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이 온화하고 손이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슴에 불이 일어날 때는 용광로에 쇳물 쏟아지듯 금속성의 목소리를 토해 내셨습니다. 며칠 전 하늘 길 올라가신 이소선 어머니 말입니다. 워낙 인연 깊은 분들이 소중한 기억을 여기저기 내놓고 있는 터라, 그저 밥 한 끼 먹은 인연이 전부인 저로서는 보탤 말이 많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2년 전에 전태일 평전을 재출간하며 준비된 자리에 강연자로 초청받았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모두들 저녁을 함께 했는데 거기서 이소선 어머니를 가까이서 뵐 수 있었습니다.
전태일 열사 분신 후 사십 년을 강단 있게 싸워온 분이라는 생각에 제가 막연히 그렸던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뵌 모습은 너무 달랐습니다. 외할머니가 손주 손을 잡듯 그렇게 제 손을 잡으셨습니다. 작년 <위클리 수유너머>에 말씀을 실을 수 있을까 해서 전화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완곡히 거절하셨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음색만큼은 뚜렷이 기억합니다. 너무도 순박한 목소리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셨지요.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싸워온 분이 그런 감성을 지니셨을까 믿기지 않았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감성을 지니셨기에 그 오랜 세월을 싸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런 감성을 물려받았기에 전태일 열사가 여공의 손을 따뜻하게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머니는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갔지만 그보다 먼저 전태일 열사가 어머니의 감성을 이어받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소선 어머니가 손을 잡고 말씀을 하시면 그 진실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우리가 그토록 외치는 연대란 그렇게 잡는 손, 그렇게 전하는 말에 다름 아니겠지요.
2.
<위클리 수유너머> 이번호 특집은 ‘희망버스 좌담회’ 입니다. 희망버스를 기획하는 데 참여했던 문화연대의 신유아님과 쌍용자동차의 이창근님, 그리고 평택 대추리에서부터 용산 그리고 신촌의 두리반과 제주 강정마을까지 ‘철새운동가’로 불린다는 평화운동가 조약골님, 여기에 희망버스라는 ‘사건’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수유너머N의 이진경님(2차 희망버스때 최루탄 파편에 상처를 입으셨다죠). 이렇게 네 분이 ‘희망버스’를 주제로 흥미진진한 좌담을 나누었습니다.
네 분의 거침없는 대담은 희망버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뿐만 아니라 희망버스가 무엇을 낳았는지도 보여줍니다. 네 분의 대담을 읽으며 저는 감성이랄까 정서랄까 하는 것의 중요성을 봤습니다. 운동은 이념과 논리 이전에 정서와 감성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맑스식으로 말하자면 감각의 실천적 생산이라고 할까요). 새로운 정서와 감성을 어떻게 집합적으로 생산할 것인가. 정서적 전환이야말로 사회운동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고 법적이고 논리적인 불가능성에 직면한다하더라도 대중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데이빗 그레이버(David Graeber)라는 인류학자가 수유너머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윙(W-ing)>(w-ing.or.kr)을 방문했는데 그때 그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계의 지배자들은 절망을 생산하는 거대 기계를 통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목격했습니다. 그 기계는 세계 곳곳에서 고장나고 있습니다.” 지배가 절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그의 말이 맞다면, 저항은 무엇보다 희망을 품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겁니다. 희망을 품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저항인 셈이지요.
이 점에서 희망버스는 중요한 반전을 이루었습니다. 김진숙씨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 가장 깊이 절망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 거기가 희망이 시작될 곳임을 선포했고, 여러 활동가들, 여러 시민들이 기꺼이 그 희망의 불을 키우는 불쏘시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 희망의 불을 버스에 실어 서울까지 날랐습니다. 우리가 본 것처럼 그 희망은 용감했고 진실했고 다정했고 즐거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했던 것이고 지금 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다른 세상은 다르게 느낄 줄 아는 자들, 다른 느낌을 만들어낼 줄 아는 자들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