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이 다채로운 것들 … 속에서

- 오항녕

1.
참 다채롭게 보여준다. 한 달에 한 번 〈수유너머 위클리〉에 쓰는 글이지만, 세월이 이래서는 소재든 주제든 쉽게 잡을 수가 없다. 하루가 다르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사람 같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난주에 생각해 둔, 아니 어제 생각해 둔 주제마저도 시사성을 잃는다. 쉽게 말하면 머리속이 왔다 갔다 한다. 기어이 어제도 서울시장 나부랭이가 주말 가을 기운을 받아 조금 맑아진 심기를 건드렸다. 천하고 사악하게 … 조선 500년 역사에도 보기 드문 중생들을 몇 년 사이에 참으로 다채롭게 보고 있다.

1.
알고 지내는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왔다. 《경연, 왕의 공부》(김태완 저)라는 책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경연(經筵)을 개관하고, 퇴계와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으로 고봉 기대승의 《논사록(論思錄)》과, 율곡 이이의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소개한 책이다. 《경연일기》는 말 그대로 경연을 날짜별로 쭉 기록한 일기이다. 《논사록》의 ‘논사(論思)’는 경연관의 직무를 말하는데, 경연을 맡았던 집현전(또는 홍문관) 관원을 ‘논사지신(論思之臣)’이라고 한다. 경연은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에서 대통령, 장관, 해당 전문가가 모여 《순수이성비판》《국부론》《미국민중사》《논어》, 이런 책을 강독하는 조금 ‘이상한’ 제도이다. 우연일까? 며칠 전에 들었던 얘기가 그 책 에필로그에 실려 있었다. 우선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장면1]
1995년 10월 어느 날, 중국의 국가주석 장쩌민이 한국을 방문하여 대한민국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뒤뜰을 산책하면서 북악산에 곱게 물든 단풍을 보고 두목(杜牧)이라는 당(唐)의 시인이 읊은 ‘산행(山行)’의 한 구절을 읊조렸다.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
물론 중국말로. 그런데 대한민국 대통령은 둘러보며 딴소리를 했다.

1995년 당시 대통령이시던 분의 경륜은 갈수록 빛을 발하기 때문에 누구나 익히 알고 있지만, 아무튼 그분이 무척 교양이 없고 무식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댓구까지는 아니라도, 통역을 해주었을 텐데 감상평 한마디 못했다는 것이다. 그분께는 바랄 것을 바라야 한다.

위의 시는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자연 변화를 그대로 따라가며 감상할 수 있다. 붉은 봄꽃? 진달래를 말하나? 여기서 ‘당연히 분홍빛 진달래보다 붉은 단풍이 더 붉지’, 라고 태클을 걸면 혼난다.

둘째, ‘서리 맞은 단풍’은 시련을 겪는 처지를 대변한다. 그럼에도 봄꽃보다 붉다. 사람이나 나라나 한중(韓中) 관계나, 이렇게 단련되면서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메시지로도 볼 수 있다. 이쯤에서 나라면 어떻게 댓구를 달았을까, 하는 장난기가 발동한다.

① 아무래도 다시 와서 봄꽃을 달래셔야[宜訪此處撫春色] :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다고 했으니, 봄꽃이 질투가 났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와서 봄꽃의 질투를 달래 달라는, 즉 또 오라는 호의와 봄꽃도 아름답다는 응수가 담긴 댓구이다.

② 눈속 소나무는 가을 하늘보다 푸르리니[雪松靑於今日天] : 설송은 조선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경이라 모티브로 써 보았다. 다가올 겨울 눈속의 소나무는 지금 가을 하늘보다 더 푸를 것이라는 기대를 담아, 앞으로도 더 좋고 볼만한 일이 많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한 댓구이다.

이 외에도 몇 구가 더 떠오르는데, 주자(朱子)의 경계를 떠올리며 그만두었다. 자꾸 시에 빠지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경계. 왜? 말장난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말장난, 글장난으로는 이옥(李鈺)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나는 정조(正祖)가 그를 성균관에서 쫓아내고 군대로 보낸 조치가 이해된다. 그런 글을 쓰려면 나랏돈으로 먹고 살면서 쓰지 말고, 네가 벌어서 먹고 살면서 그런 글 쓰라는 뜻이다. 아니, 정말 뭔가 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조가 쫓아내기 전에 성균관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한다. 내가 이옥을 좋게 보지 않는 이유이다. 물론 좋게 보지 않을 수조차 없는 사람도 있다.

