 우카이 사토시씨가 중심이 되어서 6.11 행동을 준비해 왔고 나도 그 모임에 참여해왔다. 시민들 쪽에서는 <원전 어쩌나! 타마워크 in 쿠니타치(原発どうする!たまウォークn国立)>라는 이름 하에 쿠니타치 일대를 걷는 기획을 했다. 우에마츠씨를 비롯해서 이 모임을 주도했던 분들은 일부러 ‘탈원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지 않았다고 했다. 집회에 참여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치라시의 핵심문구는 “전전긍긍”이었다. “후쿠시마 사고에 화난 사람, 고통스러운 사람, 슬픈 사람, 후쿠시마의 미래가 걱정인 사람, 자신의 미래가 걱정인 사람, 소중한 사람의 미래가 걱정인 사람, 속았다고 느끼는 사람, 막연한 불안을 품고 있는 사람, 의견 대립이 무서운 사람, 논의할 기회가 없는 사람, 계속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모여 걸으면서 외친다. 느낌을 표현한다. 생각한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한다. 중얼거린다. 메일을 보낸다” 한편 히토츠바시에서는 <이야기하자, 재해와 원전사고 teach-in@히토츠바시대학(語り合おう災害と原発事故、ティーチイン@一橋大学)>을 우카이 사토시와 언어사회학과 선생님 및 대학원생이 중심이 되어 열었다. 티치인은 베트남 전쟁 반대를 외치기 위해 콜럼비아 대학에서 시작된 것으로 대학이 일반인들에게 장소를 개방하고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날 쿠니타치 워크와 티치인에 참여한 인원은 애초 예상했던 200명을 훌쩍 넘어 700명이 모였다. 참여자 중 여성이 아이들이 남성의 2배를 훌쩍 넘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데모대의 소리 자체가 틀렸다. 부드럽고 정답고 온화했고 강했다. 티치인에서는 히토츠바시 대학 내의 방사선량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히토츠바시는 주말이면 주민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오거나 노인분들이 그림을 그리러 오는 등 쿠니타치의 공원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쿠니타치 지구에 재난이 생겼을 때 주민들의 일시적인 피난지구이기도 하다. 시민활동가인 한 분은 자신이 우울증을 앓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불안을 말하지 않으면 그것이 쌓여 결국 우울증과 자살로 이어진다고 말하면서, 지금은 불안과 공포를 표현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활동가는 이미 후쿠시마에서 내부피폭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하루 빨리 어린아이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주쿠 데모에 대해서는 집회에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을 흡입하기 어려웠던 측면들도 있었고 좌파와 우파의 충돌도 있었다고 들었다. 한편 쿠니타치에서의 활동은 대학과 시민이 연대하면서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린 활동을 전개했고, 여성과 아이들, 노인들, 처음 참여해보는 분들이 손쉽게 참여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1)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입간판에 그림과 글자를 그리면서 대학 시절 걸개 동아리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커다란 그림을 함께 그린다는 뿌듯함, 누군가 내가 그린 위에 덧칠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덧칠을 해서 완성되는 과정,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과 나누어 먹는 음식 등. 히토츠바시 대학은 이런 활동에 친절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 배포한 찌라시를 회수한다든지 정치적인 행위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이 활동을 통해서 우리들은 조금씩 변화했다고 믿는다. 또한 걸개 동아리에서 맛보았던 ‘연대의 쾌락’이 어쩐지 쭈뼛거리고 있는 나를 이번 활동에 심정적으로 조금 더 깊게 들어가게 해주었다고 믿는다.

* time3: 6.12 in 잡담토크 다카에 (ゆんたく高江)

6.11일 다음날인 12일에는 오키나와의 다카에(高江)에 헬리콥터 정차장이 설치되는 것을 반대하는 미니 콘서트&토크가 있었다. 다카에는 얀바루(やんばる,山原)라고 부르는 오키나와 본토 북부의 풍부한 숲에 있는 촌락의 이름이다. 일본 전 면적의 0.1% 밖에 안 되는 곳이지만, 이곳에는 많은 희귀종을 비롯 일본 전체 고등식물의 27%가 자생하고 있다. 다카에는 정글 훈련을 목적으로 지어진 미군 북부의 훈련장(7.800헥타르)과 접하고 있다. 다카에가 속해있는 히가시 마을에는 현재에도 15개의 헬기 정차장이 있어서 사람들은 폭음과 추락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다카에 주민들은 2006년 2월 23일에 헬기 정차장 건설에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그럼에도 2007년 3월 다카에 주민들은 자신들의 땅에 헬기 정차장 6개가 새로 건설된다는 것을 신문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고 2007년 7월부터 막무가내로 공사가 실시되었다고 한다. 2008년 2월에는 2만 2000통의 반대서명을 모아서 국회에 제출했으며 현재 다카에 주민들과 활동가들이 다카에에 살면서 농성중이다.

