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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기억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이다. (1932). 사막 한 가운데 무언지 모를 걸쭉한 것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제목은 저 걸쭉한 모양새가 계란 프라이라고 말해주지만 여전히 모호한 건 마찬가지. 그럼 저 아득한 공간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수도자가 헤메이는 이집트의 사막인가, 원형의 생명체가 탄생하는 태초의 공간인가. 오래도록 그림을 보고 있으니 마치 저 괴상한 물체가 좌우로 움직이는 것만 같다. 아니 불현듯 자세를 바꾸어 나를 공격해 오는 것 같기도 하다. 가만 보니 저 모습은 영화 <괴물>에서 사람들을 공격하기 전, 천연덕스럽게 매달려 있던 그 괴물 자세 아닌가.

잠깐만, 아니다. 조금 더 깊숙하게 들여다보니 여기에는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배어있다. 어느 오후 서둘러 끝내 버린 정사 후에 낮게 늘어져 있는 남성의 그것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태어나지 못한 채 버려져 어미를 그리워하는, 그 이름조차 없는 낙태된 태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어라 불러도 개운치 못한 이것은 왜 여기 열기가 훅훅 불어오는 사막 한 가운데, 죄수의 잘린 목처럼 매달려 있을까. 그것도 아주 나른하게.

이런 나른함은 달리의 다른 작품 <회한, 혹은 모래밭의 스핑크스>(1931)에도 등장한다. 턱받침을 하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는 여성의 등 뒤에는 아마도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저리 분명한 그림자를 남길 수 없을테니까. 태양을 등지고 있는 여자는 끝모를 회한에 빠져들며 알 수 없는 그림자를 낳고 있다. 제목을 보자면 아마 그는 인간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민하는 스핑크스일 것이다.

이 두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는 무엇인가. 그것을 ‘권태’라고 이름붙여도 좋겠다. 사실 ‘권태’는 뜨거운 오후의 사막과 관련이 깊은 정서다. 그 어원이라 할 수 있는 아케디아(acedia)라는 개념은 기원 후 3-4세기경 알렉산드리아 근처 이집트 사막에 거주하던 고행자 및 금욕주의자들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사막의 수도사들은 여러 악마들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악마는 오후에 수도사가 약해지는 순간을 틈타 그의 심장 속으로 침입한다. 그러면 수도사에게 하루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길어지고, 삶은 황폐해져 그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가 이 그림을 그리던 20세기 초반의 30년대는 사람들이 이토록 공허함과 나른함에 빠져있도록 조용한 침묵을 지키던 시대가 아니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급속히 진행되어온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유럽문화의 진보는 전화, 무선, 엑스레이, 영화 자동차,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게 이어졌고, 사람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빛과 속도에 열광했다. 모든게 이전 시대와는 급격히 달라지고 있었으며, 이런 시간과 공간 개념의 혼란은 내가 누구인지조차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시대로 이끌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선구자’라 인정했던 이탈리아의 화가 데 키리코 그림 (1912)에서는 이 혼란스러운 정경들이 꿈결처럼 담겨있다. 저기 멀리에서 기차가 들어온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사람들을 가득 실은 저 기차는 뽀얀 연기만큼이나 다채로울 꿈들을 안고 미래로 달려가는 ‘진보’의 표상이다. 그 속에서 (제목이 알려주듯) ‘시인’은 그저 그걸 바라보고 있다. 기이하게 왜곡되어 있는 소실점 없는 원근법적 공간 속에서 ‘그’는 ‘그냥’ 서 있다. 그가 시인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여기에는 시인이 느끼는 시간의 낯설음도 존재한다. 단조로운 파사드 위에 걸린 시계는 어렴풋이 정오의 시간대를 알려주는데, 정작 시인에게 비추고 있는 태양은 그보다는 뒤늦은, 아마도 곧 저녁이 될 시간을 가리킨다. 이 그림은 한낱 조그만 자극에도 쉽게 깨어버리는 얕은 꿈의 한 장면인가.

오히려 혼란스러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기계 시계가 발명된 14세기 이래 단일하고 공적인 시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세기말 표준시의 도입이었다. 과학적 관점에서나 군사적 관점에서 세계시간 도입을 주장하는 여러 논의들이 다수 있었으나, 세계 시간을 최초로 수립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철도회사들이었다. 1870년경 워싱턴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여행하는 사람이 통과하는 중소도시의 현지시간에 매번 시계를 새로 맞춘다면, 그는 200번도 넘게 맞추어야 했을 것이니 말이다. 1912년 푸앵카레 대통령의 주재 아래 표준방식을 제정한 프랑스는 1913년 마침내 에펠탑에서 전 세계를 향해 최초의 시보를 발신했다. 이로써 지역시간의 독립성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스티븐 컨,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스티븐 컨은 이러한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의 시차에 대해 ‘시계는 기억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라고 표현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도 이러한 낯선 시차가 등장한다. 화자인 마르셀의 사적인 시간은 불규칙한 속도로 흐르면서 다른 인물들의 사적인 시간으로부터 자꾸만 벗어나며, 그 어떤 표준 척도에 의한 계측도 거부한다.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1931)에서 축축 늘어진 시계 또한 매우 의도적으로 공식적인 ‘세계표준시’와는 다른 모습의 자신을 드러낸다. 최대한 느리게, 할 수 있는 만큼 늘어지게. 부푼 꿈을 안고 앞으로 달려가는 ‘진보적’ 이들이 ‘기억의 소리’를 잊어갈 때, 이들은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그 ‘기억의 순간’을 애써 놓치지 않으려한다. 사실 이들이 바라보는 건 기차가 아니라 ‘시간’이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언젠가는 그 기차도 멈추어 모든 것이 사라져 갈테니까.

이렇게 보면 속도에 열광하는 시대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건 사막 한 가운데 나른하게 매달려 있는 걸쭉한 놈이나, 턱을 괴고 앉아 이상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여성, 혹은 하릴없이 서 있는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지금 최선을 다해 사회적 모더니티가 빠른 속도로 일소해 버리는 가치들에 대해 다시 ‘기억’을 지속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들에게 ‘권태’는 치명적인 악마의 유혹이 아니라 신이 내린 최고의 은총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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