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6.11. 쩡청增城 농민공 시위, 정치를 빼앗긴 자들의 귀환

- 홍진

지난 6월 11일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로부터 3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규모의 반핵 행동과 집회가 이어졌지만, 홍콩을 제외한 중국 본토에서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심하게 제한되어 있는 중국에 특정한 정치적 구호나 조직된 공동행동을 보긴 참 힘들다. 하지만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중국 각지의 소요는 계속 증가하여 연간 15만 건을 넘어섰다고 한다. 농민공과 소수민족들의 조직되지 않은 즉흥 행동, 단발적인 폭력시위와 파업들이다. 6월 11일에도 광저우廣州 쩡청에서 농민공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사회적 반항이 컸던 이날의 시위를 언론에서는 6.11이라고 부르고 있다.

소요가 일어난 쩡청시 신탕增城은 외지인(50만명)의 비율이 현지인(22만명)을 배로 넘어서는 특별한 곳이다. 공장이 밀집해 있는 따둔촌大敦村의 경우, 등록된 주민은 7천명에 불과하지만 쓰촨四川과 후베이湖北에서 온 농민공은 무려 8만 명이다. 문제는 농민공들에게 도시 후커우户口(거주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곳에 살며 일 하지만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박탈당한 농민공들은 일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셈이다. 형편없이 낮은 임금과 교육, 의료, 직업, 치안 등 생활 전면에서 국가의 모든 서비스를 받지 못한 채 농민공들은 거기 존재하되, 불리워지지는 않는 불길한 존재로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다.

물론, 그대로 방치해두기만 한 것은 아니다. 따둔촌 농민공들의 치안을 감당할 수 없었던 시정부는 그간 20명의 보안요원을 운영해 왔다고 한다. 일반 인민 보다 약간 높은 2000위안 정도의 월급을 받는 이 보안요원들은 이주노동자들의 ‘등록 될 수 없는’ 오토바이와 좌판을 단속하며 삥을 뜯거나, ‘보호(누구로부터!?)세’를 받아 내고 있다. 등록되지 않은 이주 노동자, 시민으로 호명되지 않는 이들에게 유일한 정부(政府)는 장부도 없이 벌금을 걷고, 폭력으로 즉결 심판도 하는 무소불위의 시정부 보안요원들이다. (인민들은 이들을 흑사회黑社會라 부른다. 기묘하게 드러나는 국가의 본질.)

사건의 시작인 6월 10일 저녁. 시정부 소속의 보안요원들이 노점상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싸구려 청바지를 팔던 쓰촨四川 출신의 20세 임산부 왕롄메이王聯梅를 거칠게 밀쳐 넘어뜨렸다. 공안들이 출동하고, 왕롄메이는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사건현장에 모인 백 여 명의 분노한 농민공들이 공안에게 물병과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으며, 이틀 후 저녁에는 천 여 명의 농민공들이 경찰차를 뒤집고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정치에서 배제된 채, 빼앗긴 기본권에 대한 어떤 항거의 방법도 찾지 못하고 있던 농민공들, 손에 쥔 카드 한 장 없이 자본주의의 게임에 막 발을 들인 초보 참가자들은 ‘보호받아야 할 동향출신의 젊은 임산부’라는 익숙한 도덕적 상징 앞에서야 겨우 분노의 출구를 찾은 것이다.

정부는 급히 무장군인 2700명과 장갑차를 투입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7월 1일 공산당 창립 90주년 행사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았던 정부의 발 빠른 진압이다.

비공식적으로 두 명이 죽고(한 지방지를 제외한 어떤 언론에도 실리지 않았으니, 진위는 알수 없다.) 18살의 어린 청춘들을 일곱이나 포함하는, 소위 ‘사건 주동자’들 19명이 9개월부터 3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사건 며칠 후 언론에 실린 것은 피해자의 남편 탕쉐차이唐学才의 모범답안 같은 인터뷰 뿐 이다. 산모와 아이는 모두 무사하며, 자신들은 에어컨이 나오는 깨끗한 병실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 신문은 노점상 개인과 단속반 사이에 해결된 문제를 몇몇 불법분자들이 선동에 이용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중국의 농민공들은 도덕적인 정당성을 위해서도,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도 정부가 보호해야할 첫 번째 집단으로 공인되어 있다. 정부의 각종 발표는 농민공들의 불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고르고 골라진다. 쩡청시 쉬즈뱌오徐志彪 당서기는 피해자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 위로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으며, 공산주의청년단(일반적으로 분배파) 출신으로 내년 상무위원 진출이 유력한 왕양汪洋 광둥성 당서기는 6.11 이후의 한 인터넷 담화에서 ‘과거 수십년간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우리는 농민공들에게 사회적 빚을 졌으며, 이 빚을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쩡청시의 수많은 농민공들에게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쩡청에서 발생한, 그리고 중국 각지에서 하루 평균 수백 건씩 일어나고 있는 농민공들의 시위는 순수한 분노의 표현이다. 조직도 없고, 정치적 방향성도 없는, 정치에서 배제된 자들의 짧은 귀환.

일본 고에이사의 고전 컴퓨터 게임인 삼국지에서, 중국의 농민은 세금을 많이 걷으면 반란을 일으키는 하나의 변수일 뿐이었다. 지금, 중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그 수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우매한’ 인민들로부터 정치를 도려내고 있다. (중국의 사회과학원을 비롯한 여러 연구단체에서는, 서구식 대의민주제가 중국에서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 편의 논문으로 발표하고 있다.) 그 한편에선, 7월 1일, 공산당 90주년을 기념하며 인민을 선동하는 표어들이 신문 일면을 장식한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말미의 낡은 벽에 씌여진 혁명의 자국들처럼 쓸쓸한 이 표어들 위로, 농민공들의 그림자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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