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통일혁명당과 김질락

- 권보드래

박정희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각종의 조직사건도 함께 기억할 것이다. 통혁당, 민청학련, 인혁당, 남민전, 더하자면 조작의 흔적이 한결 역력한 유학생간첩단이며 문인간첩단에 이르기까지. 이들 조직은 대부분 실제 활동은 미약했던 가운데 왜곡되고 부풀려지고 고문과 중형으로 혹독하게 다루어졌으며, 대중과 접촉하기 전에 국가권력에 의해 적발되고 감금되고 압살당했다. 군대 창설까지 목표로 했지만 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사건으로 검거되고 말았던 남민전의 사례가 보여주듯, 대다수 조직이 시동, 심지어는 구상 단계에서 적발되었건만 당시의 개발독재정권은 사형을 포함한 극형으로 대응하곤 했던 것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이엔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64년 처음 검거되었을 땐 징역 몇 년으로 끝났던 인혁당사건이 1974년의 이른바 재건위 사건 때는 무려 여덟 명이 사형당하는 결과를 불러왔던 데서 알 수 있듯, 1960년대를 통해 ‘개발’과 더불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버리지 않았던 박정희정권은 삼선개헌을 분기점으로 ‘개발’ 일변도의 폭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아마 1968년의 1·21 사건이 상징하듯(“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북조선의 대 남한 전략이 도발의 색채를 띠기 시작한 사연도 서로 얽혀 있을 것이다. 통혁당은 바로 이 시절 터졌던 대규모 조직사건으로, 박정희정권의, 그리고 김일성정권의 색깔과 방향을 바꾸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혁명당. 민청학련이 김근태로, 남민전이 김남주로 기억되듯 통혁당사건은 이제 신영복이라는 실명을 통해 주로 회자되지만, 실제 조직을 건설하고 주도한 사람은 김종태·김질락·이문규의 세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통혁당은 전라남도와 서울에 준비위원회를 두었고, 잡지와 주점을 경영하여 젊은 지식층 사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1차 검거인원만도 70여명에 달하는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후 10여년간 재건 시도가 계속된 사실을 보아도 통혁당이란 이름이 가졌던 의미가 적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반공 콤플렉스 속에서 살았던 한국사회에서 통혁당은 전위조직의 최대치를 상징했고, 남한의 변혁 노선이 북조선과는 어떤 관련 하에 있는지의 문제를 예민하게 제기케 했다.

선언문 마지막을 “한국의 인민민주주의혁명 만세! 김일성의 주체사상 만세!”라는 문구로 장식했던 통혁당은, 실제로 상당액의 자금을 북조선에서 지원받았다고 한다.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이 사형선고를 받은 데도―신영복이 아슬아슬 사형선고를 피했던 사연도 전해진다― 직접 북조선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이 셋 중 김종태와 이문규에 대해선 최종판결 후 얼마 되지 않아 사형이 집행되었다.

남은 것은 김질락.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김질락은 1972년까지 살아남았다. 무엇 때문에? 그 사이 집필한 수기 『주암산』을 보면 김질락이 왜 예외가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질락은 “이미 사멸해 버린 내 과거”에 대한 “비문”으로 수기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인간 대열에서 떨어져 나간 한 낙오병”으로 스스로를 평가절하한다. 따져보자면 그것은 자신의 주체적 결정에 대한 회오라기보다 남의 개입을 뿌리치지 못했던 스스로의 허약성에 대한 염증처럼 보인다. 여기서 남이란 김질락의 삼촌이었던 김종태를 말한다. “김종태, 그는 나의 셋째 삼촌이었다.”라는 첫 번째 문장에서 감지할 수 있듯 『주암산』의 주인공은 김질락이라기보다 김종태이다. “달변가”이자 “자만가”였으며 “불사신으로 자처”했고 “누구 앞에서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 영웅심의 소유자”였던 김종태. 여덟 살 손위 삼촌이었던 그의 끊임없는 간섭으로 자기 생은 구불구불 휘어지곤 했다는 것이다.

수기 전반을 통해 구절구절 전해지는 원망은, 몇 해 차이 나지 않는 비상한 기백의 삼촌 때문에 김질락이 얼마나 자기 자신의 성향, 소망, 상상을 저버리고 살아야 했는가 하는 점에 집중돼 있다. 김질락의 말마따나 이념적 존재이기 전에 욕망의, 인정투쟁의 주체였던 듯 보이는 김종태는 이승만정권 시절엔 울산지역 부정선거를 주동해 ‘용감한 3형제’라는 악명을 날렸으며, 통혁당 활동을 전후해서도 선거철이면 정치인이었던 작은형을 돕기 위해 무조건 귀향했다고 한다. 김질락은 심지어 김종태가 북조선에서 온 공작금을 사복(私腹) 불리는 데만 썼으며 넓은 기와집에서 첩 치가까지 하면서도 조카인 자신의 생활고는 나 몰라라 했다고 분개한다. 멋대로 장기판의 말 마냥 자신을 써 먹고는 챙겨주는 구석이라곤 전무했다는 것이다.

다감한 가장이었던 김질락은 삼촌의 영향이 없었다면 “한갓 불평분자”로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국 유학 중 돌아와 부호의 딸과 결혼한 사촌을 부러워했던 것을 보면 그 쪽이야말로 ‘가고 싶었던, 가지 못한’ 길에 가깝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김질락은 미국 유학을 계획하기도 했고, 어린 딸 아들을 살뜰히 챙기면서 ‘행복한 가정’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념적 삶과 행복한 가정이 모순되기야 하겠느냐만, 자연인으로서의 김질락은 뒤쪽을 한결 선호한 듯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왕 사형선고까지 받은 마당에 주암산―평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의 기억을 등지고 여러 해 동안의 자기 삶을 ‘기만당한’ 인생으로 규정한다는 건 어떤 심정이었을까. 김질락은 “어떻게든 후회하고 살아보려고” 했다고 한다. 아마 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촌 김종태는 처형당한 후 북조선에서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평양에서 추도회가 열렸으며, 김종태 사범대학이 생겼고 그 이름을 딴 거리도 탄생했다. 살아남으려 애쓰지 않고 『주암산』이란 수기를 남기지 않았다면 김종태도 한반도 반쪽에서의, 사후의 헛된 영광이나마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혹은 재평가되기를 기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1972년까지 김질락을 살려두었던 박정희정권은 7·4 남북공동성명 직후인 7월 15일 사형을 집행한다. 정권 주변에서도 안타까워한 이들이 없지 않았으나 “북한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묵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갈라진 남북을 오간다는 건 그렇듯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수기를 통해 자기 인생을 삼촌에 의해 조종된 꼭두각시 인생으로 비하하고 완전한 자기 부정까지 전시했건만, 김질락은 생명을 보전할 수 없었다. 투옥 후 귀의했던 가톨릭이,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적었던 수기 속 기도문이 혹시 마지막 순간 그를 위안했을까. 1934년 생, 사형당할 당시 만 38세였다.

응답 1개

  1. 고추장말하길

    대학 2학년땐가, [어느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제목에 혹해서… 읽고나서는 아주 씁쓸한 이미지만 안게 되었는데… 이름이 잊혀지질 않았어요. 김질락… 그때 어느 선배에게 그 책에 대해 물었는데 중앙정보부 공작의 산물일 거라는 식으로 말해버렸죠. 선배라고는 하지만 학부생이었으니 잘 모르고 한 말이었을 거예요. 오랜만에 다시 떠오르는 군요. 그때의 그 씁쓸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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