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이명박 함수와의 싸움

- 윤여일(수유너머R)

1.

노르웨이 연쇄테러 용의자인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테러를 감행하기 직전 인터넷에 1518쪽 분량의 선언문 <2083: 유럽 독립 선언(2083:A Europ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올렸습니다.

선언문의 1천407쪽에 이명박 대통령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트위터를 통해 돌아다닌 모양입니다. 브레이비크는 “생존 인물 가운데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교황과 블라디미르 푸틴”을 꼽은 다음, “만나고 싶은 다른 인물은?”이라고 스스로 물은 뒤 안데르스 포그 라스무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 헤르트 빌더스 네덜란드 자유당 당수, 라도반 카라지치 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 아소 다로 전 일본 총리와 함께 이명박 대통령을 적시했다고 합니다.

기사를 보면 각 인물과 만나고 싶은 이유도 찾아볼 수 있는데,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무슬림에 대한 인종청소를 자행한 카라지치에 대해서는 “내가 연구한 바로는 그는 대량학살자도 인종주의자도 아니며, 보스니아계와 알바니아계도 세르비아계를 대상으로 수 십년 동안 대량학살을 자행해왔다”면서 “이 같은 전쟁은 이슬람 성전(지하드)의 가장 파괴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이자 우리가 지금 서유럽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무슬림 증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네덜란드 자유당의 당수인 빌더스도 반이민, 반이슬람의 기치를 내건 극우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이명박 대통령이 이런 인물들과 동렬에 놓여 있다니, 또 한 번 웃을 일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등장한 후 분노할 일도, 웃을 일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웃어봐도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비웃는 웃음의 맛은 쓴 것이며, 그렇게 비아냥거릴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등장 이후 사회에는 희생을 늘어갑니다. 희생이 생기고 쌓일 때마다 잊지 않으려고 그 목록을 기록해두며 긴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목록은 기억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해버린 지 오래입니다. 분노는 이제 혐오에 가까운 감정으로 점차 변질되고 있습니다. 분노해야 할 대상에도, 그렇게 무력하게 분노하고 있을 뿐인 자신에게도 싫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대체 그 분노는 무엇을 향해 형체를 이루는 것일까요.

텔레비전을 보면 오늘은 어제와 또 다른 사건과 희생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닥없는 심연이며, 거기에 계속 노출되는 것은 엄청난 정신적 소모입니다. 그 결과 신물 날만큼 보고 있노라면 서서히 보이지 않게 됩니다. 연일 사건의 다발이 투하되니 각각의 사건에 상념하고 있을 정신적 여유는 없습니다.

만약 분노가 쌓여 응어리를 이룬다면 바깥으로 토해내기라도 하련만, 분노는 온양되기 전에 가라앉습니다. 쓰라린 사건도 일상적이 되면 비극성이 옅어지고, 매일 자잘하게 분노하고 비웃느라 분노는 휘발성이 짙어지고 형해화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등장한 이후 여러 희생이 이어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정신적 피로감을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뉴스를 통해 전달되는 거대한 희생의 물량 앞에서 무기력을 맛보고 이제 질리기조차 합니다. 피로감이 찾아옵니다. “또인가!”

그 피로는 비극적 사태를 막으려고 노력한 자의 피로가 아니라, 비극의 반복 속에서 질려버린 자의 피로입니다. 그 다음 수순은 식상함과 환멸이겠죠.

3.

브레이비크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기사를 보는 한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나오지 않나 봅니다. 브레이비크는 “가부장제 회복이 대안이며 일본이나 한국 모델이 해결책”이라면서 유럽이 일본과 한국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를 상찬했다고 하죠. 또한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세력이 급속히 커졌다”면서 “그런 한국에는 우리가 가진 문제(다문화로 인한 갈등)가 없다”고도 주장했다고 합니다.

