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높아지는 장벽…커지는 불안

- 맹찬형(연합뉴스 제네바 특파원)

제네바에서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매년 여름에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가 노동허가를 갱신하는 일이다. 노동허가는 곧 거주허가여서 1년에 한 번씩 기간을 연장하지 않으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셈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 날이 찾아왔다. 7월 초에 가족들과 함께 서류를 완비해 제네바 칸톤(州) 이민국에 갔더니 우편으로 접수하라며 돌려보냈다. 헛걸음에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꾹 눌러 참고 우편봉투에 준비했던 서류들을 넣어 보냈더니 8월 하순에 안내 편지가 왔다. 직접 이민국에 와서 몇 가지 개인정보 입력 절차를 거쳐야 노동허가증을 발급해준단다.

다시 아내와 아들을 차에 태우고 이민국에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검지 손가락 지문을 입력하고, 액정판에 전자펜으로 서명을 써넣었다. 작년에는 없던 절차다.

2008년 12월 스위스가 유럽 국가들의 역내 통행자유화 조약인 솅겐조약에 가입하기 전까지는 우편으로 노동 및 거주 허가 연장 업무를 처리했는데, 가입 후부터는 직접 출두하는 걸로 강화됐고, 올해는 지문과 서명 등록이 추가된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장벽은 갈수록 높아만 간다.

제네바 거리에서는 요즘 검은색 구두를 신은 이들이 스위스 국기의 색깔인 빨강색 영토 안으로 떼를 지어 몰려드는 것을 형상화한 정치벽보를 자주 볼 수 있다. 나치 시대의 정치 선전물을 연상케 하는 이 벽보의 내용이란 이민자 유입을 차단하는 것을 기본 정강정책으로 삼는 극우 정당을 만들자는 거다. 검은 구두를 신고 스위스 땅을 짓밟을 듯 몰려드는 이들이 이민자다. 종교적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거나 이민자에 대해 제도적인 벽을 쌓는 움직임은 이미 몇 해 전부터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2009년 11월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가결된 이슬람 사원 첨탑(Minaret) 신규 건설 금지안이 한 예다. 이슬람 사원 건물 양쪽에 보면 예배시간을 알리는 뾰족탑이 있는데 이를 영어로 미나렛이라고 한다. 우파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스위스국민당(SVP)은 ‘미나렛이 이슬람의 힘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며 기독교의 땅인 스위스에 더 이상 이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상을 깨고 이 국민투표 발의안은 가결됐고, 국민투표 통과 시 곧바로 헌법에 삽입되는 스위스 정치제도에 따라 헌법 72조3항으로 자리 잡았다.

2010년 11월에도 스위스국민당이 외국인 중범죄자를 자동으로 추방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발의안을 내서 국민투표에 부쳐졌는데 역시 통과됐다.

원래 스위스의 기존 법률에 살인이나 강도, 성폭행 등 중범죄자를 저지른 외국인은 추방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있어서 굳이 국민투표까지 갈 이유는 없었다. 실제 이 발의안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사회보장급여 부정 수급을 ‘중범죄’로 규정한 거였다.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사회보험을 제대로 내지 않으면서 불법적으로 돈을 타내서 공공재정을 취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과연 이를 중범죄로 볼 수 있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이 또한 국민투표에서 통과돼 헌법 121조 3항이 됐다.

두 건의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스위스국민당은 4년 전인 2007년 총선에서 가장 많은 득표율을 올렸는데, 올해 10월 총선에서는 더 약진할 가능성이 크다.

이웃한 프랑스에서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작년 여름에 유랑민족인 로마(Rroma) 혹은 집시(Gypsy)들을 전세기에 태워 그들의 고향인 루마니아 등 동유럽으로 돌려보냈다. (우리에겐 집시라는 표현이 익숙하지만, 그들은 ‘사람’이란 뜻의 로마로 불리기를 원하고 유엔 등 국제기구의 공식 용어도 로마다) 좀도둑질과 소매치기 등 크고 작은 문제를 자주 일으켜 치안을 해치고 복지재정을 축낸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흔히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한다. 유럽 경제가 호황일 때는 이민자는 문제가 주요 이슈로 부각되지 않지만,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 가장 먼저 타깃이 된다. 경기가 좋을 때 외국인 노동자는 값싼 임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므로 도움이 되지만, 경기가 침체하고 고용이 줄면 일자리를 빼앗는 경쟁자이자 복지 등 공공 재정에 부담을 주는 존재로 전락한다.

프랑스어 부르주아지(bourgeoisie)는 원래 성(城) 안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동유럽을 포함한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이 외성(外城)을 이루고,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 등 부유한 서유럽 국가들은 내성(內城)에 속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성벽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민 문제만이 아니다. 선진국 경제가 회복할 동력을 상실하면서 국제교역 규모도 줄어들고 있고, 세계무역기구(WTO)같은 다자통상기구의 역할도 약해지고 있다. 특히 2001년부터 시작된 도하개발어젠다(DDA)는 좌초 직전의 상황에 있다. DDA가 10년 째 표류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미국 등 선진국들이 중국을 비롯한 신흥경제국에 더 많은 개방을 요구하면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데 있다지만, 사실은 다자무역체제가 자유무역협정(FTA) 등 양자체제로 빠르게 대체되는 흐름을 반영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각종 분쟁의 현장에서 유엔의 존재감과 목소리가 약해지고 있는 것도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20세기 세계사에서 불행한 일은 개별 국가나 정치-경제적 블록의 장벽이 높아지고, 블록간 경쟁이 극단으로 흐를 때 생겼다. 거주허가 연장을 받기 위해 지문을 찍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문득 불안감이 스쳤다면 너무 예민한 걸까

응답 1개

  1. 깨어나기말하길

    외국인노동자 정책이 유럽도 심하군요. 프랑스의 집시추방은 후덜덜입니다. 생생한, 그러나 스산한 소식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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