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김진숙과 ‘잡년’ 그리고 ‘잡놈’들

- Beilang(동아시아사상사연구자, 뉴욕이타카)

1

김진숙의 ‘고공투쟁’이 무려 200일을 넘어섰다. 시작은 대책 없는 싸움이었다. 그의 뜻을 잇는다는 ‘김주익’이 그가 김진숙에 앞서 같은 싸움을 짧지 않은 기간(129일) 해왔음에도, 그리고 그의 비극적 죽음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와 저 세상 길을 같이한 ‘박창수’ 그리고 ‘곽재규’가 최근까지 낯선 이름이었다는데서 그 싸움의 대책없음과 그 대책없는 싸움을 기꺼이 이어받은 김진숙의 결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보도에 의하면 김진숙은 얼마 전까지도 유쾌함과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싸움이 내포한 무거움, 비장함은 감추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싸움과는 다른 경쾌한 싸움이 세계 여러 곳에서 진행 중이다. 이름도 방자하기 짝이 없는 ‘SlutWalk’. 올해 초 캐나다 토론토의 한 경찰이 대학 강연에서 여학생들에게 성범죄 방지를 위해 ‘헤픈 여자’(slut)들처럼 옷을 입지 말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에 발끈한 여성들이 토론토에서 ‘헤픈 여자’ 옷차림으로 행진하는 행사를 시작했다. 이 행사가 캐나다에 이어 미국, 유럽 그리고 호주, 남미, 인도의 주요 도시로 퍼져가고 있는데 최근 서울 도심에서도 ‘잡년 행진’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졌다.

‘시위’라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워 보이는 이 행사는 가벼운 외양과는 달리 갖는 함의가 작지 않다.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노출시키는 도발을 감행함으로써 남성들의 시선에 수동적으로만 노출되었던 자신들의 몸을 그 ‘바라봄’이 내포한 권력 관계(시선의 정치학)에 도전하는 적극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고 이 노출 행위를 통해 ‘헤픈 여자’라는 가부장적 질서를 반영하는 말의 부정적 힘을 무장해제하고 나아가 그 의미를 재구성하여 언어 속에 스며든 권력관계에 도전(언어의 정치학)하는 의미있는 퍼포먼스다.

한국 사회에서 ‘slut’같은 말 자체가 폭력이 되는 낙인찍는 말이 적지 않다. 아마 ‘빨갱이’가 목록의 맨 처음을 차지할 것이고 이것이 진화한 ‘(친북)좌파’, ‘종북주의(자)’, ‘사회주의(자)’ 등과 ‘반시장주의(자)’, ‘사상검증’을 위시해 최근에는 ‘포퓰리즘’ 등의 말들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들에 해당하는 영어가 미국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하며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의 수구세력이 저열한 매카시의 후예들임을 드러내는 증표다.) 진보세력은 이런 ‘언어 재구성’에 맞서 최근 김여진의 “날나리 외부세력”이라는 유쾌한 비틀기를 제외하면 ‘수구꼴통’ 하나로 근근이 대항하고 있는 형국이다. 붉은 악마들처럼 빨간 옷 입고 ‘빨갱이 행진’이라도 한번 해야 할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김진숙의 처절한 싸움에도 낙인찍기는 예외 없이 일어난다. “외부세력”이라는 말이 등장하더니 마침내 대한민국 최강 조폭 ‘청기와파’까지 여기에 가세했다 한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를 표시하러 자발적으로 ‘희망버스’를 탄 갑남을녀를 그리고 당연한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는 야당 정치인들을 ‘외부세력’이라는 음습한 함의를 가진 말로 지칭하지 못해 안달일까? ‘외부세력’ 운운하는 자들이야말로 ‘외부세력’에 빌 불어 살지 않나? 대기업은 사회의 권력구조 전체가 그들을 후원하는 스폰서-외부세력 아니던가? 뇌물 주고 자리 주고 술 사주고 여자 대주고 해서 만든. 그 더러운 ‘조폭무리’들과 짝짜꿍하며 온갖 비리와 탈법을 저지르며 장사해오지 않았던가? (‘장사치’도 못되는 ‘양아치’들이 감히 ‘선한 이들의 약자를 향한 연대’를 두고 외부세력 운운하다니! 썩을 놈들!)