이날 이야기를 해준 <다카에 주민회의>분은 누구든지 자신이 내밀 수 있는 만큼의 손을 내밀어 주면 그것이 연결되어 가는 것이다. 어떤 활동이건 ‘손님은 없다 모두가 주인이다’라고 말했다. 전쟁을 막고 오키나와의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 다카에에 꼭 놀러 오라고 말했다. 3.11의 원전사고와 재해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문화적 경험과 언어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손님은 없다 모두가 주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길을 발명해 낼 때이지 않을까 싶다.

* time4: 4.12 in 김시종(金時鐘) &3.19 in 우카지 시즈에(宇梶静江)

6.11의 티치인을 이끈 사람 중 한명이 우카이 사토시씨는 대학원 수업 시간에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은 수많은 피해와 가해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할 언어를 발명하지 못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진정으로 모색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3.11 재해와 원전사고를 표현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고. 그런 뒤 그는 두 개의 글을 소개했다. 하나는 김시종 시인이 4월 12일에 쓴 「봄이 되면(春ともなれば)」<東京新聞>이었다. “기억에 스며든 언어가 없는 한 기억은 단지 흔적에 불과하다” 우카이씨는 김시종이 지적하듯이 조선의 시인들이 식민지의 피해를 넘어서 봄을 다양한 방식으로 노래했던 데 비해, 일본은 피해와 가해를 표현할 언어를 역사 속에서 만들어내지 못한 결과, 시어가 하이쿠 등의 단가적 서정으로 후퇴해 버렸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3.11재해와 원전사고라는 현재의 상황에 응답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할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도쿄에 이주해 온 아이누들과 모임을 꾸리면서 “도쿄의 아이누”로서 살아갈 것을 선언한 78세 우카지 시즈에(宇梶静江) 씨가 3월 19일에 쓴 「대지여(大地よ)」라는 시를 낭독한다. “무거웠는가/아팠는가/너를 더욱 깊이 느끼고 공경하여/그 무거움과 고통을 느꼈어야 했던/가졌어야 했던/ 많은 백성이/너의 무거움과 고통과 함께/파도에 사라지고 대지로 돌아갔다/그 고통을 지금/우리 남겨진 백성이/명확히 느끼고/경외의 마음으로/손을/마주한다” 우카이씨는 이 시에 자연과 일체화된 삶을 살았던 아이누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하면서 일본의 문화가 아이누의 전통과 문화를 배제했던 것이 3.11의 재해와 원전사고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묻고 이러한 상황을 표현할 일본의 시어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김시종과 아이누인의 시를 통해서 우카이는 3.11의 비극을 낳았던 일본의 근대화 과정- 타민족에 대한 지배 및 배제의 역사와 문화-를 반성하고 이러한 타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일본의 문화와 언어가 새롭게 만들어져야 함을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사회의 자연은 근대인인 우리에게 ‘타민족’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우리’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타민족의 시공간을 과연 얼마나 느끼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그 시공간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을 수 있을까.

* time5 : 6.11 in somewhere else

이 글은 6.11의 전야인 6월 10일에 <가난뱅이들의 반란 TVhttp://www.ustream.tv/recorded/15288580>의 방송을 본 뒤의 감각으로 씌어졌다. 이 TV는 “방사능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랩송으로 시작하여 몇 사람들의 인터뷰를 싣고, 밤을 세워서라도 사람들의 마음에 울리는 플래카드를 만들어 모두 신주쿠에 모이자고 외치고 있다. 인터뷰를 보면 다음 세대로부터 “바보들”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는 것이 주조음을 이룬다. “아마도 시간이 걸릴 테니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나갔시다. 우리들 한명한명이 브레이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저도 브레이크가 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딸이 둘 있는데…..5년 지나고 10년 지나 절 원망하지 않도록 반원전의 소리를 높여가고 싶습니다.(ECD)” 이후 이어지는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도쿄는 이미 틀린 걸까? 이미 틀린 걸까? 필리핀인에게 맡기는 편이 나을까나? 조선인에게 맡기는 편이 나을까나?……도쿄는 이미 틀린 걸까?…. 아니라고 말해줘요” 한 외국인은 피해지에서 “친구여”라는 노래를 부른다. “새벽이 멀지 않았으니~함께 가자~~ 친구여”

