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청천 벽력을 계기 삼아

- 김융희

금년 장마는 예년에 비해 매우 빨리 왔었다. 이른 장마는 농삿 일에 피해가 더 크다. 농작물이 파종을 해서 어린 싻이 성장을 시작하기도 전에 짖궂은 장마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비닐하우스에 비해, 노지 농사는 직접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 상추 쑥갓 무 배추등, 금년 채소 농사는 비로 인한 잡초 속에 녹아 없어져 버렸다. 녹아 문드러진 토마토나무에 방울저 매달린 열매가 처참하다. 그러나 지금 오이 호박과 가지 고추가 무사히 자라고 있으며, 조금 있으면 심을 가을 배추와 무가 잘 자라 주기를 기대해야 겠다.

요즘이 여름 농사의 고비이다. 짖궂은 장마를 오히려 즐기면서 무성하게 자란 잡초는 조금 부드러운 지금 잡아야 한다. 그냥 내버려 두면 완전 정착한 단단한 뿌리가 잘 뽑히지를 않는다. 그런데 그동안 먹음직스럽게 자라고 있던 여름배추가 잡초에 싸여 힘을 못쓰고 있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온통 벌레들의 범벅이다. 지금 뽑지 않으면 완전히 벌레들의 차지가 되고 말겠다. 풀매기 작업을 미루고 배추를 대충 걷웠다. 꽃무리가 한창인 아욱의 누르스럼한 잎사귀를 따고, 잡초속에 건재한 비름잎을 뜯었다. 요즘은 비름나물이 효자 찬이다

여름 야채는 시간을 다퉈 상한다. 벌써 점심때가 훌쩍 넘었다. 빨리 포장을 해서 몇 집에 나눠 주어야겠는데 종류도 공간도 많이 미흡하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고추를 땃다. 다른 챙길 수 있는 것들을 챙겨 모으다 보니 마음은 바쁜데 벌써 택배 마감시간이 임박했다. 서둘러서 겨우 마감 직전에 우체국의 택배를 마치고 나니 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몽롱하다. 아무래도 너무 바삐 서둘며 보낸 불실한 포장의 염려로 계속 마음이 쓰인다. 어떻게 포장을 했으며, 누구에게 보냈는지도 가물하다.

그러고 이틀이 지났다. 연락도 없이 큰 며누리가 불쑥 집에 왔다. 예정도 없었는데, 이어 작은 며누리도 왔다. 약간 주저 주저하는 모습 말고는 특별한 말도 없다. 사소한 말들을 듬성 건네면서 가끔씩 나의 행동을 살핀 듯 싶다. 평소답지 않는 행동들이다. 뚜렸한 일도 그 어떤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그들이 행동거지도 어색해 보여 나를 궁금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른다.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애써 관심밖에 두고 내 평상을 지켰다. 그러나 내심은 그들의 의중을 더듬으며 눈치를 살폈다.

한 참 후이다. 드디어 그들이 속내를 터서 이실직고를 한다. 아직도 의중 모색을 못하고 있는 나에게 큰 며누리가 자초지종을 늘어 놓은다. 나의 거동을 살피려 부랴 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번 택배를 받아보면서 였다. 아가씨(나의 딸)에게서 갑자기 그들에게 전화가 왔단다. 이번 보낸 택배의 포장과 내용물을 보면서 너무 황당했던 것이다. 평소의 아버지가 전혀 아니라며, 아버지가 치매기가 있는 것 아니냐면서, 그동안 잘 살피지 않는 며누리짖에 불평하더란다. 당장 아버지께 다녀오라는 당부로 달려왔다는 청천 벽력이었다.

웃어야 할지, 아님 화를 내야 할지, 참 황당무계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전혀 그들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나의 칠칠찮는 배려와 경솔의 탓이였다. 택배 포장을 그리 험하게 하여 아무렇치도 않게 남에게 보내는 나의 짖거리가 딸의 입장에서는 그런 오해의 빌미가 되겠다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치매란 나이도 나이려니와, 어느 날 예고없이 불쑥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랴, 늙은이의 망령됨을 잘 해아리라며, 민망해하는 며누리들을 겨우 보내고 나니, 또 아내에게서 ‘제발 체통을 지키라’는 일갈이었다.

나의 소중한 하루를 꼬박 바쳐 챙긴 일이 너무도 어이없는 결과를 맞았다. 좋은 일이려니 싶어 무더위에 땀 흘리며 죽도록 내 품을 들였는데, 좀 억울하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좋은 일이라도 과정이 불실하면 결과 역시 따라 타격을 입는 것이 세상사 이거늘…

앞으로는 매사 좀더 심중한 배려와 지성으로, 가족들의 염려와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않아야겠다. 그리고 과정과 결과를 아우르는 배려도 반드시 지키는 계기로 삼아야겠다. 정말 치매만은 아니기를 바라려면 정신을 바짝차리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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