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3․1의 영웅, 지역에서의 생애— 강기덕

- 권보드래

1919년 3월 5일은 3월 1일 못지않게 중요한 날이다. 3월 1일의 독립선언 및 군중시위에 이어, 사건의 귀추와 총독부의 대응을 가른 것은 5일의 학생시위였기 때문이다. 한 차례 시위로 꺼져버릴 듯도 했던 ‘만세운동’은 이 날을 계기로 다시 불붙었고, 주춤거리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총검을 동원한 무차별 진압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3월 5일, 남대문정거장은 아침 9시부터 학생들의 시위로 들끓기 시작했으며, 경찰 추산 3백, 참가자의 후일 회상으론 4·5천에까지 이르는 대열은 태극기와 붉은 천을 흔들며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선두에는 인력거 한 대가 달리고 거기 탄 학생 두 명이 지휘 역할을 맡았다.

“강기덕, 김원벽이 인력거를 타고 독립기를 세우며 수백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만세를 부르고 있었는가.” 이 말은 3월 5일의 시위 참가자를 대상으로 심문을 진행하면서 경찰이 거듭 들이댔던 질문이다. 보성전문의 강기덕과 연희전문의 김원벽. ‘민족대표 48인’이라고 할 때 그 명단에 끼는 두 사람은 실제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함으로써 1919년의 상황을 갈랐다. 요릿집에서 선언서를 낭독했던 ‘민족대표 33인’과는 달리 이들은 시내로의 진출을 요구했고, 국제적 개입을 기대했던 축과는 달리 대중의 궐기 자체를 중시하려 했다. 실상 애초에 고종 인산 즈음 시위를 계획했던 것은 학생들이 먼저였다고 전해진다.

강기덕과 김원벽이라는 이름 자체는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해방기에 함세덕이 「기미년 삼월 일일」이라는 희곡을 썼을 때도 둘은, 특히 강기덕은 중심인물이었다. 김원벽이 일찍 세상을 떴기에 ‘3·1 운동을 이끈 학생들’이라는 기억은 강기덕에로 집중되었던 것 같다. 김원벽이 약간의 문화운동 이력만을 남긴 반면 강기덕은 식민지시대 내내 원산지역 사회운동의 지도자 격으로 활약했다. 1930년대 중반의 신문기사는 강기덕을 원산 사회운동의 지도자, 원산노련의 중진이자 신간회 해소위원장으로 소개하면서 “옥중 왕래 7, 8차에 미쳐 그 방면의 최고 기록을 가진 분”이라 썼다. 강연 중 사회주의를 선전했다고, 기자연맹사건으로, ‘합방기념일’ 시위 기도로, 노동조합을 다시 조직하고 조합회관을 지키려다, 그리고 심문받던 중 스러진 젊은 죽음에 항의하느라— 강기덕은 3·1 운동 이후로도 한 해 걸러 한 번씩은 감옥 출입을 했다.

나이를 따지자면 1919년에 이미 서른 한 살짜리 늙은 학생이었는데 이렇듯 지속적인 활동력은 놀라울 정도다. 조로(早老)하는 조선 사회에서 강기덕은 예외적인 사례다. 줄곧 고향 원산에서 활동한 탓인지 강기덕은 한번도 ‘배후’로 퇴장하지 않았다. 원산노동조합 간부로 총파업을 주도했고, 공산당원 김철산이 옥중에서 거진 시체로 실려나왔을 때나 사회운동가 박휘병이 심문 중 갑자기 사망했을 때는 시위행렬 한가운데 있었다. 시신을 탈취해 종일 떠메고 다녔던 40대 중반의 강기덕은 또, 조합회관이 빚에 넘어갈 위기에서는 공갈죄로 기소되기도 했다. 압류권을 행사하고 있던 부호를 협박해 거액의 수표를 빼앗았다는 혐의였다. 어쩌면 ‘똘마니’ 급에서나 보일 행태다. ‘중앙’ 아닌 지역에서의 생애가 강기덕을 말 그대로의 ‘제 1선’에 계속 머물게 한 걸까.

