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야밤에 시민을 급습하는 자들의 국가

- 이진경

카프카의 소설이 법에 관한 깊은 통찰력을 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법 앞에서>라는 짧은 단편은 수많은 사상가들이 붙인 주석으로 인해 더욱 유명하다. 이 글은 법의 문, 그것을 지키는 수위 앞에서, 그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감히 밀고 들어가지 못한 채 들어갈 적법한 방법을 찾다가 결국 죽음을 맞는 한 사람의 삶에 관한 얘기다. 법에 부합하는 적절한 절차와 방법을 찾다간 자신을 위해 나 있는 문 안으로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일까? 사법, 재판을 뜻하기도 하는 정의(justice)란 말은 사법이란 정해진 법적 절차를 넘어 밀치고 들어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시작되는 절차를 뜻한다는 걸 뜻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법의 문을 지키는 자와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해주는 어떤 거리를 두고 밀고 당기는 <법 앞에서>만으로 법에 대한 카프카의 생각을 읽으려 한다면, 그것은 극히 일면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 이야기의 시작처럼 법을 찾아가는 사람의 얘기고, 법이 만든 그 ‘거리’를 넘지 못해 법 앞에서 헤매는 우리의 얘기길 것이다. 반면 법이 우리를 찾아올 때는 그런 망설임도, 거리도 없다. <소송>에서 법은 소설이 시작되자마자, K에게 이유도 알려주기도 전에 체포를 통보하는 방식으로 덮쳐온다. <유형지에서> 법은 수형자의 등에 그의 죄를 바늘로 새기며 그의 죄를 알려준다. 법이 죄보다 선행한다. 법이 있어서 죄가 있는 것이다. 그 죄를 알려주는 것은 곧 법이 자신을 집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망설임도 문턱도 없다. 심지어 ‘거리’마저 없이 난데없이 찾아온다.

법을 찾아가는 우리와 우리를 찾아오는 법은 이렇게 다르다. 이런 비대칭성을 보지 못한다면, 법을 이해하는 것도, 법에 대한 카프카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도 실패할 것이다. 그런데 법조차 어떤 삶에 대한 어떤 예의는 갖고 있는 것 같다. 가령 <소송>에서 법은 아침이 되길 기다려 K를 찾아간다. 최소한 그가 잠들어 있을 야밤은 피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법이 ‘법’으로서의 권위를 지키고 우리로 하여금 쉽게 넘어서지 못할 절차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방법일 것이다. 법이 죄보다는 선행하지만, 삶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최소치마저 무시했을 때는, 저항으로 인해 자신이 와해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 명동 재개발을 위해 ‘마리’를 덮쳤던 용역회사나 강남구 포이동의 빈민들을 덮쳤던 용역회사들, 그리고 그것을 하도록 교사한 구청들은, 난데없이 덮쳐오는 법보다도 더 무례하고 야만적이다. 그들이 철거를 위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 건물들을 덮쳤던 것은 개나 고양이도 깊이 잠들어있을 새벽 3시, 4시의 야밤이었다. 이런 시간대에 누군가를 덮친다는 것은 적이 잠든 틈을 노리는 군사작전 아니고선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야간의 습격, 그것은 정확히 군사적 야습이었다. 야음을 틈 탄 그런 식의 기습을 기획하고 지시한 것은 용역회사가 아니라 구청이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이 상대방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제거해야 할 ‘적’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뜻한다. 구청이 자신의 지역 내에 사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엊그제의 포이동에서의 ‘작전’은 화재로 집들이 불타 사람들이 피난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들을 습격한 것이란 점에서, 군사적으로도 결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과 싸울 능력이 없는 난민들인 부상자들의 수용소를 야간에 급습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비겁하고 비인도적인 공습은 전쟁 상황에서도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구청이라면, 재난을 당한 그들을 위해 구호물자나 피난처를 제공했어야 할 텐데, 그나마 간신히 지은 피난처를 야간에 부수며 공격했다는 것은 정말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포이동 재건마을에 새벽에 들이닥친 용역깡패들이 망치로 집을 무작위로 부술 때 한 꼬마아이가 공부방 앞에 서서 "공부방만은 안돼요"했지만, 막무가내로 부숴버렸다는 얘기였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용역들 말대로 “술 먹지 않고선 할 수 없는” 이런 일을, 술 한 방울 먹지 않고 기획하고 지시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우리는 술 먹지 않고선 할 수 없었던 군사작전이 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도 술 한 방울 먹지 않고 기획하고 지시한 자들이 있었음 또한).

