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조선인 형사 신승희(철)의 죽음, 조서와 소문

- 권보드래

아마 초등학교 시절 신동우 화백의 『만화 한국사』쯤을 봤던 게 아닌가 싶다. 송진우가 고문실에서 사나운 개와 마주하고도 꿋꿋하던 장면이며 유관순이 판사에게 냅다 의자를 던지던 장면이며, 아직도 눈에 선한 ‘민족주의의 영웅’들의 초상과 더불어 조선인 형사의 애국이 기억나곤 하니 말이다. 『만화 한국사』에서는 젊고도 강직한 인상으로 형사의 얼굴을 그렸던 것 같은데, 여튼 종로경찰서의 형사였던 그 사람은 3․1 운동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도 경찰에 알리지 않았으며, 후일 사실이 탄로나자 자결했다고 한다. 이름은 잊어버렸는데도 그 드라마틱한 사연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중학교 땐가 어느 기념일에 그 생애를 소재로 시를 지었던 기억도 난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싶다. 뒤져 보니 1970년대 말에는 「34인」이라는 제목으로 아예 형사를 주인공 삼은 드라마가 특집 방영되기도 했다고 한다.

아직도 인터넷 등지에선 ‘신승희’ 혹은 ‘신철’이라는 이름으로 그 형사의 일화가 회자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전 민족의 봉기’였다는 3․1 운동의 보편성과 순결성을 증명하기에 그 이상 적절한 일화가 있을 수 있겠는지. 유관순의 생애가 한 점 회의 없이 내달리는 애국의 열정을 상징한다면, 신승희(철)라는 이름은 참회를 통해 결백해진 죄인의 굴곡진 생애를 상징한다. 열정을 믿기엔 너무 지치거나 소심해졌지만 언젠가, 최종심에서 모든 허물을 털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하는 인생에 신승희(철)는 적절한 아이콘이기 쉽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을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 신승희(철)는 10년간 종로경찰서에 근무해 온 베테랑 형사다. 우연한 기회에 독립선언문을 인쇄하는 현장을 포착, 3․1 운동 계획을 파악하게 되지만 천도교 지도자 최린의 설득으로 침묵을 지키기로 한다. (최린이 5천원을 제공했으나 거부했다는 내용도 있다.) 거사 며칠 전 만주로 피했으나 일경에 체포, 압송되는 중 자결한다.

최후에 대한 증언은 특히 엇갈린다. 만주 출장을 자청했다는 설, 아예 형사 신분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설, 잡힌 후에도 압송 중 자결했다는 설, 경찰형무소에서 목숨을 끊었다는 설 등. 당시의 신문기사도 정연치는 않다. 『매일신보』에는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승희가 경성헌병분대 유치장에서 자살하다(…) 독립운동 관계로 천도교에서 5천원을 받고 3․1 독립운동 거사계획을 묵인한 혐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미국서 발행되던 『신한민보』에는 「양심재판을 받고 자살해/ 부려먹고 가두어」라는 표제 하에 신승희(철)가 토사구팽당한 듯이 적혀 있다. 아마 신승희(철)에 대한 끈질긴 소문의 진원지라면 위 『매일신보』의 작은 기사 정도를 들어야 할 것이다. 약간의 보충도 없지 않아서, 10여년 전에는 국가보훈처에서 신승희(철)의 일화를 ‘비사’로 공개한 일도 있었다. 천도교 간부 이종일의 손녀가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서 들었다는 회고담에 기댄 것이었다.

신승희(철)가 체포된 것은 1919년 5월 14일이었다고 한다. 일본인 동료와 함께 만주의 봉천 등지로 출장을 다녀오던 길이었단다. 헌데 출발한 날짜가 5월 초였다니 일단 3․1 운동 직전 만주로 떠났다는 항간의 소문과는 어긋난다. 체포 후 죽기까지, 며칠 동안 신문받은 내용은 조서에 자세히 남아 있다. 역시 소문과는 다르다. 헌병대에서 집중적으로 조사한 내용은 3·1 운동 이후 천도교에서 자금을 받은 적이 있냐는 것이었다. 손병희의 양자이자 천도교 대종사였던 정광조가 신승희(철)에게 친구 박노학을 통해 3백원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신승희(철)는 구금된 천도교 인사들의 편의를 봐 주는 한편 검거 계획을 흘려 도피를 도왔다는 것. 신승희(철)는 매수된 척하며 정보를 빼낼 생각이었다고 변명했지만, 정광조·박노학 등이 혐의를 인정했고, 공소장은 그들의 진술에 의거해 작성되었다. 조서에 의하면 신승희(철)는 당시 40세. 강점 이전인 1909년부터 순사보로 일해 왔으며, 1919년 당시에는 월급 40원씩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가택을 포함해 재산도 1천여원에 달했다고 하니 꽤 부유하게 살았던 셈이다. 과연 신승희(철)는 재산 몇 푼을 더 불리기 위해 천도교의 ‘뇌물 공여’에 응했을 따름인, 그런 형사였던 걸까.

당시 1백만 신도를 자랑하고 있었던 천도교에서는 1919년 1~2월 사이 기밀비 2만원을 썼고, 3·1 운동 후 재산이 압류한 상태에서도 다시 3만원을 모금해 사용했다고 한다. 이 거액의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세간에서나 경찰에서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신승희(철)가 받았다는 5천원이란 그 와중에서 상상된 액수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매일신보』의 기사 외 신승희(철)의 ‘마지막 애국’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딱히 없다. 이종일 자신이 5천원을 제공했다는 증언이 있긴 하나, 오랜 세월 후 손주사위의 증언을 통해 채록된 것이라 신빙성이 높다고 하긴 어렵다. 그런데도 신승희(철)라는 이름이 1백년 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도 생생한 디테일을 적잖이 거느린 채로 말이다. 최린이 5천원 지폐뭉치를 신문지에 싸 건넸고 신승희(철)가 이를 뿌리쳤다거나, 3·1 운동 직전 만주로 떠났다거나, 그럼에도 소문이 새 나갈 걸 우려해 3월 3일 예정이었던 거사일을 앞당겼다거나, 체포되어 끌려오던 열차 안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거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단언할 순 없다. 일본 경찰의 공소장이 사실에 가까운지, 『매일신보』의 기사가 사실에 가까운지. 서류에는 어디까지나 신승희로 돼 있는 조선인 형사가 왜 소문 속에선 신철로 변성명해 있는지. 신승희(철)가 천도교 자금을 받았다고 하면, 그저 사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모종의 민족의식이 개입해 있었는지. 3·1 운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만약 신승희(철)가 없었더라도 그런 인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법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뿐이다. 서울시내에선 중등학교 상급생 이상이라면 어지간히 알고 있었고, 중국이며 일본에서 시위 계획을 독려하기 위해 적잖은 인원이 파견되었으며, 지방에서도 수백 명이 계획을 통보받고 있었는데 일제 권력이 이 사실을 전혀 탐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 이 놀라운 자발성과 견고성은 거의 해명할 길이 없다. 밀고가 만들어 낸 그 많은 굴곡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3·1 운동이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신승희(철)는 그런 기적의 인간적 형상이다. 실제 생애와 최후를 따지기 전에 그 형상 자체에 스며 있는 원망(願望)이 절절하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