결국 브레이비크가 이명박 대통령을 지목했다고 이명박 대통령을 비아냥거렸지만, 브레이비크가 보기에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적 가치’를 체현한 인물인 것입니다. 이것도 그냥 이명박 대통령을 그저 비웃고 있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저는 때로 극단적인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그는 사실 한 개인인 동시에 한국의 성장제일주의의 근대화가 낳은 한 가지 인간 군상으로 보입니다. 혹은 한국인이 지닌 어떤 근성이나 감각이 집약되어 인격화된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인물이며, 그 전형성에서 우례 없는 인물이며, 그렇기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특별하다기보다 일반인의 감각이 속화된 평균치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명박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적인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감각인 것입니다.

혹은 어떤 함수라고 보고 싶습니다. 일단 ‘이명박 함수’라고 명명해 보겠습니다. 그 함수의 원리는 ‘A를 위해 B를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다양한 요소들은 고유한 의미를 잃고 이 일차방정식으로 환원됩니다. A의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은 경제성장(노골적으로 말해 돈잔치)이고, B의 자리에는 생태, 인권, 문화 등 현실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올라옵니다. 그리고는 경제값으로 매겨집니다. A에서 기대되는 수익이 크다면, B의 자리에는 무엇이 올라오건 희생될 수 있습니다.

4.

사실 ‘이명박 함수’라고 불렀지만, 저 함수는 이명박의 등장 이전부터 작동해 왔습니다. 지난 정권에도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투쟁, 한미FTA 반대투쟁, 비정규화 반대투쟁, 민영화 반대투쟁, 평택미군기지 투쟁, 천성산 투쟁 등이 있었고, 정부가 제공하는 ‘개발’과 ‘선진화’ 등의 설익은 선전들에 밀려 그 투쟁들은 대개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병박 함수는 이명박이 사라져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이명박적 감각은 한국의 현실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함수는 자기운동하면서 곳곳을 전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마리가 그렇고, 영도조선소의 크레인이 그렇고, 강정마을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4대강이 그렇습니다. 이미 이명박 함수는 4대강이 아니라 지류도 먹여 삼키고 있습니다. 어쩌면 어느 싸움의 현장이든 파고들면 우리는 같은 동학을 발견하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어느 싸움의 현장도 부분적이지 않고, 전체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내성천도 그렇습니다. 내성천은 한국에서 모래톱이 가장 발달한 하천이기에 ‘모래강’이라고 불립니다. 물길이 산과 산 사이를 수없이 휘돌아가며 생태계의 터전과 아름다운 절경을 이룹니다. 그러나 지금 내성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영주댐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댐이 완공되면 내성천의 중상류가 수몰돼 사라집니다.

영주댐 공사는 이명박 함수의 또 한 가지 버전입니다. ‘A를 위해 B를 희생시킨다’입니다. 그런데 B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은 자명하지만, A라고 떠벌려지는 개발이익은 대체 무엇인지가 모호합니다. 하천 생태계를 잃고, 낙동강의 콩팥을 잃고, 아름다운 풍경을 잃는 것은 분명한데, 도대체 무엇을 얻는 것인지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모호함이 이명박 함수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그 모호함이 기대심리를 낳아 도박판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도박판에 있는 사람이 이명박만은 아닙니다. 선수 주위에는 구경꾼이 몰려 있습니다. 이명박에게 판돈을 대준 사람들입니다. 도박판에서 문화, 생태, 인권과 같은 가치들을 도박꾼에게 판돈으로 챙겨준 사람들입니다. 혈안이 된 채 도박판을 에워싸고 있는 자들이 이명박을 등장시켰으며, 제2의 이명박을 등장시킬 것입니다. 그 수는 적지 않고, 이명박적 감각은 한국 사회에 깊이 새겨져 있고 만연해 있기 때문에 황당한 4대강 사업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박판을 걷어치워야 합니다. 어느 곳에서든 그 도박판을 걷어치우기 위한 싸움을 시작될 수 있고,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한 곳인 내성천에서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내성천에서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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