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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만필

나비야 청산가자.

- 김융희

어느덧 가을을 알리는 입추가 지나 곧 처서가 임박한다. 오늘도 태풍 ‘무이파’의 영향으로 강풍과 폭우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여름의 시작과 함께 장마가 계속되어 어언 가을의 문턱에 이르렀다. 장마는 끝났지만 비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쌀도 준다”는 속담이 있다. 처섯날 비가 내리면 흉년이 든다는 말이겠다. 이제는 제발 비가 끝났으면 싶다. 며칠이 지나면 처서다. 올 처서에 쨍쨍 햇빛을 기대한다.

처서를 기준으로 김장용 가을 채소를 심는다. 이제 무 배추등 가을 채소를 심기 위해선 정지를 서둘러야 할 때이다. 우중에 내내 제 세상을 맞은 듯 웃자란 잡풀들을 뽑아야 한다. 계속 내린 비로 지난 여름 채소는 모두 녹아 없어져, 그 여파로 지금 야채 수급에 많은 차질을 겪고 있다. 작년에 경험했던 배추 파동을 떠올리면, 올 가을 채소는 잘되야 할텐데… 행여 불실을 걱정하면서 풀메기를 하는데, 쏟아진 폭우로 더 이상 작업 진행이 어렵다.

여름동안 심어 가꾸었던 작물은 녹아 없어졌지만, 다행이도 잡초와 함께 자란 들깨와 비름등을 남겨서 보호했더니, 여름 식탁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동안 우리 집은 물론 이웃과도 넉넉하게 나눠 먹었다. 오늘도 잡풀을 메면서 이들을 가려 뽑고 보니 또한 그 양이 엄청나다. 손질에 엄두가 나지를 않는다. 들깻잎과 비름나물, 두 채소가 모두 맛과 질이 매우 좋와 귀한 찬인데, 버릴 수도 없고… 비는 억수로 쏟아지는데, 애물 단지를 바라보며 한숨만 짓는다.

지난 주엔 두 가정이 집에 와서 주말을 보내며 챙긴 찬거리를 싸들고 갔다. 매우 만족해 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좋왔다. 계륵(닭갈비)같은 애물을 보면서, 다 마련하여 차려논 밥상! 들어 옮기고 먹기만 하면 되는 것도 외면하는, 주위 사람들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잘 가꿔 마련해둔 것마저 챙기지 못한, 바쁜 삶을 사는 현대인들을 안타까워하는 이 노망의 억지려니! 그러나, 이것이 지금 나의 솔직한 심사이기에 그 심사가 더욱 불편하다.

지금도 도시의 거리를 하릴없이 해메고 있을 많은 노인들을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도 해본다. 저 거리에도 전철에도 해매며 떠도는 곳곳에 넘친 노인들, 그들의 대부분은 서울이 아닌 농촌에 거주했던,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자식들의 배려로 집도 버리고 고향을 떠나 늦게야 상경을 단행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다시 고향에 돌아가 비워둔 집을 지키며 살면 어쩔까. 버려진 공터를 경작하여 먹거리 채소와 같은 작물을 재배라도 할 수 있다면, 본인의 건강은 물론, 사회의 안정에도, 나라의 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모두에게 유익한 매우 바람직스러운 일이 될텐데…

나의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도 지금 버려둔 빈 집이 많다. 이런 현상이 전국 곳곳에 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벽촌인 내 고향은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고향을 들를 때마다 느끼는 마음 아픈 일이다. 자식들에게 얹혀 살면서 번잡한 도시 생활 보다는, 꼼지락거릴 건강만 허락한다면, 풀 메고 씨 뿌리고 작물 재배를 하면서 보내는 생활은 삶을 한결 보람되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나의 체험에 의한 분명한 증언이다. 노령의 동료들이여, 망설이지 말고 지금 비워둔 고향 집을 찾아 바로 떠나자. 다시 우리 동네의 집집들이 사람들로 채워지는 아름다운 마을, 행복의 삶터로 꾸며보자.

“살어리 살어리랏다.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서경별곡> <가시리>와 함께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실리어 전해 지는 고려가요이다. 가장 뛰어난 가락으로 알려진 옛 노래로, 지금도 많이 인용되어 쓰인 귀에 익은 가사이다. 도촌의 차이나 구별이 거의 없었던 때에 불리웠던 것으로, 지금처럼 현대 문명에 찌든 도시화로 전원이나 시골을 그리워하는 정서에서 불리워진 그런 가사가 아니다. 인간의 무상에서 나온 덧없는 심정을, 즉 현실 도피적 사상에서 읊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현대문명을 등져서도 안되지만, 문명에 매몰되어 숨막히는 삶 속에는 참살이의 기대가 어렵다. 특히 삶의 후반기를 살고 있는 노령에게는 절실하다. 머루 다래는 아니더라도 내 손수 기른 야채를 들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 바람직스런 삶일 것이다. 꿈을 갖고 사는 행복한 나비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자.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나비야 청산가자.

짖궂은 태풍 ‘무이파’의 통과로 요란하게 퍼붓는 창밖의 폭우를 바라보면서 스친 망상들이다. 이런 망상이 현실이 되어 줌도 좋겠다는 기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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