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제 아버지를 소개합니다.

- 윤여일(수유너머R)


1.

아버지는 선생이십니다.

집안 내력이 그렇습니다. 증조할아버지는 훈장, 할아버지는 교장, 누나는 중학교 선생입니다. 거슬러 오르면, 파평 윤씨 시조인 윤신달도 왕사였다고 합니다. 윤(尹)이라는 성이 왕건에게 하사받은 것이라죠.

너무 거슬러 올라갔네요. 아무튼 아버지는 선생이십니다. 처음에는 초등학교 선생으로 발령이 나셨다가, 고등학교로 옮겨 오랫동안 재직하시다가, 전교조 일로 해직 당하신 뒤 중학교 선생으로 복직하셨다가, 고등학교 선생으로 퇴직하셨습니다.

이것도 집안 내력인지, 아버지는 천성이 선생이십니다.

문학 선생님답게 말씀은 차분하고 설명조를 즐기십니다. 집안 내력은 아닌가 봅니다. 저는 말이 빠른 편이거든요. 그래서 아버지 말씀을 듣다가 기다리질 못해 앞서갈 때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르치시길 좋아하십니다. 종종 우리 사이에서 사소하게 시작된 이야기는 교육하는 모습으로 접어들어 토론하는 모습으로 바뀌다가 언쟁하는 모습으로 끝나곤 합니다.

2.

아버지가 선생이라서 저와 같이 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이렇게 자주 물었습니다.

“자식 교육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러면 아버지는 대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두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좋죠”라고 답하곤 하십니다.

저도 아버지의 교육 철학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 교육 철학이 자식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갓 초등학교를 들어갔는데, 세 살 많은 누나와 함께 천자문을 외워, 그날의 할당량을 못 외우면 바깥에서 팔 들고 벌서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때 세 살이면 엄청난 차이 아니던가요. 누나와 제가 외워야 할 개수는 똑같았습니다. 겨울밤에 특히 서러웠습니다.

중학생 때는 책을 읽고 책 내용을 정리해 말씀 드려야만 용돈을 주셨습니다. 책의 난이도와 두께로 용돈을 매기셨습니다. 그래서 삼국지가 애독서였습니다. 성서 이야기도 만만찮게 두꺼워 자주 읽었습니다. 용돈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책을 읽게 된 것은 [천국의 열쇠]를 만나고 나서였습니다.

고등학생 때, 저는 특목고를 다녔습니다. 그 학교의 1기여서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굉장히 몰아댔습니다. 특수목적고가 아니라 입시목적고였습니다. 등교 아침 7시, 하교 밤 10시 반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제게 언어영역을 가르치지는 않으셨지만 집에 돌아오면 스크립해두신 신문을 꺼내셨습니다. 토론을 마치고 나서야 늦은 시간에 잠들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 때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저는 제가 쓴 원고를 보내드리는데, 그러고나서 고향집에 가면 토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대화가 될 만한 상대로 아들은 성장한 것입니다. 어렸을 적,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기라도 하면 “너 그러면 속물된다”고 텔레비전을 끄셨습니다. “속물이 돼서 나중에 대화 상대가 되지 않으면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상투적 표현이라서 피하려 했는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가끔씩 고향집에 내려가면 밤새 텔레비전을 봅니다. 지금 제 방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인터넷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향집에 내려가면, 밤새 텔레비전을 보며 머리를 새척합니다. 지금은 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아마 속물은 되지 않은 듯합니다.

3.

대학생이 되어 아버지의 삶을 조금 더 이해했습니다.

아버지는 선생이시지만, 학교에 늘 계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로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렇다고 집에 계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따금 지역뉴스에 등장하셨는데, 주위는 무척 소란스런 상황이거나 아니면 무거운 분위기의 경찰서였습니다.

지역 뉴스에서 아버지가 나온 다음날이면 아파트 아주머니들을 만나기가 싫었습니다. “너네 아빠 또 나왔더라.”라는 소리가 듣기 싫었습니다.