1.
책을 몇 장 더 넘기던 나는 못 볼 데를 본 느낌이 눈을 멈추었다. 날 버리고 떠난 여자는 잊으려도 해도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가끔 살다보면 별게 다 잊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게 그런 경우였다.

[장면2]

2008년 8월 어느 날 MBC뉴스, 퇴임을 몇 달 앞둔 미국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가 방한했다.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공식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에 관해 논의를 했느냐고 기자가 질문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즉각 대답했다.

“아프가니스탄 뭐, 파견 문제, 이것은 부시 대통령이 답변해야 하잖아요. 내가 할 것이 아니고. 그러나 그런 논의는 없었다는 걸 우선 말씀드립니다. 네, 허허.”

이때 부시는 실소하면서(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면서) 이어폰을 빼고 즉각 반박한다.

“우리는 논의했습니다. 한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기여한 것에 대해 대통령께 감사드렸습니다. 다만 내가 대통령께 말씀드린 것은 비전투적 지원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비전투적 지원을 해서 이 신생 민주국가를 돕도록 고려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순간 이명박 대통령은 어색한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혼자말을 한다. ‘아, 말했었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그는 그렇게 넘어갔다.)

나 역시 이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일단 여기서 다른 논의는 다 빼자. 이명박의 말을 자르며 들어온 부시는 그 답지 않은 단호한 말로, “We discussed it!”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아들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정확히 발음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지금도 그 장면을 보고 복잡했던 심정이 장기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아무렇지 않게 실실 웃으며 책임감의 결여에 대한 자각을 피해갈 수 있는 독특한 인성 구조를 가진 분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것을 안 순간, 나는 많은 것을 접었다. 자존심이 결여된 사람이 책임감을 갖기 어렵고, 책임감이 결여된 사람이 정의롭기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매우 위태로운 사심(私心)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사람은 하기로 한 일을 못할 수도 있다. 틀릴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다. 다만 그럴 때, 많은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한다. 그래서 맹자가,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라고 했다. 전아한 표현은 아니지만 ‘아! 쪽팔려!’ 라는 말은 곧 맹자의 가르침에 부응하는 실천이다. 그렇다. 쪽팔리는 줄 아는 게 중요한 거다!

1.
마음을 접고도 찝찝했다. 그 이유를 요즘 알게 되었다. 원래 내가 그리 훌륭한 인격은 못 되었지만, 그나마 무책임, 회피, 불인(不仁) 같은 그분의 증후가 발견되는 것이다. 오염! 마음을 접는다고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분에게 오염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그분의 꼼수까지 오염되지는 않은 듯하지만 범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심이 들어간 인간의 마음은 위태롭다[人心惟危]”고 이미 《서경》에서 말했을 것이다.

1.
더위도 한철이고 추위도 한철이다. 지나간다. 그러나 잘 지나가기 위해, 하나마나한 소리 같지만,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공부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내가 무슨 생각,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1.
이런 오염에 대한 본능적 위기의식 때문이었는지, 방학 때 세미나를 세 개 돌렸는데, 전주대 학생들만이 아니라 소문을 듣고 전주시민 몇 분도 참석했다. 본래 하던 인간+X는 분자생물학을 마치고 앞으로 아렌트를 읽는다. 나머지 두 세미나는 방학과 함께 접으려고 했더니 계속 하자는 분위기다. 그래서 통합해서 목요일 아침 7시에 역사가의 저술을 차례로 읽기로 했다. 아침 세미나, 참 오랜만이다. 이렇게 우리는 지옥에서 극락을 만들고 있다.

응답 1개

  1. 말하길

    읽으면서 많이 웃고 많이 배웠습니다. 선생님의 인품이 오롯이 글 속에 느껴집니다. 깊고, 넓고, 날카롭고, 날아갈듯 경쾌한 글,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