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법정&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 박정수(수유너머R)

8월 11일 쥐 그래피티 사건 항소심 공판이 있었습니다. 1심과 동일한 벌금형이 내려졌습니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쥐 그래피티가 형법 제 141조 1항 ‘공용서류 등 무효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항은 공무집행방해죄의 일환으로 G20 준비위원회가 제작한 홍보보스터 역시 공무소의 서류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산불예방포스터나 홍보짜라시에 낙서를 하거나 한 두 장 찢어도 선거포스터 훼손보다 무거운 징역 7년 이하, 벌금 1천만원 이하의 처벌을 받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공직선거법의 선거포스터 조항을 따로 둘 이유도 없어지거니와 정부관할 ‘건조물’ 등 기타 광장, 거리 등의 기능을 ‘훼손’하는 집회 및 시위도 이 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게 됩니다. 형법 141조가 공직선거법과 집시법, 나아가 헌법 21조(표현의 자유)를 무효화시킨 놀라운 판결에 입이 떡 벌어져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쥐그림 재판에서 가장 우려했던 바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발걸음이 무거워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물론, 그들은 또 다른 출구를 찾겠지만. 선고 다음 날 뱅크시의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를 보았습니다. 제목의 원래 의미(전시장 출구쪽에 꼭 선물가게가 있는, 예술의 상품화)와 무관하게 자꾸 ‘출구’란 단어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래는 ‘시네 21’에 보낸 글입니다.

캔버스 화가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보고 물감의 질과 붓 터치에 경탄하는데 반해, 그래피티 작가는 접근을 위해 사용한 사다리와 날렵한 도주솜씨에 감탄한다고 한다. 어떻게 접근했을까? 어떻게 도망쳤을까? 영화의 도입부, 거리예술가들의 기발한 작업과 날쌘 도주 장면을 보니, 작년 10월 31일 새벽 G20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리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도망쳤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거리예술가에게 문제는 항상 출구다. 경찰서 뒷문이든 선물가게를 거친 출구든, 어디로 튈지 찾는 것이 문제이다.

거리예술가들의 작업현장은 비밀스럽다. 티에리가 그 비밀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던 건, 뱅크시가 말했듯 그의 “믿기 힘든 의외성” 때문이다. ‘중요한 것’을 놓쳐선 안 된다는 강박으로 닥치는 대로 찍어대던 그는 사촌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만나 거리예술의 세계로 빠져든다. 거리예술가들과 함께 담을 넘고 도망치면서 그래피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결심한 티에리에게 뱅크시는 빈칸이었다. 가장 중요한 작가인 뱅크시를 만나길 고대하던 그는 마침내 LA에 온 뱅크시를 안내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티에리의 헌신성과 성실함에 신뢰를 갖게 된 뱅크시로는 예외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찍어도 좋다고 허락한다.

그리하여 나온 결정적 장면, LA 전시회 날 뱅크시는 거리예술을 또 하나의 ‘볼거리’로만 여기는 할리우드 관객들에게 채색한 코끼리 한 마리를 선물로 던지고, 티에리와 디즈니랜드로 가 관타나모수용소에 구금된 테러용의자의 모형을 설치한다. 이로써 한쪽에선 거리예술의 전복성마저 고가의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의 천국 미국을, 다른 한쪽에선 고문까지 아웃소싱 하는 경찰국가 미국의 본질을 폭로한다. 뱅크시는 도망치지만, 티에리는 ‘미키마우스 보안관’들에게 체포된다. FBI까지 동원된 4시간의 심문을 견디고 녹화테이프까지 건진 티에리를 보니, 쥐그림 사건 수사과정이 떠올랐다. 경찰서에서 몰래 휴대폰 문자를 지웠던 일, 촬영을 부탁받고 현장에 있다가 ‘공범’이 된 동료가 8시간 넘게 공안검찰의 수사를 견뎠던 일, 인형 하나에 FBI까지 동원되는 미국이나 쥐 그림 몇 장에 공안검찰까지 나선 한국이나 ‘참 두려운 게 많은’ 나라로구나 하는 생각.

미국에서 2010년에 개봉된 영화가 지금 국내 개봉하는 이유가 내 사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쥐 그림 사건과 뱅크시는 인연이 깊다. 쥐 그림 자체가 뱅크시의 쥐를 변형한 그림의 스텐실 작업이고, 재판정에서 뱅크시의 유명세와 시민사회의 승인을 말했다가 검사로부터 “뱅크시의 권위를 등에 업고 법 위에 예술을 놓으려 한다”는 호통을 듣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영국의 뱅크시 팬사이트가 징역형 구형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난 뱅크시보다 티에리에게 더 애정이 간다. 나도 티에리처럼 “뱅크시의 권위를 등에 업고” 거리예술을 흉내 내어 유명해진(?) 사람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영화후반 티에리의 ‘변절’이 내겐 다르게 보였다. 뱅크시는 자기 작품이 고가로 팔리는 걸 보고 티에리에게 “거리예술의 진실”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다큐멘터리 만들기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카메라를 든 정신병자에 가까운” 티에리가 만든 영상은 900개의 채널을 정신없이 돌려대는 것처럼 분열증적이었다. 뱅크시는 자신이 편집해보겠다며 필름을 넘겨받는 대신 티에리에겐 거리예술가로 데뷔할 것을 권한다. 그 후 짐작대로 티에리의 천박한 예술가 노릇과 기막힌 성공담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뱅크시가 티에리를 ‘벌거벗은 임금님’ 삼아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가 나오는 미술계의 상업성을 고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텍스트만 놓고 보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수행성을 고려하면 달리 보인다.

