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부러우면서도 든든한 책쟁이를 많이 만나고 싶다

- 김대경

최근의 나의 독서 행각 몇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얼마 전 매주 참여하는 독서모임에서 안창모의 <덕수궁>이라는 책을 읽었다. 대한제국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기까지의 역사 현장을 이렇게 책으로 생생하게 만나는 것이 무척 생경스러우면서도 반갑게 느껴진다. 독서토론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얼마 전에 사 두었던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을 함께 읽으니, 시대사가 다만 시대적 사실(史實)을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애환이 뒤섞인 애틋한 삶 자체로 다가오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바로 전에는 버트란드 러셀의 삶을 다룬 만화 <로지코믹스>를 읽었다. 읽기 전에도, 읽는 도중에도, 읽고 나서도 내가 이런 방대한 책을 읽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용이 매우 꽉 찬 느낌이 들었고, 그 어렵다는 논리학과 수학의 세계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설명할 수 있는 내공 아닌 내공이 생길 정도로, 저자는 그의 삶을 잘 포착하고 형상화한 것 같다. 만화라는 매체가 지닌 힘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또 얼마 전에는 우리 아이와 친구들과 함께 <대구 이야기>라는 그림책을 읽었다. 말은 그림책인데, 읽어 보면 유아를 위한 그림책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대구에 얽힌 북아메리카와 북부 유럽의 역사가 펼쳐지는데, 이렇게 얇은 책에 이렇게 훌륭한 그림과 해설을 덧붙여 책을 만들 수 있는 저자의 필력과 상상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나의 이같은 독서 행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기필코 주변 사람들에게 읽은 책에 대해서는 마구 이야기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데도, 마구마구 그 책을 가져다 안겨주기도 한다. 한번 읽어보라고. 나처럼 중학생 아들을 둔 엄마들에게는 이야기하는 족족 <대구 이야기>를 꼭 읽어보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독서모임하는 엄마 중에 수학교육을 전공한 엄마한테는 다음주에 꼭 <로지코믹스>를 가져다 빌려주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이러다가 나도 융통성없는 책 고집쟁이로 전락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지기도 하고, 남들이 싫다고 하는데도 혼자 이상한 짓하는 괴팍한 아줌마 혹은 선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되지는 않을지 두려워지기도 한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삶에 방해가 되거나 부담을 안겨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책을 좋아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갑갑함을 던져주는 게 아니라, 마음의 키가 한뼘 자라는 듯한 뿌듯함과 행복감에 젖게 만드는 책쟁이(?)의 글을 읽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고, 실컷 닮고 싶어진다. 책을 좋아해도 제대로 좋아하고, 본인도 즐겁고 다른 사람들도 즐겁게 하는 사람,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자기 성찰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 그것이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확대되어 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최근에 만났다. 바로 서현의 <또 한 권의 벽돌>이라는 책이다. 이 책을 택배로 받은 그 날 저녁 대충 훑어보려고 손에 들었다가, 이 묵직한 벽돌(?)을 놓지 못하고 내리 다음날까지 읽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건축가이다. 하지만 건축 설계만을 하는 건축가가 아니라, 책을 무지 많이 읽는 사람이다. 게다가 책에 대한 자기 철학이 뚜렷한 사람인 것 같다. 연세가 꽤 되신 분 같은데, 그의 글을 읽노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전문성에 대해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게다가 읽는 책의 범위가 소설, 과학, 역사, 패션, 경제 등등을 넘나든다. 가령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탱하는 힘이 극단적인 교육열이라면, 가장 큰 암초는 당연하다는 듯 번져가는 탈법과 불공정 경쟁의 일상화다. 가르치는 입장이다 보니 연관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현실에서 대학 기여입학제 허용 여부는 우리 사회의 방향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가늠쇠가 되리란 생각이 든다.

<먼 그대>가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을 즈음, 윌리엄 골딩은 <파리대왕>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소설가에게 필요한 것은 주체할 수 없는 감상의 분비선이 아니라 인문적 성찰이며, ‘나는 인간을 이렇게 본다’는 뚜렷한 가치관임을 보여주었다.

영어 못하는 건 용서할 수 있어도 한글 못 쓰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수시로 이런 책을 들여다봐야 한다. 도대체 내가 어디서 어떻게 한글을 잘못 쓰고 있는지 알기 위해 스스로 정확한 문장을 구사한다고 믿는 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있다. 타이거 우즈도 골프 레슨 받는다.