아버지는 전교조 대전 지부 초대 위원장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가족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알게 되었습니다. 5년 정도의 해직 기간 끝에 학교로 돌아오신 것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육청에서는 원래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를 중학교로 발령했고, 그 학교가 제 학교였습니다. 아버지가 학교에 있을 때, 아들이 학교에서 겪게 되는 일이 무엇인지는 상상에 맡겨드립니다.

아무튼 제가 대학생 때, 누나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이 대전에서 함께 모이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어머니 기억으로는 “딸은 늘 엠티, 아들은 늘 세미나”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일 년에 한 번 가족이 다 모이는 날이 있었습니다. 민중대회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전에서 전교조 선생님과 함께 올라오셨고, 누나도 학교 사람들과 저도 제 동료들과 민중대회에 갔습니다. 그날 어머니는 점심 식사를 준비해 오셨습니다. 가족 소풍의 호사는 그때 누렸습니다. 아버지가 해오신 일이 무엇인지는 그 시기에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4.

아버지는 정년을 하셨습니다. 끝까지 평교사였습니다. 할아버지는 30대에 이미 교장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에 할아버지는 교장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줄곧 평교사로 남으셨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으로는 어느 학교로 가시든 교장과는 사이가 껄끄러우셨습니다. 그러고보니 어느 교회로 가시든 목사와도 관계가 좋지 않으셨네요.

아버지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을 인정하고,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크리스천입니다.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고, 주일에 세미나 모임에서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계십니다. 최근에는 화이트헤드에 매료되신 듯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아버지가 크리스천인 것은 아버지의 화두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아버지에게 가장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 까닭은 그가 생명을 살리는 데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아버지에게 위대한 스승인 까닭은 교육이란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예수 사랑은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나름의 생명 철학을 자신만의 생명 철학을 갖고 계십니다. 세계 형성의 원리, 인간 행위의 원리, 사회 관계의 원리를 생명으로 풀어내십니다. 반면 저는 지금 무언가를 사고할 때 결론에 이르기에 앞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되도록 분절하려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화를 시작하든 아버지의 일반화와 저의 구체화는 충돌하게 마련이었습니다.

5.

그러나 이제 그런 토론이 뜸해졌습니다.

제가 바빠진 탓도 있지만, 아버지의 관심이 온통 손녀로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2년 전 새 ‘생명’이 등장했고, 아버지에게 수안이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새 ‘세계’의 경험인 것입니다.

수안이는 누나가 낳은 딸입니다. 누나는 수안이를 홍아라고도 부릅니다. 수안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역대 최고로 긴 편집자의 말이 나올 것 같으니 접겠습니다. 더구나 바보 삼촌이 될 게 뻔하거든요.

다만 아버지가 수안이에게 편지를 쓰신다는 사정을 소개합니다. 수안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아버지는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누나나 제게 아이가 생기면, 누나와 저 때보다 더 잘 교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셨습니다.

수안이는 아버지가 정년을 하시고 나서야 세상에 나왔습니다. 아니, 아버지와 수안이의 만남은 늦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학교를 떠난 아버지는 수안이에게 온통 집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성어리게도 누나는 한 주에도 몇 개 씩 수안이의 동영상을 찍어 아버지께 보냅니다. 사랑스럽게도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 씩 동영상을 꺼내 보시며 수안이를 그리십니다.

그리고 생각하십니다. 수안이에게 친구가 생겼을 때, 수안이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 수안이가 사춘기 때, 수안이가 사랑에 빠졌을 때, 수안이가 사랑의 상처를 받았을 때 그 미래의 수안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생각하십니다. 그 이야기를 편지로 적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학교와 교회에서는 개혁주의자였고, 운동에서는 이상주의자였고, 사고에서는 생명론자이였으나 수안이에게는 로맨티스트입니다.

이제 수안이에게 보내는 애정 어린 편지를 조금씩 공개합니다.

응답 1개

  1. 이하림말하길

    이잉. 아름다운 가족이네요. 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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