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3호] 글리벡 약가 인하 취소 판결, 또는 옵션이 된 생존권

- 기픈옹달(수유너머 R)

글리벡 약가 인하 취소 판결, 또는 옵션이 된 생존권

1월 22일 ‘글리벡’의 약값 인하를 취소하라는 서울 행정 법원 행정3부의 판결이 나왔다. 글리벡은 1일 1회 복용함으로써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백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희소 의약품으로, 스위스 노바티스사에서 개발하여 2001년 미국 식품 의약국 안정청의 승인을 받으며 국제 시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백혈병 치료를 위한 만족할 만한 대체 의약품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황에서 백혈병 환자들은 싫으나 좋으나 글리벡을 복용해야만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 이번 약값 인하 취소 판결의 쟁점이자 맹점이다.

우리나라에 글리벡이 수입되어 시판된 것은 2003년부터인데, 건강 보험 등재 당시 100mg의 약값이 2만3천45원으로 지금까지 단 1원 내린 것을 제외하곤 전혀 인하의 기미가 없었다고 한다. 환율차를 고려하더라도 우리와 경제 형편이 엇비슷한 대만에서 동일 제품이 1만8천원 정도에 판매된다 하니 역시 비싼 가격이 아닐 수 없다. 400mg 제품이 보다 고용량이며 저렴하긴 한데, 노바티스는 이 용량품을 국내에 공급하지 않아 환자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비싼 저용량 제품을 구입해야 했다.

매일 정해진 용량을 복용해야만 치료에 효과가 있고 또 연명도 가능한 일이기에 환자 1인당 글리벡의 월 구입액은 276만5천원에 상당하며 건강 보험 재정에서 지출하는 비용 역시 거의 천문학적 수준에 이른다. 예컨대 건강 보험에서 지출된 글리벡 비용은 2003년 당시 154억원이었는데 단 5년만에 2008년에는 778억원까지 치솟았고, 환자 개인 부담금을 더하면 2009년 글리벡 단일 품목에 대한 국내 매출은 거의 1천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서민들에게 이 정도의 약값을 버틸 만한 능력이 과연 있느냐에 있고, 이 문제 앞에 생존은 삶의 ‘권리’가 아닌 ‘옵션’의 차원으로 전락해 버린 듯하다.

상대적으로 비싼 데다가 저소득층을 고려하지 않은 다국적 제약사의 가격 정책에 대한 항의는 글리벡의 시판 초기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 결과 2008년 환자·시민 단체들이 약가 인하 조정 신청을 보건복지가족부에 제출했으며, 2009년 9월 1일 복지부 장관 직권에 의해 시판가의 14%가 인하된 1만9천818원에 글리벡의 공급이 이루어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한국 노바티스는 곧장 약가 인하 취소 소송과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결국 올해 1월 22일 복지부의 약가 인하 고시를 취하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온 것이다.

판결의 근거이자 제약사의 논리는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글리벡의 상한가 금액 산정에서 불합리성을 찾아볼 수 없으며(!), 또 자유 무역 협정(FTA)에 의한 관세 인하를 이유로 특정 의약품에만 상한가를 인하하는 게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글리벡 상한가는 미국·일본 등의 7개국의 평균가를 통해 결정되는데 한국도 그 만한 경제적 수준이 되기에 크게 비싸다 할 수 없고(“너희 나라 먹고 살 만하잖아?”), 다른 의약품들 가격은 유지하는 데 유독 글리벡만 인하해 주는 게 형평성에 어긋난다(“다른 약들도 다 낮추면 뭘 먹고 살란 말이냐?”)는 주장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환자와 시민 단체들의 약가 인하 조정 신청은 21세기의 ‘시대 정신’인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한 중대한 침해였다고나 할까. 사람 목숨 살리자는 제약사의 주장치곤 어쩐지 빈곤하다. 법리적 논증과 현실에 대한 고려라 해도 결국 우리의 삶은 경제적 조건에 좌우되는 옵션이라는 논리가 너무나 투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도덕적 비판 너머로 사실 더 큰 위험이 잠복해 있다. 우리나라에서 FTA가 이대로 비준·체결될 경우, 다시 제2, 제3의 글리벡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약값을 시장 자율에 맡기고 그것을 법적으로 보장하라, 고 요구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이번 판결로 인해 차세대 백혈병 치료제인 ‘타시그나’의 경우 약값 책정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다국적 제약사의 손에 칼자루를 쥐어주게 되었다. 국제 시장에서 정해진 과중한 시판가가 국내에 그대로 적용된다 해도 달리 방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현행 제도상에서는 건강 보험에 등재될 때 의약품의 주 수요층과 접근성 등에 대한 고려가 가격 정책에 반영되도록 정해져 있으며, 지나치게 고가가 책정될 경우 장관 직권에 의한 가격 인하를 고시하는 게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FTA가 전면 시행되어 시장과 자본의 논리가 ‘합법성’을 무기로 쳐들어올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빈부차가 중요한 사회적 계급화의 요소로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비용의 약값을 부담하며 건강한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아직은 의료 보험 제도가 필요하고 또 존속하리라 낙관하는 분위기지만, 이명박 정부가 의·약 민영화를 도입하려는 기세를 볼 때 앞으로 우리가 건강 보험 따위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의약품이란 기껏해야 종합 감기약이나 아스피린 정도나 될 듯하다. 물론 아스피린은 백혈병 같은 난치병 치료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플 때 어떤 약을 사다 쓸 것이냐 말 것이냐가 옵션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약을 살 만큼 부유하냐 아니냐는 결코 옵션이 아니다. 돈 없으면 약 한번 못쓰고 그냥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바야흐로 옵션이 되어버린 생존권이 거기 던져져 있다.

최진석(수유너머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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