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입에 착착 감기는 동시조 서너 편

- 달맞이

-『분이네 살구나무』김용희 옮김 / 리젬

‘시조’ 하면 고리타분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학창시절, 오로지 점수를 얻기 위해 달달 외웠던 시조들이 어쩌다 떠올랐지만, 별반 감흥이 없었다. 인상이 고약한 이웃을, 단지 이웃이라는 이유만으로 외면할 수 없어 억지웃음을 짓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씁쓸하고 심심했다.
시조와 동심이 결합했다는 ‘동시조’를 대하는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읽기도 전에 고개부터 팩 돌아갔으니까. 그런 내 오만을 잠재운 건 우연히 만난「분이네 살구나무」란 동시조 한 편이었다.

「분이네 살구나무」

정완영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 사이
활짝 펴 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읽으면 읽을수록 입에 착착 감기는 가락도 가락이지만, 그린 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정말 신선했다. 내 눈엔 생뚱맞게 자꾸 어린 동생을 업은 채 설거지를 하고 있는 얼굴 꾀죄죄한 분이가 보였다. 달랑 김치 하나로 동생들 밥 먹여 재우고 동네 어귀까지 엄마 마중을 나온 분이. 기다리다 지쳐 쪼그려 앉아 잠이 든 분이, 어렴풋이 들리는 엄마 발소리에 반짝 눈이 뜨인 분이, 장에서 팔다 남은 생선 한 마리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엄마를 향해 달음박질치는 분이, 사방에 진동하는 생선 냄새에도 코 한번 찡그리지 않는 분이……. 그런 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걸어오다 올려다 본 살구나무. 낮과는 너무나 다른 풍경, 돌연한 꽃 잔치에 입이 활짝 벌어진 분이와 엄마. 그들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입이 벌어졌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을 듯한 오막살이를 대궐처럼 환히 밝혀준 살구나무가 가슴 속 꼭꼭 묻어둔 내 꿈같아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캄캄한 어둠을 뚫고 활짝 피어 오른 녀석이 기특하고 대견해서 살그머니 다가가 두 팔로 꼭 안아주고도 싶었다. ‘젤 작은 것’이 ‘젤 큰 것’을 품고 있다는 상상력도 기발하지만, 오막살이가 대궐이 되는 마법이 펼쳐지는 시간이 ‘밤 사이’라는 것이 흥미로웠다. ‘사이’를 단순한 시간적 배경이 아니라, ‘어떤 일에 들이는 시간적인 여유나 겨를’로 읽는 순간, 마법의 주체는 좀 더 능동적이 된다. 그래서일까? 시종 객관적인 어조로 펼쳐지던 화자의 목소리가 ‘활짝 펴 올라’에 오면 슬쩍 톤을 바꾼 듯이 보이기도 한다. 등을 꼿꼿이 세운 살구나무의 당당함이 느껴져 므흣하다.

「봄산 2」

신현배

덧니처럼 삐쭉빼쪽
돋아난 바위들이
치약 거품 같은
안개에 싸여 있다.
오늘은 산이 모처럼
양치질을 하나 보다.

이 물 저 물 다 떠내어
입 안을 가셔 내고
골짜기 아래로
푸- 푸우 내뱉는가.
양칫물 흐르는 소리
도랑에서 들려 온다.

「봄산 2」는 동심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동시조다. 시인 눈에는 산이 꼭 양치질을 하는 아이처럼 보이나 보다. 바위를 ‘덧니’로, 안개를 ‘치약 거품’으로 비유한 것이 재미있다. 덕분에 안개에 싸인 봄 산의 풍경이 훨씬 실감하게 그려진다.

「눈썹달 2」

윤삼현

사알짝 돋아난
막내 동생 젓니 같은
흙 틈새 뚫고
봄나물 새촉 같은

가느단
새 순 한 가닥
하늘밭에 솟아났다.

「눈썹달 2」역시 이미지가 돋보이는 시다. 시인의 눈에는 눈썹 모양의 달이 ‘막내 동생의 젓니’로 보였다가, ‘새촉 같은 봄나물’로 보였다가 ‘새순’으로 보인다. 젓니이건, 새촉이건, 새순이건 어느 것 하나 대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가늘디 가는 것이 살아보겠다고 ‘틈새’를 뚫고 기어이 솟아났으니 말이다. 사람에서 땅, 땅에서 하늘. 공간의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눈썹달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도 극대화된다. 무한한 하늘 밭에 솟아있는 가늘고 가는 새 순 한 가닥.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방울 토마토」

진복희

도톰한
방울토마토
한 입에 넣고
굴리다가

아작
깨물면
싱그럽게 터지는
폭죽

단숨에
목젖을 적시는
새콤한
방울 폭죽

‘폭죽’ 이 터질 때의 요란함, 폭죽이 터지면서 그려내는 찬란함이 연상되면서 방울 토마토 한 알 먹는 일이 축제임을 알려주는 멋진 작품이다. 방울 토마토를 ‘폭죽’이라니! 묘사가 발랄하고 경이롭다. 언어를 쓰는 감각 또한 세련되었다. 축제를 만끽하기 위해선 기다려야 하는 법. 그러니 방울 토마토 한 알을 입에 넣고 곧바로 와작 깨물어선 안 된다. 굴리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굴리다가’ 가 주는 여운이 ‘단숨에’로 이어지면서 축제의 분위기는 한층 더 고조되고, 기쁨 또한 증폭된다.

