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희망버스에서 벌어진 모세의 기적

- 이계삼

3차 희망버스 다녀온 밀양참가단의 이야깁니다. 딴지일보 버전으로 써 보려 하는데, 잘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희망버스 3차는 그야말로 다이나믹 액소더스 아리가또고자이마쓰(사이 님의 노래에서 발췌) 되겠습니다. 18명(신부님은 우리랑 넘 멀리계셨으니 17명이라고 합시다)의 우리 밀양참가단은 박작가께옵서 급히 제작한 ‘밀양무속인협회 깃발'(수박과 색동손수건이 깃발로 펄럭이는, 좌중을 단연 압도했더랬죠) 아래 부산역에서 참하게 문화제 구경을 했더랬지요.

그리고 부산역 구내 ‘김밥천국’에서 김밥, 떡라면, 참치김밥, 떡볶이 등속으로 순대를 채우며, ‘우리가 부산 경기 살려주는 거는 확실하다!’ 어쩌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더랬지요.

얼마 뒤, 집회판의 워치타워, 우리 전교조 박지회장님(아니,박목사님)께옵서 ‘텍’을 전해주셨더랬지요. 참 오랜만입니다. 텍받아 본게. 그리하여 자정에 밀양으로 돌아가야 할 선수들을 선별하고 난 뒤, 우리는 이제 우리의 길을 출발한 겁니다.

우리는 조를 짰습니다. 조짜기 방식은 누천년 이래 인류의 운명을 결정해온 일명 ‘댄지뽀.’ 손등을 낸 우리 선수는 저와 이뱅님, 습님 되겠습니다. (참가자는 닉네임으로 처리) 그리고 여전히 문화제 대오 속에서 무속인협회 깃발을 들고 어버이연합회원급으로 여겨지는 한 ‘어버이’와 담소 중이신 김빈 님, 원빈과 현빈을 합쳐 ‘짜부시킨’ 김빈님을 모시고 우리는 출발했습니다.

택시 아저씨는 ‘희망버슨 뭔 희망버스요, 절망버스지~’ 하셨고, 우리는 덩달아, ‘뺄개이 따문에 나라 망하게 생겼슴다, 문디 짜슥들’ 하면서 같지도 않은 맞장구를 쳐 주며, 그러나 우리의 실체를 의심하시는 기사 아저씨의 눈짓을 느껴가며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앙동에서 차가 무지막지하게 막혀버리는 바람에 결국 내렸더랬지요. 그때부터 우린 걷기 시작했습니다.

연안부두 지나 부산대교와 롯데백화점이 만나는 자리에 동삼1동 주민자치위원회 어르신들이 장하게 모였더만요. 아, 어버이들도 많이 계셨구요.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영도를 지키기 위해 어쩌고~~’ 사실, 우리도 알고 보면 굉장히 순수한 사람들인데 말이죠, 이건 뭐 순수의 대결 되겠습니다. ‘순수한 맘으로 영도를 지키려면 한진중공업을 지켜야 하고 그럴려면 김진숙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는데, 그 순간 제명이 되어버릴 것 같은 예감에 차마 내뱉지는 못했습니다.

국회의장을 지낸 영도 지역구 국회의원이신 형오 김아무개란 분이 그 곁에 있었다고 방송은 하던데, 얼굴은 못 봤습니다. 머리띠도 두르셨대요. 국회의장께서 헌법을 잘 모르시는 건지,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노동3권, 또 뭐있노. 여튼, 님께서도 선거를 치르셔야 할 테고, 그 조직들 다 선거 때 되면 선거운동 조직일 테니, 안 나올 수 없었겠죠. 이해합니다. 먹고 살아야죠.

그때부터 시작된 걷기 대행진은 물경 네 시간 동안 이어졌더랬습니다. 우리는 ‘부산지리는 빠삭하다’는 김빈 님을 따라 골목길을 타고 돌기도 하고, 폴리스 앞에서 실갱이도 하고, 도로에서 얼쩡거리기도 하고, 영도 주민들한테 욕지거리도 듣고 뭐 그랬습니다. 우리 김빈님은 명불허전이라고, 경찰 트럭 골목길로 들어오려고 후진하는 거를 못 들어가게 차를 막아서는 특유의 ‘곤조’를 부리기도 하셨더랬지요. 저는 차벽 뒤의 폴리스들을 보았습니다. 수백명이 도로 한가운데 떼를 지어 앉아 있더군요. 상당수가 트위터합디다. 니들도 고생이다, 싶더구만요.

