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가 쓰는 편지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하버지가 쓰는 편지

네가 태어나던 그 시간부터
네 엄마와 약속대로 담배를 끊고
대전에서 일산까지 차창에 부슬비를 받으며
네가 어떤 조합일지 궁금해 하던 네 하버지
넉달 보름 동안 널 안고 업다가
어제 개봉동 할머니께 널 보내고 나서
보고 싶어 떠올려도 벌써 가물가물하구나.

내 눈을 바라보며 옹알거리던 소리
‘까꿍’에 까르르 웃던 소리가
까르르 웃던 그 입매와 눈매가
아직 솜털인 네 눈썹만큼이나
벌써 자꾸만 희미해지는구나.

눈을 감아도 네가 또렷하게 떠올라야
나의 기쁨도 또렷해지겠기에,
책상 앞 벽을 네 사진으로 가득 채웠건만
너의 표정들만 바뀔 뿐
진짜, 진짜 네 모습은 너무 멀어서
안타까움만 커가는구나.

다 살아버린 인생이라서
기다릴 만한 즐거움은 없을 것 같았더니
끔찍하리 만큼 사랑하게 된 너 수안아,
네가 행복하게 사는 걸
지켜보려면 오래오래 살아야겠다.
이 나의 소원이 너의 소원이 되겠지.

수안이 생일 때마다 뭘 선물할까.
아, 이 흰머리를 짜서 지혜를 물려 줘야지.

혹시라도 내가 먼저 가서 안 보이거든
생일날마다 편지 한 통씩 뜯어보고
네가 즐거울 때나 슬플 때도
하버지라면 어찌했을까 그리며
뜯고 또 뜯어 보거라

네가 함정에 빠진 것 같아도
고비마다 벗어날 비방이 거기에 있단다.
네가 기쁘거나 슬플 때
함께 웃고 울어줄 하부지를 떠올리며
‘하부지 나 지금 어떡해,’ 하며 말동무 삼아다오.
굴절도 색깔도 없는 안경으로 세상을 보며
너에게만은 떳떳하게 살아갈 너를 그리며
먼 훗날에나 받아볼 이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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