이것을 보면서 감동하고 눈물도 흘렸고 6.11에 참여할 의지를 다시한번 다졌고 <가난뱅이들의 반란TV>에 감사했다. 그러나 아주 깊숙이는 일본의 다음세대를 위한 이 절실하고 열정적인 요청과 수많은 호명에 명쾌하게 ‘네’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나 자신도 있다. 오히려 내 속에서는 서경식의 글귀절이 울려 퍼졌다. 그는 일본친구로부터 “베트남 반전 데모에 참 가하자”는 권유를 받았을 때 “나는 너희들과는 입장이 다르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정치활동에 참가하고 싶은 의욕은 남못지않았지만 내게 있어서의 그것은 일본인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친구는 이해해 주지 않았고 결국 서경식씨는 “나는 일본사람이 아니니까”라고 말하자 그 친구는 “왜 귀화하지 않는 거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여자에게 마음이 끌릴 때마다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2)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재일 1세로서의 이우환이란 작가와 2세인 작가 문승근의 차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조선문화에 대한 소양도 풍부하고 조선어가 모국어인 이우환이라는 작가에게는 있는 전통이, 조선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조차 없는 문승근이나 자신에게는 없다는 점을 느꼈다는 것이다. 어느날 문승근이 한밤중에 이우환을 찾아가 토로했던 고민은 단지 일본사회에서 재일 조선인으로서 살아갈 때 느끼는 열등감 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를 빼앗긴 자가 바로 그 지점에서 문화창조에 참여한다는 일에 따르는, 더욱 깊은 고뇌”3) 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문승근의 고통이 ‘전형없는 창조’에 있었다면, 나는 굳건한 저항적 전형을 습득해온 자로서, 스스로 파고들어갈 수 없는 또 하나의 전형 앞에서, 아니 나의 전형이 저항의 대상으로 삼았던 나라의 저항적 문화 앞에서, 나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벗어나버리고 싶어지는 스스로의 감각을, 어찌할 바 모른 채 보고 있는 것 같다.

* time6: 다시 6.11 in anywhere

맘 속에는 또 다른 외침도 있다. “이런 한가한 고민을 할 때가 아니야!” 너는 후쿠시마의 갈등을 직접 경험하지도, 동북지방의 잔해들이 풍기는 악취도 경험하지 못했지 않은가? 이때 동시에 쿠구궁 울리는 한 장면도 있다. 일본에 오기전 한국의 어떤 집회에건 참여해서 싸워주었던 이주 노동자 분들의 빨간 조끼와 “투쟁”이라는 독특한 억양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동시에 어떻게 그 이상을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들은 어떻게 한국말로 ‘투쟁’이라고 외칠 수 있었을까?

“겐빳츠한타이(원전 반대)”까지는 괜찮은데, 데모 도중 사람들이 “왓쇼이! 왓쇼이!(일본 전통 축제에서 힘내라는 뜻의 소리로 한국의 으쌰 으쌰의 의미)”하면 어쩐지 두 손에서 힘이 쭉 빠지곤 하는 나는, 한국의 이주 노동자들이 온 힘을 담아 ‘투쟁’이라고 외칠 때 느껴졌던 떨림과 긴장감과 강렬함의 의미를 지금 여기서 새삼스럽게 느낀다. 그들은 어떻게 속속들이 전형화된 한국 좌파들의 용어인 ‘투쟁’을 자신들의 말로 할 수 있었을까?! 이주노동자들의 몸에 속속들이 새겨져 있던 그들의 다양한 문화와 냄새와 언어와 역사를 떠올리면 그들이 한국에서 투쟁하면서 얼마나 많은 통로와 문을 만들어 내고 있었는가를 동시에 기억하게 된다. 그들의 그 뿌리깊게 냄새나는 삶과 문화에 대한 애착은 다른 문화와 역사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출구이기도 했던 것은 아닐까?

6월 20일이면 3.11 재해와 원전사고 이후 100일째가 된다. 9월 19일에는 5만인 대규모 집회가 준비 중이다. 지금은 좌파/우파, 민족적 계급적 경계를 뛰어넘어 힘을 합쳐야 할 때이다. 동시에 힘을 합치는 방법도 새롭게 발명해 내어야 할 때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후쿠시마와 도호쿠 지방과 함께 호흡할 방법을 궁리하는 것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같은 역사나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도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속속들이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그 애착들을 통해서, 애착이라는 벽은 단단한 것이 아니라 실은 무르고 풍부하고 따뜻한 여러 개의 통로들을 지녀서, 다른 시공간의 애착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나의 애착이 너의 애착과 만나게 되기를.

1) 이 활동에 대해서는 <일본으로부터의 소리>에 야마구치씨와 다케모토씨의 자세한 르포가 실릴 예정이니 많이 읽어주세요!

