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놀이터와 싸움터에서 농사짓기

- 매이아빠

쥐 그래피티 소송이 시작되던 지난 3월, 어김없이 봄은 왔다. 검찰조사로 날선 마음을 녹여준 건 텃밭에 내린 봄 햇살이었다. ‘그래, 올해도 농사짓자.’ 두 해동안 연구실 옆 다섯평 남짓 공터에 텃밭을 일궈왔다. 끝도 없이 나오는 쓰레기를 파내고 산에서 흙을 퍼와 붓고 경사를 깎고 땅을 골라서 올해는 제법 텃밭다운 형세를 갖췄다. 잡념과 번민을 잊는 데는 농사만한 게 없다. 몸을 써 대지를 만나고 씨앗이 움트는 신비를 체험하는 동안에 뿌리없이 떠도는 잡념들은 바람에 날아간다.

용산도시농업포럼에서 만난 도시농군들과 남산에서 주워온 나무로 경계목을 설치하고 나서 흐뭇이 텃밭을 올려보고 있는데, 연구실 옆 놀이터 울타리를 넘어 온 아이들이 밭으로 뛰어다닌다. 올해도 저 악다구니들에게 밭에서 놀지 말라며 고함치는 ‘할배’ 노릇을 해야 하나, 마음이 심란했다. 그러다 문득 저놈들에게도 작물 하나씩 분양하면 어떨까? 내가 그랬듯이 농작물을 기르는 건 꽤 재미난 일이 아닌가? 저놈들도 그 재미를 알면 교육적으로도 좋고 나도 못된 할배 노릇 안 해도 되지 않나? 그래, 동네 아이들과 같이 농사짓자!

근데, 정말 재미있어 할까? 컴퓨터 게임과 연애질에 몰빵된 초, 중딩의 눈에 이 지루한 생태계가 들어오기나 할까? 그래서 그들의 관심사로 한발짝 다가가 그들의 나와바리인 놀이터에 작물을 심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연구실 주변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곳은 놀이터다. 시멘트 바닥을 깰 수는 없지만 텃밭 상자를 갖다 놓으면 되지 않을까? 마치 쥐덫을 놓는 심정으로 동네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텃밭 상자를 고민했다. 흔히 쓰는 스티로폼 상자는 나부터 재미없다. 어떤 게 좋을까? 마대자루에 흙을 담아 작물을 기르기도 한다는데 그렇게 할까? 구하기도 싶고 물도 잘 빠지고… 마대자루가 되면 청바지라고 안 될 건 없잖아? 안 입는 청바지에 흙을 채웠더니 고추 두 그루는 넉넉히 키울 용량과 인체가 빚어졌다. 청바지가 된다면 버려진 인형도 되고, 구멍만 뚫으면 햄스터 상자도 되고…이런 식이라면 세상에 텃밭 용기로 안 될 물건은 없지 않을까? 버려진 생활용기를 찾아 동네를 누볐다. 그러다 버려진 변기가 눈에 띄었고, 머리 속에 ‘마농의 샘’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뒤상의 샘…마농의 샘’ 신났다. 변기에 물을 채워 미나리를 심어야지. 놀이터 구석 은밀한 곳에.

이렇게 해서 갤러리 놀이텃밭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마농의 샘을 만드는 데 놀이터에서 놀던 초딩 여자애들 셋이 관심을 보였다. ‘걸려들었다!’ “뭐해요?” “예술한다” “에이, 더러워” “너네들이 먹는 밥도, 고추도, 상추도 다 똥을 먹고 자란 거야” “혹시 못 쓰는 물건 없니? 흙 담아서 농작물 심을 만한 거” “동네 다니면 버린 거 많던데” 그날로 아이들과 개미굴같은 해방촌 골목을 누비며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다 흙을 담고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 새로운 아이들이 붙고 상상력이 날개를 달면서 매일 새로운 작품이 탄생했다. ‘남자의 꿈’, ‘여자의 열매’, ‘뚜껑열린 스폰지 밥’, ‘채식불독’, ‘장발장의 상추’ 등 아이들의 머리에서 기발한 제목들이 쏟아져 나왔다.

