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와 떠난 여행

9화-닥터 제페토

- 배문희

자전거 가게 문을 열고 나온 후 다른 자전거 가게를 둘러 보았지만 모두들 풀여치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떤 곳에서는 그런 고물을 고치느니 차라리 엿을 바꿔 먹으라는 말까지 들었다.

카페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풀여치와 나는 긴 그림자를 이끌며 터벅터벅 걸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석양은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려는 듯 온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며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풀여치는 쏟아지는 햇살을 은빛 페달로 다릉다릉 굴리며 노래를 불렀다.

“지금 노래가 나오냐. 가는 곳마다 우리 보고 구제불능이라고 난리들인데.”

“그런가? 하지만 햇살이 정말 아름답잖아. 날씨도 딱 좋고.”

“좋겠네. 자전거들은 원래 그렇게 낙천적인가?”

“너무 걱정하지마. 모모. 잘 될거야.”

“정말 그럴까?”

“아까부터 곰곰 생각해봤는데… 어쩌면 내가 고물이라서 다행일 수도 있어.”

“고물이라서 다행이라니… 그건 좀 억지다.”

“아까 보석이 박힌 자전거 기억 나?”

“응응.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정말 멋지더라. 조각이 새겨진 자전거는 또 어떻구. 페달을 밟을 때마다 오르골 소리가 나는 자전거도 있었지. 내가 아는 풀모 성에 모 여치라던가 하는 자전거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더이다.”
“그런데 말야. 모모. 그런 멋진 자전거에 무거운 짐을 실을 수 있을까? 게다가 어리버리한 모모까지 태우고 말이야.”

“말도 안돼. 그런 고귀한 자전거에 어떻게 짐을 실어? 그리고 하찮은 내가 어찌 그 자전거 위에 탈 수 있단 말이오.”

“내 말이 그거야. 그리고 기어가 36단이나 되는 비싼 자전거 기억 나?”

“알아. 아까 아저씨가 골라준 거. 근데 그거 타면 정말 빠르긴 하겠지?”

“그래. 하지만 그걸 타고 어디든 맘대로 갈 수 있을까? 어디다가 자전거를 매놓고 화장실에 갈 때는 어떡하지? 요즘엔 전문적으로 자전거를 훔쳐가는 일당들도 있다.”

“으. 불안해서 화장실 한번 가겠냐.”

“그렇지?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내가 고물이라서 다행일 수도 있단 얘기지. 내 등 위엔 어떤 짐이든 실을 수 있고 어디든 안심하고 매놓을 수 있을 테니까. 넌 짐을 덜 수 있고 좀 더 자유로워질 거야.”

“ㅎㅎ 듣고 보니 그러네. 하찮아서 고맙다. 친구야.”

“그들은 자전거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으스대지만 실은 자전거를 타고 여행해본 적은 한번도 없을 거야. 그들은 자전거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 자전거란 오로지 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테지. 그래서 자전거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잔뜩 겁을 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하찮은 자전거를 탔다간 큰 사고를 당할 것이다. 어쩌면 죽을 지도 모른다. 이 정도 가격은 치러야 안심하고 자전거를 탈 수 있다’고 말이야.”

“맞아. 아까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을 땐 정말로 겁이 덜컥 났었거든. 다른 사람 같았으면 겁에 질려서 얼른 새 자전거를 샀을 거야.”

“그래. 오늘은 조금 속상한 일이 있긴 했지만 기분이 좋다. 의리 있는 친구도 있고 내 그림자도 예뻐서.”

정말이었다. 풀여치가 바퀴를 굴릴 때마다 가느다란 바퀴살들이 길 위에 펼쳐지며 아름다운 레이스 무늬를 만들었다. 레이스가 꼬아졌다 풀어졌다하며 무늬를 바꿀 때마다 하르르 하르르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옆에서 걷고 있는 내 그림자는 바구니에 산딸기를 담고 가는 양치기 소녀 같았다. 우리는 기다란 그림자를 이리저리 늘렸다 괴상한 모양을 만들었다 하며 하하하 웃었다. 그렇게 놀다보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카페로 가는 지름길을 찾다가 숲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숲 저편에서 은박지 같은 것이 반짝이는 것이 아닌가.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은박지는 점점 더 크고 넙적해졌다. 우리는 카페로 돌아가는 것을 제쳐두고 은박지가 보이는 곳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손바닥만했던 은박지는 비행접시만큼 부풀었다가 조그마한 언덕을 넘자 수수께끼를 온전히 드러냈다.

“우와. 숲 속에 이런 호수가 있었네.”

“여기였구나. 이곳에 호수가 있다는 얘기를 어른들한테 들은 적이 있거든.”

호수는 크기는 작았지만 수심은 꽤 깊은지 가운데 부분은 짙은 녹색을 띄고 있었다. 수면은 고요했지만 그 속에 있는 것들을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듯 햇살을 알알이 튕겨내며 은빛으로 반짝였다. 호수 주변에는 허름한 낚시 가게와 쪼꼬만 구멍가게, 그리고 동동주집 같은 것이 오종종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과 약간 거리를 둔 곳에 괴상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집 전체가 조그마한 나무판자로 엮어진 집이었는데 얼핏 보면 집이라기보다 커다란 새둥지처럼 보였다. 회오리바람이 불면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집이었다. 얼기설기 엮어진 나무판자의 꼭대기에는 ‘닥터 제페토’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무엇이든 고쳐 드립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누구라도 그 글귀를 보면 ‘자기 집부터 먼저 고치시지’라는 생각이 들 거라는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이 괴상한 집에 강하게 끌렸다. 이 곳에서라면 풀여치를 꼭 고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오… 자전거 고치러 왔어요오…”

어디가 문인지도 알 수 없어 집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나무판(아마도 문인 것 같다)이 열리며 머리가 덥수룩한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10화에서 계속)

응답 1개

  1. 나무야말하길

    그림에 묘한 매력이 있네^^
    자꾸만 상상에 빠저드네요

    닥터 제페토에 가서 내 인생도 고치고 싶다.
    작가님 글도 잼있고 그림도 정말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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