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미국의 민주주의

- 고병권(수유너머R)

1. 미국, 2011년

모두 잘 아시겠지만 지난 주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한도를 늘리는 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협상 타결은 그다지 놀라운 게 아니었습니다. 국가 부도를 낼 수는 없으니까요. 정작 놀라운 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그 골인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협상이 그토록 지지부진하고 지저분할 수 있었느냐는 겁니다. 협상결과에 환호하는 미국인은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부도 사태를 하루 앞두고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오히려 욕설을 퍼붓거나 냉소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협상 타결 직후 <뉴욕타임즈>에서 여론 조사를 했는데 무려 80%가 넘는 미국인들이 정치권에 대한 강한 불신을 표출했습니다. 이 수치는 한동안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라는 해설도 붙어 있었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합의 도출에 성공했는데 국민들의 80%는 거기에 분노합니다.

게다가 불과 며칠이 되지 않아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 푸어스>가 미국 신용등급을 한 단계 낮추어버렸습니다. 대규모 경기후퇴를 의미하는 ‘R’이나 ‘D’가 공공연하게 언급되는 시점에서, 경기를 확장시킬 재정적 수단이 상실되었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금리는 이미 낮을 대로 낮아서 통화주의적 처방이 불가능했는데, 연방 정부의 대규모 재정적자에 추가 재정삭감이 결정되었으니 케인즈주의도 안되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미국 경제에 출구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 셈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시골에 살고 있는 저의 완전히 제한된 관찰에 기초해 보면, 이 심각성이 미국민들에게 충분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신용등급 저하를 위험신호로 받아들이기보다 일종의 ‘수치’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정치적 공방도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나’, ‘누구 책임인가’에 맞춰진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고 위험한가’를 말하는 사람이 너무 적습니다. 지난 번 연방정부 예산 통과를 지연시켜 정부의 일시적 ‘셧다운’을 초래한 공화당과 티파티 진영은 이번에도 당파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국가부도의 위험을 게임의 지렛대로 삼았습니다. 닥친 위험은 큰데 추구하는 이익은 정말 협소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협소한 이익투쟁의 당사자들이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의 운명을 크게 흔든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양당간의 초당파적 협력을 뜻하는 ‘바이파티즌쉽(bipartisanship)’은 오랫동안 미국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는 중요한 장치로 받아들여졌고,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에게는 대의제의 중요한 모델처럼 간주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파티즌쉽’, 더 나아가 양당제의 공고화가 새로운 목소리의 정치적 표출을 가로막는 장치가 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효과적으로 제압했던 기구가 이제는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한 인식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고, 무엇보다 대중과 현실에 대한 인식 자체를 저해함으로써, 스스로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이 큰 위험에 빠졌다는 걸 가장 모르는 사람들은 미국인인 것 같습니다. 순전히 주관적인 관찰이지만요.

2. 미국, 1831년

1831년 프랑스의 한 젊은이가 교도소 등의 행형시설을 참관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미국에 머문 시간은 2년이 채 못 됩니다. 그리고 나서 미국 정치에 대한 긴 보고서 하나를 출판했죠. 그 젊은이 이름은 알렉시스 드 토크빌, 그가 펴낸 보고서 이름이 바로 <미국의 민주주의> 입니다. 작년에 이 책을 꼼꼼히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요. 토크빌의 섬세한 눈에 정말 감탄했습니다. 여러 곳에서 흥미로운 주장들을 발견했는데요, 그 중에 유독 제 눈을 끄는 절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던 우호적인 조건들을 나열한 대목입니다. 그는 크게 세 가지 조건을 들었는데요. 하나는 미국에는 이웃나라들이 없다는 겁니다. 미국은 자연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서 이웃나라의 반동적 간섭을 받지 않았다는 거죠. 둘째 조건은 미국에는 대도시가 없다는 겁니다. 그에 따르면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갑작스럽고 격정에 휩싸여 결정을 내리는 흥분상태를 자주 경험합니다. 그래서 대도시가 있으면 대의제가 위험에 처하곤 한다는 거지요. 셋째는 미국인들, 특히 초기 이민이 문명화되고 민주주의에 친화적인 지역에서 왔다는 겁니다. 즉 초기 이민이 공화정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는 습관과 생활태도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왔다는 거지요.

