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공부는 도시로, 농사는 시골로??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이 마을에는 몇 아름이나 되는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조그만 초등학교 운동장에 솟은 터라 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이 운동장에 드리워집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벌써 300살이 넘은 나무라네요. 이 느티나무 덕택에 소호초등학교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경관을 자랑한답니다.

산골 마을이라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을 제외하면 마을에 있는 것이라고는 작은 초등학교 하나와 조그만 슈퍼마켓 하나뿐입니다. 고개를 들어보면 산과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빌딩 숲으로 가려져있던 시야가 뻥 뚫리는 것이 가슴 속까지 시원합니다.

소호초등학교의 학생은 모두 18명. 선생님은 3분. 그래서 초등학교지만 수업은 세 학급으로 나뉘어 진행됩니다. 여느 산골 마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초등학교 풍경이겠지요.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학교는 울산광역시에 있는 초등학교랍니다. 행정구역으로는 울산광역시에 속한 학교지만 이렇게 학생이 적어 늘 폐교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 마을을 보니 문득 저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 두산리 두산초등학교. 학생은 더 많았습니다. 6개 반에 약 120명이 넘었으니까요. 그러나 현재는 사라져버렸습니다. 학생 수가 적어서 분교가 되었다가 결국 폐교 되어 버렸지요. 원인은 간단했습니다. 하나 둘 시골을 버리고 도시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저도 원인 제공자 중의 하나입니다. 4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도시로 전학 왔기 때문이지요. 한편 엄청난 폭력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청주시 율량동 덕성초등학교 4학년 2반 74번. 분교 직전이라 교실은 학생들로 넘쳐났습니다. 74번이라는 숫자가 말해주듯 한 반의 학생 수는 70명을 넘었고, 제 뒤에도 서너 명이 더 전학 왔습니다. 전교생이 고작 120명 남짓이었던 학교에서 한 반이 70명이 넘는 초등학교로 전학 왔으니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제가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가 시내에서 엄청 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동차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학생들은 점점 줄어 갔습니다. 제가 그 마을을 떠나기 전에 이미 초등학교의 신입생은 10명 안팍이었습니다. 울산의 소호초등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울산광역시 시내에서 고작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소호초등학교의 친구들은 마음만 먹으면 차를 타고 시내에 가서 영화도 보고, 뮤지컬 공연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이 적어서 걱정이지요.

그러고 보면 세계는 면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점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서울과 울산이라는 수도권과 지방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울산 안에 수도권이나 다름 없는 시내와 지방인 시골이 함께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경험한 청주 시내와 울산 시내가 점으로 이어져 있다면 제 어릴적 시골과 소호리도 역시 점으로 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세계적인 도시로 꼽히는 서울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강남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부촌은 세계의 심장부로 불리는 뉴욕의 어딘가와 더 가깝지 제가 사는 남산 자락 해방촌과 가깝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꾸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행정구역으로 시골이라고 시골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90년대 이후 한 때 불어닥친 귀농붐은 사실 시골에 도시를 심는 운동이었습니다. 귀농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시골에 와서 집 짓고 살지만 삶의 모습은 도시의 그것과 다를바 없는 경우가 많았지요. 당연히 시골의 선주민과의 갈등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인의 휴양지를 만드는 이런 귀농 운동이 성공할 리는 없었습니다. 삶의 공간은 바뀌었지만 삶의 형태는 바뀌지 않았던 것이지요.

문제는 시골에 도시를 심어 놓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명해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도시에서 수십년간 생활한 사람이 시골에서 선주민과 똑같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렇지만 반대로 도시에서 살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발명해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소호리의 산촌유학센터는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산촌유학’이라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유학이란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 것인데 산촌으로 유학간다니요.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도시의 학생들에게 몇 달간 산촌 학교로 전학와서 수업을 듣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잠자리나 식사는 산촌 농가에서 해결하구요. 도시 학생은 시골의 삶을 경험할 수 있고, 시골의 농가는 부수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으며, 시골의 초등학교는 폐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면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농가에 맡긴다지만 한달의 숙식을 해결하는 비용이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호리의 산촌유학센터에서는 울주군에서 그 비용의 절반 이상을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렇게 되면 학원 1~2개 정도의 등록 비용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산촌유학센터는 이렇게 도시의 가난한 학생들과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일부 마을 주민들이 귀찮아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도시에서 아이들이 온 바람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걱정은 도리어 반기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 법합니다. 아이들 덕택에 새로운 생기가 그 마을에 돌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번 호에서 다룬 ‘도시농업’도 새로운 삶의 발명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합니다. 이 활동은 멋진 질문을 던져줍니다. ‘농사는 꼭 시골에서 지어야 하나?’ 과연 도시 한복판에서 논과 밭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안산과 서울의 용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시 텃밭들을 통해 그 활동을 살펴봅시다.

산촌유학과 도시농업은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공부는 도시로, 농사는 시골로’라는 통상적인 고정 관념을 깨뜨리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것의 진정한 의미는 파괴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시골이건 도시건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삶으로 채우기 위한 움직임입니다. 도시로 시골로 떠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요. 삶의 공간을 선택하는 데도 만만치 않은 자본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도시로 농촌으로 떠날 수 없는 자들, 그리고 떠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도 적절한 삶의 모습이 필요할 것입니다. 산촌유학이나 도시농업과 같은 실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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