놀이터 곳곳에 아이들과 함께 만든 농작물 예술작품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날 즈음 용산구청 도시녹지과에서 제동이 들어왔다. 허가받지 않은 설치물이라 철거해야겠다는 거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 했더니 ‘위험하다’는 것이다.
“뭐가 위험하다는 거냐?”
“혹시라도 아이들이 미신고 설치물에 걸려서 넘어지면 그 책임은 누가 지냐? 게다가, 다른 사람들 너도나도 이렇게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 공원의 기능은 훼손되고 말지 않겠냐?”
G20 홍보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것에 검사가 구속영장까지 청구하며 기소한 논리와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정부 시설물에 허가받지 않은 걸 덧분이는 건 위험한 짓이며, 너도나도 그런 짓을 한다면 공용물의 원래 기능은 훼손되고 만다”는 논리. 결국 도시녹지과 공원관리 팀장의 말처럼 “정부가 설치한 대로 제발 그대로 둬라. 거기에 아무 짓도 하지 말라”는 거다. 놀이터를 이용하는 아이들과 어른들의 서명을 받고, 정식으로 ‘갤러리 놀이텃밭 프로젝트’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고, 도시녹지과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보신주의에 찌든 공원관리팀장은 일이 커지는 것이 겁났던지 자기 선에서 허락하겠다는 답변을 했다.

쥐 그래피티 사건과 관련해서 만난 독일의 한 예술가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국가권력에게는 허가 받지 않은 모든 게 위험하다”고 코멘트 했더니, 그 예술가는 “허가 받은 모든 것은 지루하다”고 멋지게 응답했다. ‘허가 받지 않은 모든 것은 위험하다’고 여기는 국가주의자들과 ‘허가받는 모든 것은 지루하다’고 말하는 예술가들의 싸움이야말로 이 시대의 중력을 극복하는 미래전쟁의 전선이 아닐까.

갤러리 놀이텃밭의 작물들이 수확기에 접어들 무렵, 두리반 싸움이 승리했고 동시에 ‘마리’를 거점으로 명동3구역 재개발 반대 농성이 시작됐다. ‘더 많은 두리반을 위하여’ ‘두리반을 마리로’ 나는 쥐 그래피티 후원 파티 때 눈여겨 본 두리반 텃밭작물들을 ‘마리’로 옮겨왔다. 중앙극장 옆 도로변에 두리반에서 옮겨 온 흙과 농작물로 농성장텃밭을 만들었다. 용역들이 깨뜨린 변기에 흙을 담아 고추를 심고, 마리에서 썼던 주방용기에 토마토를 심었다. 갤러리놀이텃밭에서 했던 것처럼 청바지에 흙을 채워 들깨와 토란을 심고, 장기농성할 준비가 되었다는 상징적 의미로 텃논 상자도 만들었다. 벼를 심고, 옥수수를 심고, 봉숭아를 심었다. 가을이 되면 벼이삭이 열릴 것이고, 우리는 옥수수를 쪄 먹으며 여름에 들인 봉숭아물이 손톱에서 조금씩 빠지는 걸 보며 명동재개발 의지도 약해지는 걸 볼 것이다.

명동마리는 지금 ‘무법천지’다. 그곳은 법적으로 생존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땅이자 마음 속에서 법을 몰아낸 자들의 삶이 지속되는 진정한 ‘예외상태’의 땅이다. 두리반 싸움이 보여주듯이 자본의 권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은 ‘삶’의 힘에서 온다. 친구들이 있어서, 잠잘 곳이 있어서, 먹을 게 있어서, 노래와 춤이 있어서, 농성장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이 있는 한 “돈만 아는 저질”들이 싶게 점령하지 못한다. 화염병과 짱돌 대신, 투서와 항변 대신 옥수수와 벼, 고추와 토란으로 나는 삶과 돈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응답 2개

  1. 서업말하길

    놀이터 먹을풀들을 나비처럼 날아다니면서 뽑는 모습을 봤습니다.ㅎㅎ
    어제 즉석 저녁 초대 감사드려요! 아쉽게도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함께하지 못했지만, 곧 R의 삶에 개입하러 찾아갈게요~^^

    • 말하길

      텃밭에서 뜯은 채소로 된장찌개도 끓이고 친환경 비빔밥 맛있게 먹었는데, 다음에 꼭 놀러 오세요. 단호박도 쪄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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