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와 떠난 여행

8화: 진정 중요한 것은

- 배문희

하지만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얄리는 공구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한숨을 쉬었다.

“흠… 이건 다른 것과는 달라. 부러진 의자를 고친다거나 새로운 물건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이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할 수가 없겠는걸.”

나는 어쩔 수 없이 풀여치를 끌고 자전거 가게에 갔다. 놀이동산 앞에 있는 커다란 자전거 가게였다. ‘세상의 모든 자전거’라는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는 4층짜리 건물에는 갖가지 자전거들이 빼곡이 진열돼 있었다. 가게 이름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전거들을 모아놓은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새 자전거를 보러 오셨나보군요.”

검정색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맨 점원이 다가왔다.

“저런, 자전거가 영 못 쓰게 됐군요. 완전히 박살이 난 것 같은데요. 마음껏 둘러보세요. 이곳에선 얼마든지 원하는 자전거를 고를 수가 있으니까요.”

나는 점원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풀여치가 영 못 쓰게 됐다니… 하지만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커다란 자전거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잔뜩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화려한 옷가게나 미용실에 들어가면 항상 기가 죽는다. 그곳에서 점원이 이것저것 옷을 골라주거나 머리모양을 다듬으면 몸이 바짝 움츠려들곤 했다.

“저… 그게 아니라. 자전거를 고치러 왔는데요.”

“뭐라구요? 이 자전거를요? 허허. 고객님, 고물 자전거를 고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자전거를 고칠 가격이면 얼마든지 더 좋은 새 자전거를 살 수가 있을 텐데요.”

점원이 가리키는 곳엔 반짝반짝 빛나는 새 자전거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순간 내 옆에 기대고 서 있는 풀여치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떤 자전거를 원하십니까? 통학용 자전거? 레저용 자전거? 말씀만 하세요. 이곳엔 모든 자전거가 다 있으니까요.”

“저… 저는 자전거를 타고 이 나라 곳곳을 가보려고 해요.”

순간 점원의 눈빛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 그러십니까? 그렇담 여기에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자, 자,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점원에게 이끌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인 4층에 멈추자 고급스러운 홀이 나타났다. 바닥은 황금빛으로 칠해졌고 은은한 조명들이 발밑을 비추었다. 그리고 크기와 모양이 다른 자전거들이 유리 진열장 속에, 황금빛 시렁 위에, 뿜어 나오는 분수 위에 놓여 있었다. 홀의 중앙에는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레드 까펫 위에는 보석이 박힌 자전거, 춤추는 인형이 달려있는 오르골 자전거, 신비로운 조각이 새겨져 있는 자전거 등 보기만 해도 탄성이 나오는 자전거들이 줄지어 있었다.

“자, 이곳은 특별한 고객님들을 위한 명품관입니다. 이 나라 전체를 돌아다니려면 강철처럼 튼튼하고 솜털처럼 가볍고 지렁이처럼 유연한데다가 여우처럼 영리한 자전거가 필요하지요.”

점원은 너스레를 떨며 한 자전거를 가리켰다. 페달을 구르면 쏜살같이 달려 나갈 것 같은 날렵한 자전거였다.

“이 자전거가 바로 고객님이 원하시는 모든 조건을 갖춘 자전거입니다.”

나는 자전거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자전거 목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놀랍게도 가격표에는 ‘3,000,000’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이.. 이건 너무 비싼 것 같은데요.”

“하지만 고객님. 아까 이 나라 전체를 돌아다닐 거라고 말하지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이 정도는 돼야 안심이죠. 전국일주용 자전거는 최소 100만 원부터 최대 2000만 원 까지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가장 무난한 자전거를 추천해 드렸습니다.”

“저… 그런데 자전거가 왜 이리 비싼 건가요? 제 눈에는 다른 자전거와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아서요.”

“흠흠,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뭐가 다르냐고요? 모든 것이 다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요. 10만 원짜리 자전거와는 이름만 같은 자전거일 뿐 소재, 구조, 매커니즘, 스타일, 브랜드가 완벽하게 다릅니다. 애초에 태생부터가 다른 셈이죠. 전국일주를 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합니다. 무엇보다 고객님은 소중하니까요. 만약 고객님이 갖고 있는 그 자전거를 고쳐서 떠나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얼마 가지 못해 자전거가 산산조각이 날 테고 최악의 경우 고객님의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온몸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부풀었던 마음이 잔뜩 쪼그라들었다. 풀여치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엉터리에다 바보 같은 짓거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격이 부담된다면 고객님이 원하는 것으로 골라 드리죠. 아무리 못해도 지금 갖고 있는 고물 자전거보다야 훨씬 훌륭한 것들이겠죠.”

“넌 내게 아주 특별한 존재란다.” 순간 풀여치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달빛 아래서 빛나던 연두색 몸체와 날 바라보던 젖은 눈빛도. 점원은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말했지만 그야말로 진정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먼 여행을 떠나고 어둠 속에서도 계속 나아가게 하는 것은 태생부터 다른 소재나 매커니즘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 눈으로 볼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닐까. 우리들 내부에서 샘솟는 열정과 의지, 서로를 향한 믿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나는 움추린 어깨를 펴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새 자전거는 필요 없어요. 자전거를 고치러 다른 곳으로 가겠어요.”

응답 2개

  1. 서울사는만두말하길

    돈으로는 살 수 없고… 사람살이 살다 보면, 켠켠이 쌓이는 인연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거, 정말로 어렵고도 소중한 것이라 생각해요. 모모가 풀여치를 절대로 버릴 수 없고, 버려서는 안되는 이유 같은 것이잖아요.

    “잠들기 바로 전”에… 양희은님이, 이병우님의 기타 연주에 맞춰 조곤조곤 얘기해 주시던 것처럼…

  2. 나무야말하길

    잘 보고있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나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풀여치의 여행이 갈수록 기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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