웹은 문자 문화의 세계를 구술 문화로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참신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여기서도 발전의 가장 중요한 힘은 상상력이고, 가장 큰 장애물은 도식화된 구분이라는 점이 명백히 드러난다. 대학에서는 전공 구분, 고등학교는 문․이과 구분.

생명의 역사는 진보가 아니며, 진화는 발전이 아니라 종 다양성의 확장이라는 주장이 아직도 머리에 선명하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헛소리에 대해 침팬지, 개미 들에게 물어나 보았냐는 이야기.

이 책(<아리랑>)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소위 ‘빨갱이’였느냐가 아니다. 우리 민족에게 닥쳤던 망국의 역사가 어떻게 개인의 삶을 팍팍하고 고단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절절한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활자로나마 남아있는 인생 외에도 얼마나 많은 한스런 인생이 이 땅에서 피고 졌을까 증언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양극화를 거론해서 잠시 양극화 논쟁이 불거졌다. 건축쟁이인 내 생각은 자동차 문제만 대두되면 양극화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자동차를 집 앞까지 끌고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축쟁이가 많다. 나는 도시를 아무리 멋있는 건물로 채운다 하더라도 길거리에 자동차가 들어서는 순간 꽝이 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나무에 손대는 것을 훨씬 더 불편하게 만든다. 나무는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존재는 아닐지라도 인생을 걸고 전력투구하는 진화의 생명체인 것은 틀림없다. 그를 잘라내 거의 다 버리고 곧은 부분만 일부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불편하다.

건축을 하다보면 건축사에 등장하는 무림의 고수가 별 볼 일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경험상 그건 대개 고등학교 교과서 서술 수준으로 상대를 접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잡지에 출몰하는 건축가 중에는 사기성이 의심되는 인물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의 작업을 꼼꼼히 훑어보면, 명불허전이라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도 그렇다.

나는 우리가 저 시베리아까지 정벌하고 다녔다는 식의 민족신비주의자들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외부에서 우리를 보는 입장이 다르다는 점은 외국생활과 그간의 독서를 통해 분명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무조건 위대하다는 막무가내 자긍심이 아니라 다시는 과거와 같은 세상을 반복하지 말자는 분노의식이다. 변화는 자부심보다 분노에 의해 배태되는 것이므로.

정의가 실천되지 않는 사회가 도태한다는 것은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20세기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기형적인 민주주의다. 어떤 사회에 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회는 정글과 같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정글이 아니라고 부인하기 어렵다.

이렇게 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저자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든든하다. 우리 사회에서 세상을 바꿀 만한 리더 혹은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책도 잘 안 읽고, 생각이 꽉 막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배운 사람들 중에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이런 책들을 쓰고, 세상을 해석하고 비판할 줄 알고, 그것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갑갑한 우리의 입시 현실이 떠오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책의 저자를 포함하여 지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 제도권 교육에 저항했거나, 혹은 현재 그와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하면서 살아왔고, 책도 자신이 스스로 찾아서 읽고 해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키워 가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위 요즘 말로 자기주도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독서이력관리 시스템이니 뭐니 해서 학생들에게 억지로 책을 읽히려 하고, 입시 공부 한답시고 EBS 교재만 들입다 파고들고 있으니, 세상이 거꾸로 가도 한참 거꾸로 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며칠 전 작년 수능 언어영역 기출문제를 풀다가 한참 동안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나서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있다. 이호철의 <나상>이라는 소설이 현대소설 지문으로 나왔는데, 몸이 불편한 형과 아우가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었다. 과거에 읽었던 프리모 레비의 <휴전>에 나오는 장면과 겹쳐 읽히면서 전쟁과 인간에 대해 생각하니, 책장을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학생들은 이런 작품을 읽으면서 호흡을 잠시 멈출 여유가 없다. 주어진 시간 내에 문제를 다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지문과 관련해서 제시된 문항은 서술상 특징, 단어의 이해, 시나리오로 각색했을 때의 효과, 주인공과 주제의 관계 등을 묻는 문제였다. 우리가 문학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과 부끄러운 생각마저 든다. 부끄럽지 않은 문학 선생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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