이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티에리로부터 필름을 넘겨받은 뱅크시는 감독이 되어 티에리를 찍기 시작한다. 티에리의 개인사, 주변인물, 우스꽝스런 전시회와 황당한 인터뷰 등. 이 과정을 티에리와 상의 없이 뱅크시 혼자 만들 수 있었을까? 카메라는 항상 보이는 것들로 그것의 생성과정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저 장면을 찍으려면 어디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그런 질문은 스펙타클에 빠져 망각된다. 경매장의 큰손들이 거리예술의 결과물만 보고 작가가 어떻게 경찰의 시선을 피해 움직였는지, 어떻게 법과 도덕과 정상성의 감옥으로부터 달아나는지를 보지 못하듯이.

화면 밖 티에리와 뱅크시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영화가 페이크다큐멘터리라는 단서가 감지된다. 뱅크시가 박물관에 몰래 걸어놓은 가짜 전시물이 며칠 간 들키지 않았다는 이야기나, 다이애나 비가 그려진 가짜 돈이 위조지폐처럼 통용되더라는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티에리의 우스꽝스런 전시와 상업적 성공 역시 <예스맨 프로젝트>식의 ‘작전’이 아니었을까? 즉 티에리는 뱅크시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조롱당하는 희생양이 아니라, 디즈니랜드 작전처럼 적의 손아귀에서 충실히 제 역할을 해낸 작업동료가 아니었을까? 바보 같은 팝아트 작품을 백만 달러어치나 사들인 속물들을 상대로 뱅크시와 티에리가 모의하여, 티에리는 어릿광대 역할을, 뱅크시는 이를 찍는 역할을 맡아 페이크다큐멘터리를 만든 게 아닐까?

티에리와 마찬가지로 예술가가 아닌 나는 그림 작업보다 재판정에서 예술가 노릇을 하며 공안의 실상을 폭로하는 게 더 흥미로웠다. “감히 G20과 대통령을 모욕해?” 라고 말하고 싶지만 감히 ‘대통령=쥐’임을 밝힐 수 없어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끌어대는 검사의 전전긍긍을 폭로하는 작업이 내 적성에 더 맞는 ‘작품’이었다. 미술경매장이 ‘쓰레기들’로 수십억짜리 예술품을 찍어내고, 증권시장이 무형의 권리로 수 조원의 파생상품을 찍어내는 ‘장난’의 세계에서, 전시장과 미술계, 영화계와 법정을 가지고 장난을 친들 무어 그리 대수일까. 문제는 ‘어떤 가치인가’ 에 있지, ‘진짜냐 가짜냐’에 있지 않다.

앤딩 장면에서 티에리는 철거현장의 담벼락에 자신을 스타로 만든 전시회 제목 ‘인생은 아름다워’(안 웃긴가?)를 쓰고 나서 벽을 향해 락카를 집어 던진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벽이 넘어지고, 그 뒤로 포클레인이 나타난다. 자신의 팝아트 전시회가 실은 거리예술의 일환이었음을 암시하는 이 장면은 ‘그래피티 아트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성찰을 담고있다. 그래피티 아트로 현실이 바뀌진 않는다. 벽을 넘어뜨리는 건 결국 포크레인 같은 자본의 권력이나 민중의 힘이다. 하지만 그래피티 아트가 현실의 벽을 향해 던지는 돌멩이나 벽 밑에 난 쥐구멍은 될 수 있다. 출구를 찾아 구멍을 내다보면 권력을 떠받치는 강고한 토대도 무너지지 않겠는가.

이번 호 대문 기사는 ‘황진미의 법정르뽀’입니다. ‘쥐 그래피티3차 공판기 – 와우 개콘 돋는 밤!’에 재미가 붙어 영화평론 짬짬이 공판평론을 쓰고 있습니다. 공개재판임에도 베일에 가려진 법정의 ‘진상’을 평론가 특유의 ‘캡처’ 능력으로 실황 중계하는데, 있는 그대로 썼다지만 그 실상의 황당함과 참담함이 믿기지 않고 혹시나 명예훼손죄로 고발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 합니다.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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