일본 유학을 거쳐 전문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출세에의 의욕도 있었을 테고, 교육·문화·출판 등 열린 공간도 적지 않았으련만, 강기덕의 이름은 늘 현장에서 뒤숭숭한 소문과 함께 목격된다. 생계를 위해서였는지 신문지국을 경영하고 인쇄소를 운영하기도 한 강기덕은 다양한 활동 못지않게 다양한 관계도 몰고 다닌 것으로 보인다. 3·1 운동 후 근 3년 만에 출옥했을 때 “수백여명이나 되는” 친우들이 맞이한 것은 물론이고 1935년 석방됐을 때도 “백여명의 출영” 인파가 원산역을 에워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1945년까지 파시즘이 날로 격화되고 있던 시절에는 강기덕의 행보가 쉽게 목격되지 않는다. 그럴 만한 거물도 아니었다.

추적되지 않은 세월을 지나, 1945년 8월 15일, 제 2차대전이 종전되었을 때 강기덕의 나이는 육십이 가까웠다. 초대 원산시장을 지냈다. 식민지시절의 행보는 뚜렷이 사회주의적이건만, 해방 후에는 반탁 편에 섰다가 곧 월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년들이 몰려드는 서울에서 초로의 강기덕은 근로대중당에 합류하는 쪽을 선택했다. 돌연 탈당, 중도 우파로 분류되는 신흥우와 노선을 함께 한 것은 분단을 즈음한 1948년의 일이다. 1920~30년대 강기덕의 행보가 일종의 ‘전형성’ 속에서 읽히는 반면 해방기의 행적은 가파르고도 어지럽다. 항용 좌·우로 가르는 정치적 노선을 가늠할 때도 그렇거니와 1950년 재판 같은 경우에서도 그렇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강기덕은 함경남도 지사라는 일종의 허구적 자리에 임명되었는데, 그나마 한국전쟁 몇 달 전 독직 혐의로 기소된다. 허구적 허울에 마침맞게라는 셈인지 공문서를 위조했다는 죄목이었다. 1930년대에도 공갈죄로 기소된 바 있었지만 그때는 조합회관을 지킨다는 명목이 있었던 반면, 1950년의 강기덕에게는 선사할 만한 명분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밀무역 원조를 위해 공문서를 위조했다는 기소내용이 멋쩍게 남아 있을 뿐이다. 강기덕에 대해 남아 있는 마지막 기록은 전쟁 중 납북되었다는 소문이다. 3·1 운동 당시 서른 한 살의 강기덕, 1920~30년대 원산 지역 사회운동의 흔들림 없는 중추였던 강기덕은, 1940년대를 통해 무엇을 겪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실천했던 것일까. 3·1 운동과 1920~30년대는 어떻게 회억되고 평가되었을까. 젊은 시절 ‘뇌병’ 때문에 입원했었다니 필시 한구석 과민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을 이 ‘3·1 운동의 영웅’을 좇아가며 결국 또 궁금해진다. 인간은 어떻게 (불)변하는 것일까.

응답 3개

  1. 강귀현말하길

    전 이분과 7촌되는 사람입니다..저희 증조부와 4촌이니까, 6.25 이후 납북되셔서 잘은 모르지만 40년대에는 벌써 손자가 있으셨고 나이가 환갑이 넘으셨으니…힘들기도 했겠죠..인간적으로..근데 아마 더 찾아보시면 해방이후엔 남한에서 정치를 하시려고 노력한흔적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나라를 위해 노력하셨는데..이분 후손은 증손녀 2명을 끝으로 대가 끝이 났네요…글 잘봤습니다..

  2. tibayo85말하길

    역사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역사, 망각된 역사, 그래서 현재에도 도래하는 역사, 잘 읽었습니다. 인력거를 타고 독립기를 세우며 수백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만세를 부르는 강기덕의 이미지가 지금 여기,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3. 윤여일말하길

    보드래 선생님의 글을 앞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니 기뻐요.
    열심히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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