무엇이 우리 같으면 미치지 않고선, 혹은 술에 떡이 되도록 취하지 않고선 생각도 할 수 없는 이 과감하고 비열한 작전을 생각하게 했을까? 무엇이 ‘시민의 노예’를 자처하는 구청의 공무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인인 시민들을 이렇게 야만적으로 야습하는 짓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시하게 했던 것일까? 법이 우리를 덮쳐올 때에조차 쉽게 내던져버리지 못하는 절차와 예의마저 생까버리고, 정상적인 경우라면 군인들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야만적인 공격을 당연한 것인 양 지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 답을 잘 알고 있다. 재개발로 땅값을 올리고 건물값을 올려 돈을 벌려는 개발업자들, 자본가들이 그 하나일 것이고, 지저분하고 보기 싫은 건물을 뽀개서 “각 나오는” 도로와 폼 나는 건물로 도시의 외양을 만들려는 도시계획가, 도시의 행정가들이 다른 하나일 것이다. 이들에게 도시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공간이고 폼 나게 지은 보기 좋은 시각적 대상물일 뿐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멀쩡한 건물도 까부수고 다시 짓는 게 당연한 것인데, 지저분한 판자집이나 후줄근한 낡은 건물이나 그것을 소유권도 허가도 없이 점거하며 사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야 ‘도시 전체를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 것이다. ‘재개발’은 도시에 폼나는 외양도 제공하고 그 소유자에게 상승된 땅값을 제공하는 일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닌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돈이 되는 일은 좋은 일이라는 생각, 도시가 폼이 나게 개발되고 ‘수리’되어야 한다는 생각, 이는 그들의 욕망일 뿐 아니라, 욕망을 넘어선 신념이다. 그 욕망과 신념 앞에서 대체 무엇이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에 그토록 야만적인 야습을 해서라도, 화재를 피해 지은 피난민의 집을 부수고 “공부만만은!” 절규하는 아이의 소망을 짓밟고라도 재개발의 불도저는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비열한 야습을 감해하는 이런 욕망과 신념이 지금 이 땅 전국 도처를 헤집고 있다. 새만금의 바다에서 전국의 강들, 그리고 모든 도시들에서. 우리는 비열한 야습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야만적인 테러진압 작전으로 철거민들이 불타 죽어도,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나라. 카프카라면 법을 초과하는 이 국가와 자본의 참상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저 비겁하고 야만적인 공격을, 그 끔찍한 욕망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것들에 의해 부숴지고 죽어가는 것들을 잊지 않도록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공격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손을 함께 잡아야 한다. 그 습격의 장소를 새로운 삶의 장소로 만들어야 한다.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 그리며 새로운 삶의 활기가 피어나는 장소로 변환시켜야 한다. 수많은 시선과 동선들이 그 활기에 감염되어 모여드는 특이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승리할 수 없을 때조차, 두리반과 같은 작은 ‘승리’를 기억하고 상기해야 한다. 그것으로써 웃으며 저 비열한 자들의 욕망과 신념에 균열의 틈을 만들고 꽃이 피는 상처를 만들어야 한다.

응답 2개

  1. stoic말하길

    구구절절 마음이 아프네요. 잘 읽었습니다.

  2. 사나운 대지를 달리는 말말하길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하는 이유, 저 비겁하고 야만적인 공격을, 그 끔찍한 욕망을 기억해두어야 하는 이유, 그것들에 의해 부숴지고 죽어가는 것들을 잊지 않도록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는 이유…
    어떤 논리보다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들처럼 나도 가슴이 아프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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