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노동잔혹사

가족의 해체(?)

- 김민수(청년유니온)

*아래의 글은 청년유니온 조합원의 일화를 토대로 작성 되었습니다.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 올라온 것이 햇수로 10년이 꼬박 채워져 간다. 매일매일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통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물론 10년 전에는 KTX도 없었지.) 대학 입학에 맞춰 상경하여 소위 ‘사회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지금에 이르기 까지 서울에 서식 중이다. 먹고 살기 녹록치 않은 현실에 떠밀려 고향 식구들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연중행사가 되다시피 해버렸다. 다행히 얼마 전 새로이 취직한 회사에서 여름 워크숍 장소로 부산을 낙찰 시켜버린 덕분에 차비를 굳히고 고향집에 넘어왔다.

집은 참 이상한 공간이다. 지지고 볶는 답답함이 ‘탈출의 욕망’을 자극하는 한 편, 고단한 삶의 한 켠에서 살며시 등장하는 ‘쉼표’로서의 의미는 강렬하다. 어느 여류 소설가가 잘 ‘부탁’ 한 이가 차려 주는 밥상을 홍대 언저리의 자취방에서 죽지 않기 위해 해먹는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풍성한 휴식이 무르익을 즈음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였다. 근엄과 권위의 상징으로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이 분의 모습이 유난히 안쓰러운 까닭은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지… 밥은 챙겨 먹고 다니냐는 신변잡기(?)부터, 애인은 있냐는 가슴 시린(?) 질문을 지나,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이 화두로 넘어왔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청년유니온 조합원(임과 동시에 자녀)의 입에서 나올 질문은 예견 된 것이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급여는 어떻게 줘?”

“많이 못 주지. 라인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최저임금에서 조금 더 주는 정도…”

“주휴수당은 챙겨서 줘?”

“그거는 당연히 급여에 들어가고. 그거 말고도 식대도 따로 챙겨주고 있고.”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밀려왔다. 근로기준법이 턱걸이로 유지되는 상황을 안도하게 되는 이 땅의 야만이 고통스럽지만,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를 존중하는 이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는 자연스레 내가 몸 담고 있는 활동에 대해 이야기 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법정 주휴수당을 준수하기 위한 일련의 활동들에 대한 이야기가 풀어졌다. 기분 탓인지 혈액에 잔류 중인 알콜 농도 때문인지 길게 늘어진 나의 썰풀이에 이어진 아버지의 반응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얘야.”

“응?”

“그 활동 안하면 안 되겠니…?”

“왜…?”

“아버지라는 인간도 지금 노동법을 지키기 너무 버거운데 딸이 그런 활동을…”

애당초 규모 있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풍족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최근에 동종 업계에 진출한 대기업이 수주 물량을 싹쓸이 하는 이후로는 상황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직원의 숫자가 대폭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면성실’이라는 가치로 무장한 아버지의 인건비가 떨어지지 않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노동의 정당한 대가로 주장하는 ‘최저임금 5180원’이라는 희망이 부산에서 영세한 공장을 운영하는 누군가에게는 ‘노동법을 위반한 범법자’에 이르는 절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렵고 가슴 아팠다. 바닥이 찰랑거리는 술잔과 초라한 어깨로 남겨진 아버지와 이 땅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결국, 나는 더 이상 명동에서 진행 된 최저임금 인상 캠페인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인간다운 삶을 함께 만들어 나간다는 긍지와 자부심은 힘 없이 쳐진 그의 뒷모습에 뒤섞여 갈 길을 잃었다.

내가 사는 현실은, 희망과 절망의 간극만큼 절망적이다.

응답 1개

  1. ㅇㅇ말하길

    최저임금 인상 캠페인을 멈출 것이 아니라 대기업의 횡포를 멈추기 위한 활동을 겸해서 더욱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은데요..ㅎ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