제가 이 세 조건에 흥미를 느꼈던 것은 오늘날의 현실과 대비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미국은 이웃나라를 갖지 않은 독립된 나라일까. 글쎄요. 정반대가 되었지요. 어떤 나라도 이제 미국과 무관한 나라가 없으며, 미국은 모든 나라의 문제에 관여합니다. 단순히 관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20세기 들어 미국이 전쟁 중에 있지 않았던 해가 얼마나 될까 의심될 정도로, 모든 나라를 이웃으로 갖고 있습니다. 둘째, 미국에 대도시가 없을까요.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미국은 세계 최대의 도시들을 갖고 있습니다. 셋째, 이민은 어떨까요. 토크빌은 유감스러워할지 모르겠지만 미국에는 제3세계에서 들어온 이민들, 특히 남미 히스패닉계의 엄청난 사람들이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들어와 있습니다. 미등록이주자가 이미 천만 명을 넘어섰지요.

토크빌이 말한 미국 민주주의의 우호적 조건들은 사라진 셈입니다. 그럼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점차 불가능해지는 것일까요. 한편에서는 그런 것 같습니다. 토크빌이 보았던 근대 민주주의, 국민 민주주의는 토대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미국에서 다른 민주주의가 가능할까인데요. 아마도 그 가능성은 방금 말한 세 가지 새로운 조건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이 더 이상 떨어져 있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와 완전히 엮여 있는 나라라면, 세계의 상황이 곧바로 미국의 상황을 규정지을 테니까요. 현재 미국의 정치인들은 미국을 감당하기에도 너무 협소한 이해관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이제 미국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미국 민주주의는 세계의 상황에 의해 규정될 것 같습니다(이 점이 세계인들은 미국을 우려하는데, 미국인들은 정작 미국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현실과 대비를 이룹니다). 둘째 미국의 도시들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이 만들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미국의 대도시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대도시들이 비슷한 문제를 앉고 있습니다. 내이션이 경제적-사회적-인종적 균열에 의해 급격히 해체되는 곳이 현재의 도시가 아닌가 싶습니다(그래서 내셔널리즘과 인종주의가 반발의 형태로 강력히 부상하기도 하구요). 셋째 미국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인구의 이동과 구성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국은 이주자들의 나라라고 하지만, 새로운 이주자들에 의해 다시 위기를 맞을 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미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조건들이라고 말한 것들이 알고 보면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조건들이기도 합니다. 어제 영국 토튼햄에서 강력한 폭력 시위가 일어난 모양입니다만, 세계의 대도시들은 거의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노르웨이 총격 사건도 이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미국의 민주주의’가 끝나고 ‘세계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기술할 때가 오는 것 같습니다.

3. 역사 뒤, 남은 사람들

오랜만에 편집자의 말을 쓰니 너무 길어졌습니다. 이번호 표제는 ‘역사 뒤, 남은 사람들’입니다. 권보드래 선생님이 이번호부터 <위클리 수유너머> 학술면에 연재 해주실 코너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권보드래 선생님은 많은 분들이 아시듯, 수유너머의 공부와 살림을 이끄셨던 분 중의 한 분입니다. 지금은 고려대학교에 재직하고 계십니다. <한국근대소설의 기원>(2000), <연애의 시대>(2003) 등을 쓰셨고, 최근에는 몇몇 분과 함께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2008), <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2009) 등을 펴내셨습니다. 사실 저도 권보드래 선생님 글을 너무 오랜만에 접해서 많이 설렙니다. 선생님이야 꾸준히 글을 쓰셨겠지만, 제가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예전에는 동료로서 가까이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귀동냥할 기회라도 있었는데 그런 기회가 사라지니, 게으름이 곧바로 무지가 되고 맙니다. 제 기억에 선생님은 과거의 신문이나 잡지를 참 많이 읽으셨어요. 어찌 보면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들을 꼼꼼히 챙기셨는데, 거기서 선생님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것들을 길어내는지, 아마 이번호부터 독자여러분들이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번호에는 ‘강기덕’이라는 인물을 다룹니다. ‘3.1운동’이라는 사건에서는 부각된 인물인데, 역사에서는 빠져나간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권선생님은 이 인물의 행적을 뒤쫓으며, 역사를 관통하는 질문을 끌어냅니다. ‘인간은 어떻게 (불)변하는 것일까.’ 괜스레 제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앞으로의 연재가 정말 기대됩니다.

응답 1개

  1. […] 편집자말(78호)에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의 일부분을 인용하며 ‘미국의 민주주의’의 조건 변화에 대해 짧게 언급한 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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