「외등 1」

진복희

어둠을 밝혀 앉은
어머니 하얀 이마

종종걸음치는 나를
맨 먼저 알아채고

서둘러
담장 밖으로
긴 목을 빼고 섰다.

시인의 또 다른 작품「외등 1」도 명품이다. 거리를 비추는 ‘외등’을 ‘어머니 하얀 이마’로 표현해 낸 솜씨가 멋스럽고, ‘맨 먼저’와 ‘서둘러’라는 단어가 어머니의 사랑을 물씬 드러낸다.

「강가에 앉아」

김향기

꾸중 듣고
집을 나와
강가에 앉았으면

갈대로 손을 빌며
잘못을 뉘우치고

강물에
얼굴을 씻는
저녁해도 눈이 붉다.

꾸중을 들은 날이면 어깨부터 착 내려앉는다. 속도 몰라주고 야단만 치는 엄마가 야속하기도 하고, 집에 앉아 저녁밥을 기다리자니 염치도 없다. 막상 집을 나오긴 했지만 갈 곳도 마땅치 않다. 이 집 저 집에서 저녁 밥 짓는 연기라도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더 그렇다. 고작 가 앉은 곳이 아무도 없는 강가다. 바람이 불어 갈대가 흔들린다. 갈대가 흔들리자 마음도 흔들린다. 야속하게만 생각되던 엄마가 그립다. 잘못했다고 할 걸 그랬나? 슬그머니 후회도 된다. 아이 마음을 알겠다는 듯 바람에 갈대들이 부딪친다. 그게 꼭 두 손을 모아 비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진다. 강물에 비친 해를 보며 아이는 집에 있는 엄마를 생각한다. 그러자 울컥 가슴이 복받쳐 오른다.
시인은 바람 부는 저녁 강가의 풍경과 꾸중을 들은 아이 마음을 교묘히 오버랩 시킨다. 눈이 붉은 건 강물에 비친 저녁해일까? 그걸 바라보는 아이일까? 하긴 누구면 어떠랴. 꾸중을 들어 심란한 아이 마음을 읽어 내었으니, 시인이야말로 마음을 어루만지는 기막힌 의사가 아닌가? 강물에 비친 석양을 ‘눈이 붉다’고 표현한 부분이 읽을수록 마음에 든다.

「꽃신」

허일

꽃놀이 때
한 번 신고
곱게 아껴 두었더니

단풍 구경 가는 길에
발꿈치를 자꾸 문다.

요담에
세배 가는 날
신고 가나 두고 봐라.

「꽃신」을 읽으면 아이의 새침한 표정이 떠오른다. 너무 귀해 꽃놀이나 단풍 구경을 가는 특별한 날에만 아껴 신는 꽃신. 자길 얼마나 사랑하는 줄도 모르고, 발꿈치를 무는 괘씸한 꽃신을 향해 골을 부리는 천진난만한 아이. 신발을 동무처럼 여기는 아이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우리나라 동시는 동요에서 시작되었다. 동시가 자유 동시로 넓어지면서, ‘낭송’의 매력은 점차 사라졌다. 동화시, 장시, 연작 동시 등 새로운 동시 장르들이 생겨나면서 아이들에게 쉽게 다가서기 위해 ‘이야기’ 기법을 도입하다 보니, 시적 형상화에 소홀해지기도 했다.

‘동시조’는 3장 6구로 이루어진 시조의 가락에, 어른과 어린이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동심을 담은 정형 동시다. 1940년 처음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동시조가 창작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요즘 들어 동시조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좋은 동시조들이 많이 창작되고 있다.
살펴 본 것처럼 좋은 동시조는 시조 형식을 통해 우리 고유의 가락을 이어받으면서도 이미지나 비유 등을 통해 시적 형상화를 잘 구현하고 있다. 거기다가 동심의 상상력을 잘 담아내고 읽히는 맛까지 있으니 ‘동시조’야말로 동시, 시, 시조를 아우르는 ‘종합선물세트’ 인 셈이다.

「감꽃」

정완영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보는 이도 없는 날에
푸른 산 뻐꾸기 울고 감꽃 하나 떨어진다
감꽃만 떨어져 누워도 온 세상은 환하다.

울고 있는 뻐꾸기에게, 누워 있는 감꽃에게
이 세상 한복판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여기가 그 자리라며 감꽃 둘레 환하다.

「감꽃」은 동시조가 얼마큼 진화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재촉한 이 없어도, 보는 이 없어도 새는 울고 감꽃은 떨어진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감꽃 하나 떨어졌을 뿐인데 세상이 환해진다. 감꽃 하나 누웠을 뿐인데 세상이 환해진다. 세상이 환해졌는데도 뻐꾸기는 여전히 울고, 감꽃은 여전히 누워있다. 세상 한복판이 도대체 어디냐고 물었더니, 내가 있는 자리가 바로 세상 한복판이란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울고 몸을 낮춘 게 아니라, 울고 몸을 낮추니 세상이 환해졌단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성찰하는 것이 윤리학이라면, 이 한편의 동시조야말로 삶의 윤리학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응답 1개

  1. 고야말하길

    동시조가 너무 아름다워 저희 아이에게 읽어주었습니다. 짧은 구절에 세상의 진리가 다 들어있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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