이렇게 ‘언어의 정치학’이라는 지점에서 김진숙과 ‘헤픈 여자’들은 만난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잡년 행진’은 전경이나 용역이 참가자들을 포위하지도, 경찰이 최루액과 물대포를 쏘거나 방패와 곤봉을 휘둘러대지도 않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들이 겪는 고통과 모욕이 결코 여성들에 못지 않음에도 ‘잡년 행진’처럼 쉽사리 널리 퍼져가지 못하고 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물론 이 두 시위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전자가 대기업이라는 거대조폭과 그들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다른 거대조폭들을 상대로 한 노동자들의 비장한 생존투쟁이라면 후자는 성폭력이라는 심각한 범죄가 주제이기는 하지만 공격대상을 명확히 설정한 치열한 싸움이라기보다는 여성들의 자유로운 자기표현과 연대의 축제 내지는 주목끌기 이벤트에 가깝다. 아마도 더 적절한 설명은 전자가 ‘자본’에 맞짱뜨는 반자본적 싸움이라면 후자는 자본친화적 요소가 많은 운동이라는 점일 것이다. 아무리 급진적 주장일지라도 그것이 자본에 근본적 도전을 던지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자본은 그 주장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무장해제 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여성운동이든 환경운동이든 소수자 운동이든.

사회의 ‘외부’에 놓였던 “헤픈 년”들은 여성의 몸의 상품화를 통해 주류 자본에 편입되어 대중문화의 중심에 놓인 지 오래다. 젊은 여성의 성적으로 어필하는 몸과 몸의 이미지는 이미 철저히 자본의 기획에 의해 생산, 조작되어 유통,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자기표현’이란 이름아래 행해지는 ‘잡년 행진’의 참가자들 몸에는 이미 어느 정도 자본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그리고 ‘자기표현’ 이면에 놓인 여성의 ‘욕망’ 그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적 배치 아래 놓여진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SlutWalk의 성공에는 그것이 미디어 친화적 행사라는 요인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야하게 차려 입은 여성들이 한둘도 아니고 떼거지로 모여 행진을 하니 ‘볼거리’와 ‘명분’을 동시에 제공하는, 언론에게는 아주 좋은 기삿거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잡년 행진’ 참가자의 몸과 패션모델의 몸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을 수도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무슬림 여성의 니캅 착용을 금지했거나 하려는 것을 풍자하는 런던 집회의 참가자들.

런던 집회의 장애인 참가자들 장애인 복지와 섹슈엘리티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hoffman.photoshelter.com)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여성들 사이에서 이미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고, 시위가 성폭행 피해 여성은 물론 남성, 성매매 여성, 장애인 그리고 성적 소수자 등과 연대하는 열린 운동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촛불 집회’를 연상케 하는 경쾌함과 자발성, 탈중심성 등은 과거의 운동과 차별되는 새로운 운동방식으로 주목받을 만하다. 그리고 자본이 억압하지 않는 운동이라고 해서 그것이 가진 자본에 근본적 도전을 던질 가능성을 미리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지점은 여성운동이 종종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에 친화적인 근대 사상의 언어와 논리를 빌어 여성의 권리를 정당화하는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범죄는 여성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사유물’인 몸을 타인이 함부로 다시 말해 정당한 ‘동의’에 기초한 ‘계약’을 맺지 않고 손대는 행위로 ‘개인’의 ‘권리’와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사유재산 침해). 낙태를 정당화하는 방식도 개인의 사유물(몸) 안에 있는 또 다른 사유물(태아)에 대한 공권력의 부당한 간섭 (사유재산 처분의 자유 박탈) 내지는 여성의 자궁이라는 ‘사적’ 공간에 대한 지나친 개입 (프라이버시 침해)이라는 논리에 주로 의존한다.

여성주의 운동의 주요 아젠더의 하나가 여성해방은 여성의 몸의 해방, 즉 몸의 통제권, 자율권 획득에서 시작한다는 것인데 이 ‘자율’의 논리와 자본주의 ‘사유’의 논리는 이 경우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사유재산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로크(John Locke)의 논리적 출발점이 바로 인간의 ‘몸’이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 ‘소유물’이라는 가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몸이라는 사유물에서 파생된 ‘노동’과 그 노동의 결과물도 몸의 연장으로 ‘사유재산’이 된다는 로크의 자본주의의 사유논리가 ‘노동자의 몸’에 적용될 때 어떤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지는 수많은 김진숙들이 삶으로, 온 몸으로 증언하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잡년 행진’의 열기와 수많은 참가 여성들의 발언을 보면 우리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이상화하는 소위 “선진국”의 여성도 한국의 여성이 경험하는 온갖 억압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한국보다 훨씬 먼저 여성 해방운동을 시작했고 그에 맞춰 많은 법제와 교육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사회적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는 나라의 여성들도 여전히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미국의 어느 유명한 여성 비즈니스 컨설턴트가 자신의 블로그에 “회사에서 성추행 당해도 절대 신고하지 마라. 아주 심각하고 명백한 증거가 있지 않는 한 가해자는 처벌 받지도 않고 여자 앞길만 막힌다”고 여성들에게 조언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런던 집회의 참가자의 몸 소유권 선언. (hoffman.photoshelter.com)

보스턴의 ‘잡년 행진’에 등장한 구호. ( 2011.5.09.)

