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사사화된 공권력과 공권력화된 사적 폭력

- 정정훈(수유너머N)

가령 ‘무풍지대’나 ‘야인시대’라던가 ‘왕초’ 혹은 ‘모래시계’와 같은 TV드라마들이 알려주는 바처럼, 예전에는 정치깡패라는 것이 있었다. 정부여당의 청부를 받아서 정권에 반대하던 정치인, 재야인사, 학생 등에게 조직폭력배들이 테러와 린치를 가하곤 했던 것이다. 자유당 시절의정치깡패인 ‘이정재’나 ‘임화수’가 그 시절을 대표(?)하는 정치깡패들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군사쿠테타 이후 이들에게 사형을 언도함으로써 정치깡패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듯 했다. 더욱이 소위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이제 정치깡패들이란 TV드라마의 소재로나 사용되는 사회적 기억 속의 유물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권력이나 자본의 필요에 의해서 그들 세력의 비호 하에서 사적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결코 없어지진 않았다. 87년 4월 창당된 야당 통일민주당 당사에 난입하여 폭력을 행사했던 ‘용팔이’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독재정권은 이 청부폭력배들을 애용했다.

기득권 세력이 애용했던 청부폭력배의 또 다른 형태로는 노조파괴의 폭력을 휘두르던 구사대나 도시빈민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던 철거깡패들을 들 수 있다. 정치깡패, 구사대, 철거깡패 등으로 연결되는 이 계열은 그 이름을 무엇으로 칭하던 간에 기득권자들의 청부를 받아 국가가 공식적으로는 법으로 금지한 사적 폭력을 준합법적으로 자행하는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그들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비록 기득권 세력의 비호를 받고 폭력을 휘둘러왔다고 할지라도, 이 나라의 공식적인 사회질서 안에 공공연히 포함되는 존재들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그 질서 밖에서 기득권을 위해 암약하는 집단, 비공식적 집단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사설폭력집단이 일종의 질서 집행자 내지는 수호자로서 화려하게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엄정한 법질서를 그토록 강조하는 이명박 정권이 출범한 이후 우리는 이 ‘민주화된 사회’ 한 복판에서 마치 자유당 시절, 혹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나 존재했을 법한 정치깡패들을 다시 만나는 것 같은 기시감을 종종 느끼고 있다. 바로 ‘용역’이라고 불리는 사설경비업체가 그들이다. 최근 이들은 한진중공업, 유성기업, 카페마리, 포이동 등에서의 활약(?) 덕분에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말이 좋아 사설경비업이지 사실 노동자들이나 철거민들의 농성현장에 난입하여 폭력으로 농성을 해산하려 시도하는 용역들은 일종의 ‘청부폭력집단’이다. 이들은 정부나 자본이 공식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사안에 대해 청부를 받아 폭력을 통해 그 사안을 해결하고 온갖 이권을 챙기는 존재들이었다. 이는 이승만의 자유당 때부터 이명박의 실용정부에 이르기까지의 이들의 일관된 특성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와 같은 청부폭력의 양상과 위상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사설폭력집단에 폭력의 행사를 요청하는 것이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소위 ‘포이동 판자촌’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폭행하고 건물들을 파괴한 용역들은 강남구청의 청부를 받아서 그렇게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다시피 구청이란 지방정부의 한 형태이다. 즉 국가기관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포이동 판자촌’의 주민들이 무허가 상태로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국가기관의 보호대상이다. 그런데 국가기관인 강남구청이 사설폭력집단에게 국민에 대한 폭력행사를 청부한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용역이라는 사적 폭력이 국가기관의 목적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공권력이라 불리는 국가폭력이 외주화 되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적 폭력이 공적 폭력화 되는 사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주목해야할 또 다른 현상은 국가폭력의 사적 폭력화 현상이다.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충남 아산의 유성기업 등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하고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연대가 강화되자 이 공장의 경비를 책임지게 된 것은 경찰이었다. 자본은 국가에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시설보호요청을 하였고, 국가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한진중공업과 유성기업 등에 경찰을 보내 점거 농성중인 노동자들을 끌어내고 연대대오들의 공장진입을 막았다.

물론 자본이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국가의 보호를 요청하는 것은 소유권이라는 헌법적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대한민국의 헌법은 소유권 뿐만이 아니라 노동3권과 집회와 시위의 자유라는 시민적 권리도 보장하고 있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및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려는 시민들과 자기 소유물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자본의 충돌은 일종의 헌법적 권리 사이의 충돌이었다.

그런데 국가는 시설보호를 명목으로 경찰들을 공장에 파견하여 농성을 진압하고 연대단위들을 해산하였다. 이는 노동3권과 집회 및 시위의 자유라는 권리와 자본의 소유권이라는 권리가 충돌할 때 국가가 자신에게 부여된 공적 폭력을 통하여 일방적으로 소유권이라는 자본의 권리만을 옹호하고 방어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현재 경찰력은 자본의 사적 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권리와 시민들의 권리를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있다. 이는 경찰이라는 국가폭력, 즉 공권력이 자본의 사적 소유물을 지키는 경비업체화 되는 현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여기서는 공적폭력의 사적 폭력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일찍이 용산에서, 한진중공업에서, 유성기업에서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절박한 투쟁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이 경찰병력과 용역들의 ‘공조’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상징적으로 사적 폭력의 공적 폭력화 현상과 공적 폭력의 사적 폭력화 현상이 서로 만나고  뒤섞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공적 폭력과 사적 폭력을 구별하는 경계들이 희미해지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국가의 공적 폭력은 자본의 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해 사사화 되고, 용역들의 사적 폭력은 자본과 국가기관의 편의를 위해 공권력화 되고 있다.

결국 이렇게 공적 폭력과 사적 폭력의 경계가 흐려지고 두 폭력이 뒤섞이는 현상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사회적 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된 오늘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노동착취를 통한 산업자본의 이윤논리, 건설자본의 개발 이윤 논리에 따라 용역들은 이윤의 논리에 따라 형성된 사회적 질서의 공적 집행자가 되고 있고, 경찰은 시민적 권리를 억압해서라도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사설경비업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1848년의 맑스의 어법을 빌려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가란 부르주아지의 고충처리를 위한 용역업체이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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