2)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 2006년, 104쪽

3) 서경식, 위의 글, 134쪽

응답 8개

  1. 낙타말하길

    아, 실수했네요. ^^ 헤헤헤! ^^
    출처는 덤선배 말처럼 표시해 주세요.
    덤선배, 감사 감사!

    • 조항미말하길

      신지영님,
      고맙습니다.
      거대하고 공포스러워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무기력함을 느끼며 당신의 글을 읽었어요.

      내면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을
      세심하게 포착한 부분이 깊이 와 닿았습니다.

      저 또한 초등학교 교사로서
      매일 아이들을 만나면서
      감각의 촉수를 예민하게 벼리려고 노력합니다.

      배움을 성찰과 실천으로 일궈가려는
      저희 모임 회원들께 분명 뭔가 시사하는 점이 있을 거에요.

      편집실력이 부족하여 소식지가 매우 소박하게 만들어 질 거에요.
      나오면 꼭 보내드리겠습니다.( 나오는 대로 메일 보낼게요.)

      더 깊고 개성있는 글로
      저를 깨워 주세요.

  2. 고추장말하길

    인터넷이 되지 않다가 겨우 대학 근처 카페에서 위클리 수유너머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지영이 글을 읽고 화들짝 놀랐다. 지난 몇 주간 집 옮기고 생활을 정착시킨다는 핑계로 정말로 미국 시골의 ‘정착민’이 되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해서… ‘나는 누구인가’, 내가 느낀 ‘이물감’에서 오히려 ‘나’를 극복하는 출발점을 발견하는 네가 자랑스럽다. 나도 세포를 빨리 일깨워야겠구나. 고맙다.

    • 낙타말하길

      병권형,

      저야말로 답글 주셔서 너무나 기뻐요! 말하고 싶었던 것을 이렇게 잘 이해해 주시다니…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부쩍 보고싶네요.
      선배 답글 읽고, 그래, 더 천천히 더 깊은 곳으로부터 계속해서~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어요. ^^
      미국에 식구들도 함께 가셨다고 들었어요. 먼 곳에서 이사하는 건 참 힘들지요? 무엇보다 건강 조심하세요!!

  3. 조항미말하길

    죄송합니다. 3.11 이후 드러나는 우리’들’과 차이’들’인데, 드러나는을 빼 먹었네요… 에궁…

  4. 조항미말하길

    안녕하십니까.
    저는 weekly 수유 너머를 메일로 보고 있는,
    조항미라고 합니다.

    그동안, 일본에서 온 목소리를 잘 보았습니다.
    언제부터 이 특집이 시작되었는지, 처음부터 살피지는 못했구요,
    다만, 최근, 일본의 지진과 원전 참사 이후,
    좀 더 세심히 살펴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모임 중 하나가,
    한일합동교육연구회입니다. -website에 모임 누리집 주소를 넣었습니다. 이 모임은 한국과 일본의 교사, 혹은 일반인들이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실천하는 모임입니다. 그 모임에서 저는 소식지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소식지는 저의 회원들이 공유하는 것으로서, 판매를 하지는 않습니다.

    이번 소식지에, 신지영씨의 글 2개를 싣고 싶습니다.
    이번 교류회의 큰 테마가 바로, 신지영씨의 글이 다루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원고료를 드려야 마땅하나, 저희가 수익을 내는 사업을 전혀 하지 않고 있네요. 가능하다면, 이 글과 3.11 이후 우리’들’과 차이’들’을 원문 그대로 전재하고 싶습니다.

    제 연락처는 010-5623-5393입니다.
    보시는 대로 답변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낙타말하길

      조항미님,

      읽어주시고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해요.
      많은 분들이 읽고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면 그보다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아요.

      한일합동교육 연구회 홈페이지에 가보았어요.
      오랫동안 교류를 이어오신 것 같아서 앞으로도 좋은 활동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일본의 논의 중에는 더 좋은 것들이 많고, 제가 피해지에 가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제 글이 그런 상황을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었을까 걱정스럽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하고 읽어주시리라 믿어요.

      수유+너머 R 웹진에 실린 것이라는 출처 달아주시면, 수유+너머 R웹진을 만드시는 분들도 별 문제 없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지요? 수유+너머R 분들?

      나중에 소식지 나오면 구경해 보고 싶네요~ ^^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몰라 메일 주소 남깁니다. ( boltaguni@daum.net)

      신지영 드림.

    • 말하길

      아래, 신지영씨가 말한 것처럼, 글 갖다 쓰시고요. 출처는 으로 표기해 주세요. 수유너머R웹진이 아닙니다. 수유너머위클리는 독자적인 웹진입니다. 수유너머와 그 친그들 모두의 웹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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