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찾은 장마로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아직은 큰비는 없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어제는 남쪽에 300mm가 넘는 폭우로 한 마을을 덮치는 등, 피해가 크다는 반갑지 않는 소식이다. 비는 점차 북상하여 우리 지역에도 밤새 내린 줄기찬 빗줄기가 지금도 끝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어 불안하다.
금년 장마는 예년에 비해 훨씬 빨라서 상추 쑥갓 치커리 등, 모든 채소를 키우지 못했다. 계속된 비로 작물이 싹이 터서 자라는 도중, 우중 잡초속에서 녹아 없어진 것이다. 씨를 뿌려 한참 잘 자라고 있는 채소들이 녹아 내려앉는 꼴을 보면 참 속상하다. 그런데 그 곁에선 잡초들이 무성하다.
인위를 피해 노지에서 자연에 깃데어 작물을 재배하려면 비가 계속된 장마철엔 무척 어렵고 힘들다. 햇빛도 없이 수분만을 감당하기가 힘든 작물이 녹아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비가 이삼 일만 계속되어도 야채시장은 수급 부족으로 작물 가격이 들썩거린다.
장마철 무성한 잡초를 제거하는 일은 훨씬 힘들다. 뒤덮인 잡초를 수시로 매주고 있지만, 이곳에 손을 쓰면 저곳에서는 벌써 쑤욱 자라버리는 우중 잡초의 성장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 우중에 무성한 잡초를 꼭 잡아야 한다. 미리 잡지 못한 잡초로 작년 파농을 했던 경험에 나는 불안하다. 지금은 젖은 땅에 풀이 부드럽고 약해 뽑기가 수월하지만, 장마가 그치면 굳어진 땅에 강해진 풀을 감당하기란 몇 배나 힘이 더 든다.
먹거리 채소를 기르는 일이 아닌, 세찬 빗줄기 사이로 보인 장포의 무성한 풀무리를 바라 보려니 마음이 더욱 무겁다. 작물의 애석함에 겹친 무성한 잡초를 보는 속알이 짜증이 이렇듯 마음을 힘들게 함일 것. 어쩌랴 순응하며 적응해야지… 자연에 따르는 본심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보다 더 힘든 일, 이를 어찌 감당하면 좋을까? 서툴게 가꾼 작물을 나눠 들자며 불쑥 불쑥 마구잡이로 건네는 것이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어설픈 농사꾼이 농사를 한답시고 저지른 실수는 참 많다. 가만이 있으면 매사가 형통일 것을 괜스리 저질러 후회하는 어리석음은 어데다 호소할 곳도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꾹 참고 전혀 아닌 채, 지내오고 있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가려온 본심을 보여 해명함으로 이해를 구해야 할 것 같다.
가꾼 작물이 불실하지만 그래도 귀한 먹거리가 될 듯 싶어, 농약없이 기른 야채임을 내세우며 직접 또는 택배를 통해 이곳 저곳에 전했다. 나누어 들면서 그동안 고맙다는 말을 과분하게 들었다. 때로는 당황하며 무안스러움도 경험했다. 그러나 아닌 경우는 마음에 두지 말자며 지금까지 에둘러 피해왔던 일도 많다.
믿었던 탐스레 자란 여름 배추가 벌레와 물에 치여 무너지고 있었다. 우중이라 야채값도 올랐다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 부랴 배추를 뽑고, 이것 저것 추슬러 몇 곳에 나누어 보냈다. 그런데 택배를 받은 분으로부터 ‘앞으로 채소를 보내지 않음 좋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너그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러운 말씨였으나, 오죽하면 전화까지 했겠나 싶어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음이 찜찜하다. 이번 같은 작물을 보냈던 자식집에 전화를 해, 보낸 작물의 상태를 물었더니 괜찮더라는 답변이었다.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싼 풀죽은 야채를 불쑥 건네고, 덜렁 보내는 그동안의 나의 짖거리가 결코 아름답고 기쁜 일이 될 수는 없었을 것. 정성이 없는 나의 무성의는 많은 반성과 더불어 고처야할 당연지사이다. 또한 진즉 고개 숙여 정중히 사죄를 드렸어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배품처럼 비춰짐이 어쩐지 낮 간지럽고 못 마땅해 지금까지 한사코 지나쳐왔다.
그동안 어설픈 작물을 나누면서 나의 잘못은 크다. 오래전 이야기로, 야채는 싱싱해야 한다며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건넨 야채들이 다 물러터진 쓰레기였단다. 냉장고 보다는 상온 보존이 더 오랫동안 안전함을 몰라서 저지른 큰 실수였다. 그런데도 한동안 이 짖을 계속하다가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사실을 전해 듣고서야 비로소 그만 둔 일이 있다.