“내 소유물인 내 몸에 손 대지마!”식의 접근으로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여성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동원하는 논리가 실은 여성의 몸을 보호하기는커녕 어떤 인간의 몸도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는 (물론 “정당한 계약”을 통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지만) 길을 활짝 열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재벌 2세가 연배가 위인 노동자를 야구방망이로 폭행하고 했다는 “맷값”을 지불하고 때린 것이라는 황당한 얘기가 실은 자본주의의 핵심논리 아닌가. 엄청난 사회적 비난을 받았고 법적 처분을 받긴 했지만 만약 지금 어떤 노동자에게 그런 더러운 돈이라도 받아야 살릴 수 있는 자식이 있다면 “내 몸에 손 대지마”하고 저항할까 아니면 “내 몸을 어떻게 해도 좋으니 제발 자식 좀 살려 달라”고 애걸할까?

제 한 몸뚱이를 사유의 기본단위로 절대화할 때 남는 것은 결국 그 몸뚱이를 팔아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외롭고 무기력한 ‘개인’들 뿐이며 이 비참한 개인들의 모습이 실은 현재를 살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 삶의 실상인 것이다. 그 재벌 2세를 향한 엄청난 분노는 실은 우리 모두가 ‘맷값’과 그리 다를 바 없는 ‘몸매매’를 통한 ‘몸값’으로 연명하고 있는 현실을 새삼 일깨우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잡년” “잡놈”이고 ‘잡년 행진’은 이 비참한 현실의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3

김진숙의 고공시위도 실은 자본주의적 배치 안에 놓여진 ‘몸’으로 하는 투쟁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가진 것 없어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몸 하나를 유일한 생존수단으로 삼아 헐떡거리며 살아온 그녀가 다시 그 유일한 생존수단이자 자신의 통제에 놓여있는 유일한 소유물인 ‘몸’을 고공 크레인에 올려 싸우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그것 외엔 다른 아무런 ‘가진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잡년’들의 벗은 몸이 그 자유로운 외양과는 달리 이미 자본이 스며들어 각인된 것으로 인식되는 것과는 반대로 김진숙의 몸은 나에겐 “날생명”으로서의 몸-“날몸”으로 다가온다. 날 것이 지닌 위태로움과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 김진숙은 고공투쟁을 시작하며 “여기 또 한 마리의 파리 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라고 했다 한다. 대책 없이 주먹질, 발길질에 노출되고 온갖 억압과 통제가 그 위에 고스란히 새겨지는 나약한 몸. 그러나 그 몸은 수많은 다른 ‘날몸’들과의 연대를 포기하지 않고 “승리와 부활”을 꿈꾸는 저항의 몸, 저항을 넘어선 희망의 몸이기도 하다.

김진숙은 자본이 원하는 분리되고 해체되어 버린 몸, 자본 앞에 공손히 무릎 꿇은 무력한 ‘개인’이기를 거부하며 자본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며 ‘희망버스’는 그 도전의 정당성과 도전이 주는 희망을 확인하고자 하는 몸의 연대인 것이다. 김진숙과 희망버스를 가로막고 있는 차벽, 전경벽, 용역벽은 이 연대, 이 ‘몸들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어두운 힘들의 가시화다.

오른 것은 김진숙이지만 그녀를 내려오게 하는 것은 아래에 있는 우리들 몫인 것 같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김진숙’이라는 이름이 제 몸뚱이 하나 외엔 가진 것이 없는 한 ‘개인’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일이 아닐까? 김진숙에게 ‘김진숙’이 한 개인을 넘어서 한국 근대의 반세기를 증언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그 험한 세월이 우리 모두를 자본의 비굴한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자본과 싸우고 연대를 이루며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주체’가 되고자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루쉰이 말한 “희망의 길”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 지는 것 아닐까?

그녀가 두 주먹 불끈 쥔 두 팔을 하늘 높이 올리고 환한 웃음으로 우리들 사는 곳으로 내려오기를 고대한다. 그렇게 우리의 몸과 만나기를 기대한다. 그녀의 두툼하고 거친 몸을 한번 꼬옥 안아보고 싶다.

응답 2개

  1. cman말하길

    꼭!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의무이자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김진숙님의 무사 귀환(?-도대체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이런 주제로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자 악 그 자체 입니다)은 그 어떤 명분이나 이유 없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 Beilang말하길

      ‘명분’이나 ‘이유’가 필요 없다는 cman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치면 이유불문하고 이해관계를 떠나 다가가 “왜 그러냐”고 “같이 어떻게 해결책을 마련해 보자”고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 도리일진데 이 도리를 헌신짝 취급하는 무리들이 있군요. 제가 그들을 ‘깡패’ ‘양아치’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