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동계올림픽 후보탈락지 ‘안시’가 부러운 이유

- 맹찬형(연합뉴스 제네바 특파원)

지난 6일 2018년 동계올림픽 후보지로 강원도 평창이 선정된 날 내가 취재를 담당한 곳은 경쟁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프랑스 안시(Annecy)였다. 프랑스 땅은 필자의 관할이 아니지만, 안시가 제네바에서 불과 35 km 정도 거리에 있기 때문에 현장의 표정을 스케치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됐다.

1차 투표 결과 발표 예정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오후 3시30분. 서유럽에서 가장 맑다는 안시 호수 옆 안시 공원에는 오후 1시쯤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계올림픽 후보지를 선정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때문인지 아프리카 공연단이 경쾌하게 타악기를 연주하며 흥을 돋웠고, 더운 날씨 탓에 반팔 셔츠에 반바지 차림을 한 안시 시민들은 어깨춤을 추며 음악을 즐겼다. 즐거운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오후 3시30분이 됐을 때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 도시가 나와서 오후 5시에 최종 결과 발표가 있으리라는 방송이 대형 화면을 통해 전해지자 안시 시민들을 탈락을 예감한 탓인지 하나 둘 씩 자리를 떴다. 이윽고 오후 5시 예상대로 안시는 3개 후보 도시 가운데 가장 적은 득표를 했다. 실망한 시민들의 얼굴 표정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먹잇감을 노리는 들고양이처럼 공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정말 ‘실망스럽게도’ 그런 표정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애초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은 탓이다.

안시 시민들은 무료한 여름날 한낮 공원에서 펼쳐지는 이벤트를 즐기는 데 더 관심이 많은 듯 했다. 의류와 보석 디자인을 한다는 스물세 살 청년 알렉산드로스에게 이유를 물어봤더니, 시민들 중에서도 유치 반대 여론이 많았다고 한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면 호텔 숙박비와 생필품 등 물가가 오르고 교통이 혼잡해지며 환경이 파괴된다는 게 유치 반대론자들의 근거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지난 5월 스위스 로잔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2018년 동계올림픽 경쟁도시들의 마지막 테크니컬 브리핑 때도 안시에서 온 몇몇 시민들이 유치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행사장 입구에 서있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라면 이런 행동을 보고 ‘매국노’라고 거품을 물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안시는 환경을 매우 중요시하는 도시다.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이 그렇지만, 특히 안시는 인간과 환경이 그 중심에 있다. 도시의 심장부에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 안시 공원이 있고, 바로 옆에는 나무숲이 울창한 유럽 공원이 있다. 두 공원 사이를 잇는 것으로 사랑의 다리(Pont d’amour)라는 매우 짧은 다리 하나가 있다. 18~19세기 분위기가 물씬 나는 구도심에는 맑은 운하가 흐르고 백조가 한가롭게 헤엄치며, 운하 주변의 노천 카페에선 햇빛을 즐기는 시민들이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게 전형적인 안시의 여름 풍경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경이로운 것은 시립 도서관이다. 크고 탁 트인 창문을 가진 2층짜리 도서관은 안시 공원 바로 옆에 있다. 별로 넓지 않은 도로만 하나 건너면 된다. 서가를 지나 창가에 앉아 책을 펼치면 창밖으로 공원에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아무렇게나 누워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 아름드리나무들, 시원스러운 녹색의 잔디밭이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 안시 호수에서는 아이들이 카약을 타고 물놀이를 하고 그 뒤로는 론 알프스의 산자락이 병풍처럼 서있다.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는 곳이다.

우리로 치면 서울 명동 한복판 남산 숲이 바라다 보이는 금싸라기 땅이나 여의도 공원 옆 알짜배기 부지에 도서관이 있는 셈이다. 서울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당연히 부가가치가 더 높은 상업용 건물이 들어섰을 것이고, 만의 하나 그런 곳에 도서관을 지을 생각을 하는 공무원이나 자치단체장이 있다 하더라도 토건자본의 등쌀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감정을 하자고 덤비지 않으면 다행이다. 우리에게도 서울 시립 남산도서관이 있긴 하다. 현 위치에 건설된 것이 1964년이다. 도시의 숨통을 조르는 건설에만 열을 올리는 요즘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을 보면 군사독재 시절의 관료들만도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동계올림픽 관련 취재에 나섰다가 엉뚱한 생각만 하고 왔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시의 시립 도서관을 보면서 도시란 무엇이고, 어떤 시설이 중심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그곳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동계올림픽 후보지 개최 경쟁에서 탈락했다 해도 서운함에 눈물을 보이거나 심지어 찡그리는 표정을 하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다.

물론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것은 참 잘된 일이다. 안시에는 안시의 길이 있고, 평창에는 평창의 염원이 있다. 평창은 이미 두 번이나 탈락의 고배를 마셨고, 자칫하면 알펜시아를 비롯해 대회에 대비해 건설했던 수많은 시설들이 골칫덩이로 남을 뻔 했다. 강원도 재정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뻔 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지고, 많은 선수와 해외 관중들을 끌어들여 최대한 많은 수익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대회 운영과 시설 공사 등 모든 면에 환경이 최우선적인 고려 대상이 됐으면 좋겠다. 한 치의 실수 없이 착착 맞아 떨어지는 대회 운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도시에 나무가 많아야 선진국이다. 혹시나 성공개최라는 구호와 효율성의 논리에 밀려 오랫동안 백두대간을 지켜온 숲들이 베어져나가는 아픔이 있어선 안 된다.

응답 5개

  1. 고야말하길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얘기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 늘 잘읽고 있습니다.

    • 맹찬형말하길

      제가 있는 환경 덕분에 저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저런 글들을 모아서 책을 준비하고 있는데 첫 시도라 걱정이 많답니다. ^^

  2. 왜가리(이인식)말하길

    “도시에 나무가 많아야 선진국이다.” 매우 공감하는 말입니다. 도시를 떠나 우포늪가에서 살며 깊이 깨닫는 중입니다.^^”

  3. 말하길

    평창보다 안시가 부러운 건 왜일까요. 주류 신문 이면의 소식 항상 감사합니다. 아, 안시의 도서관에 가고싶당~

  4. 양승원말하길

    보여주는 일이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도시에 나무가 많아야 선진국이라는 것도… 선진국이라는 말 자체를 아주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시점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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