때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렇게나 성의없는 포장을 하여 보낸 적도 많았다. 상대편의 배려는 없이 그저 주는 것이 대단한 선덕처럼 자만심에서 저지른 경박함도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입장을 도외시한 채, 함부로 건네기도 했다. 또 대단치도 않는 것을 편애로 차별하지는 않았는지…. 나의 지, 부지간의 실수로 인한 깊은 반성꺼리가 많다.
예전에 있었던 일로, 오랜 친구에게 소식을 겸해 손수 지은 작물이니 맛보라며 택배를 했었다. 그런데 이 친구, 답신 겸 전화가 걸려왔다. 택배 예기도 나왔다. “너에게 얻어 먹는 것이 부담스럽다. 다시는 보내지 말라”는 당부였다.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이기에 그의 심성이나 말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어쩐지 섭섭했다.
나역시 보내면서 망설이며 쉬이 보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친구래도 그냥 받는 것이 어쩐지 부담스러울 수는 있으리라. 전업 농부도 아닌 내가 손수 기른 작물이려니 자랑끼도 없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친구와의 대화에서 ‘얻어 먹는다’는 표현 보다는 ‘나눠 먹는다’거나, 또는 ‘받아 먹기가’라는 표현이었더라면 싶었다. 이후 그 친구와 별다른 일이 없이 띄엄 지내고 있다. 물론 그 일 때문은 아니며, 나이 들면서 차차로 나타난 현상이다.
세상살이의 관계를 한참 생각게 했던, 그 때의 느꼈던 이런 저런 심사가 다시 떠오른다. 친구나 부모 형제, 친척, 친지등 주위의 인연들과의 교제와 관계를 생각하여본 일이다. 우리들 관계가 너무 무미 단조롭지 않는가. 체면이나 의례를 의식하면서 너무 품위를 찾고, 명분과 당위 심지어는 이해를 따지는 관계라면, 온정도 재미도 바랄 수 없는 삶이 될 것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품위나 체면보다는 소박 단순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삶이 더 아름답다는 일념이다. 이런 푼수짖이 때로는 나를 황당스럽게 한다. 당황이 지나쳐 나를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이에서 나를 지키고 싶다.
그러나 이점만은 꼭 많은 이해를 당부드리고 싶다. 씨를 뿌리고, 싹을 돌보며, 작물을 기르는 일이 즐거워 나는, 아주 작은 장포에 취미삼아 나의 먹거리 채소를 기르고 있다. 작물들의 곱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기도 하다. “마치 다 큰 자식이 시집 장가를 가듯” 자기를 걷우어 주라며 자태를 뽐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뽐내며 자란 자태의 그들을 어떻게든 걷우어 줘야겠는데, 내가 그 야채를 먹을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어 항상 먹고 넘친다. 걷워 주지 않음에 그들이 자존심이라도 상할 듯, 그래서 꼭 삐치기라도 할 것 같은, 그들을 보기가 마안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애지 중지 내가 기른 작물이 그냥 버려진 꼴을 보기란 더 비참하다.
이것이 농부의 마음이다. 농심은 자기 작물의 시든 잎사귀 하나도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포장을 하면서 함부로 버리지 못해 시든 잎사귀도 함께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이 불량품으로 오인되어 상대를 실망시키리란 것을 알면서도, 쉬 바로잡지 못함을 원망하면서도, 번번이 반복하고 있음이 농부이다.
이실직고, 작물의 나눔이 여러분이 아닌 나를 위함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래 나는 늘 기쁘고 행복하다. 내가 정성드려 가꾼 작물을 줄 곳이 없고, 드릴 수 있는 분이 안계시면 내가 얼마나 쓸쓸해 서글프겠는가…
“저 볼 품 없고 시든 작물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라 빌면서, 여러분께 어리석은 농부의 마음도 해아려 이해하는 아량을 간곡히 당부드린다.
선배님
정성으로 가꾼 것들의 ‘나눔’이
이렇듯 애잔한 글 한 편으로 익었습니다.
택배를 받은 분들 중 선배님의 땀과 정성을
기억하지 않은 이들은 한 분도 없으실 겁니다.
풋고추의 톡 쏘는 맛이 웅숭깊은 된장의 맛을 더해주는
아침이었답니다.
오는 비는 올지라도… 선배님 홧팅!!
어제는 수유너머 주방에서 요리를 했지요~
그때 등장한것이 ~ 배추 한포기 ㅋ
생각났답니다.. 금요일날 신문지루 하나하나 포장하시고~ 빈틈없이 박스를 채워주셨던 그 모습~
하나라도 더 나누고픈 마음..
그리고~ 택배를 부치기위해 차를 타고 나가셨지요~
그 덕에.. 어제는 배추부침개~ 밀가루에 계란만 풀어 배추에 입혔을 뿐인데.. 그리 맛있더군요~
그리고.. 된장국에두 넣어먹고~
속은 쌈싸먹고 ㅋ
함께 먹어 더 맛있는 밥상이었지요~
선생님이 정성껏 기르신 작물이 모든이에 입을 즐겁게했답니다~
선생님~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