어쨌든 우리 습님과 이뱅님, 그리고 저는 김빈님을 모세처럼 섬기며 어떻게든 출애굽 해볼라고 쫄래쫄래 따라다녔더랬지요. 그런데 별 볼 일이 없었습니다. 김빈님은 모세가 아니었던 겁니다. 모세는 따로 있었습니다.

차벽에서 쉬는 참에 폴리스들께옵서 습격을 했고, 저는 폴리스들의 군화와 구호 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었지요. 좀 이어 오늘의 주인공, 우리의 모세 석이아빠와 골무님 부부가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영도조선소 바로 코앞에 있는 ‘신도 브레흥훼~’ 아파트 주민인 친구의 빽으로 폴리스를 뚫고 한진중공업 바로 코앞까지 갔다 나오신 경험을 누린, 그날 집회 참가자 0.001%의 주인공이었더랬지요.

근데 진짜 놀랄 일이 있었어요. 폴리스들이 민증 검사해서 영도 주민 아니면 길을 안 열어주는 것까지는 그래도 니들 하는 일이 뭐 그렇지, 하고 넘어가고 싶었는데, 참말로 놀랄 일은 실제 영도 주민인 듯한 사람들이 민증 없다 하니까 집 전번을 따는 거예요. 그러더니 집에 전화를 하는 거예요. 다짜고짜 ‘아무갭니다. 지금 전화받으신 분 댁이 영도에 있어요?’ 들이대는 거예요. 그러고는 ‘여기 아무개 씨가 우리 앞에 있는데, 이 분 댁의 아드님이 맞나요?’ 확인하는 거 있죠. 우와~ 대한민국 폴리스 정말 후덜덜입니다요~

저는 퍼뜩 이런 생각이 듭디다. 오늘 제사라고 야자 째겠다는 아이들한테 집에 전화해서 그날 제사 맞는지 확인해보는 담임들이 가끔 있거든요. 아마 저 폴리스도 거기서 배운 게 분명하다는 거죠. 아니면 저런 거 가르쳐줄 데가 대한민국엔 없습니다. 교사들 각성해야함다!

여하튼, 그날 우리 코앞에 비친 모습은 참 그로테스크에다 아리가또고자이마쓰(사이 님의 표현) 더라구요. 영도가 온통 쌈판이 되어버렸어요. 곳곳에서 싸움에 입씨름에 난리도 아녔어요. 살살해도 일당은 줄 텐데, 어찌 그리 임무에 충실들 하신지, 멀쩡히 잘 가는 사람들한테 시비 걸어서는 ‘개 같은 년, 좆 같은 년, 뺄개이 새끼, 영도땅서 나가라’ 온갖 욕설들까지. 슬픕디다. 나중에 우리는 한 술취한 할배한테 질질 끌려서 욕을 당하는 참가자를 구해주기까지 했다니까요.

대오는 여기저기 흩어져 ‘청학 성당으로 와라’ 아니다, ‘롯데 백화점 앞으로 와라’ 우왕좌왕..

우리는 네 시간 걸으면서 많이 지쳤더랬지요. 그러다가, 홀로 길을 다니시는 울산 삼촌(골무님의 작명)을 만나 함께 길을 걷게 되었지요. 경주에 귀농해 사신다는, ‘양심 때문에 한번은 안 와볼 수 없었다’는 점잖고 멋진 어르신이었어요. 하긴, 그날은 우리 편 같아 보이는 누구와도 쉽게 말을 걸고 친해졌지요. 그러고 보니 그날 영도는 한마디로 쌈터였고 해방구이기도 했군요.

결국 우리는 ‘충전’을 하기로했슴다. 꼼장어와 소주로. 폴리스들은 롯데에서 바삐 철수해서 청학동 쪽으로 집결하는 듯하더군요. 영도 바다를 내다보면서 마시는 한잔 쐬주에 꼼장어 캬~. 어쨌든 우리는 꼼장어의 정력을 흡수해서 다시 산복도로를 타고 넘어 청학성당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부산 영도의 산동네 골목길 끝내주더만요. 다이나믹 그 자체였슴다. 그리고, 문제의 골목 꼭대기에서 우리는 끝내 마주쳤습니다. 우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요. 뭔 이런 업무 충실 짜바리들이 다 있어, 시간이 두 신데, 대강 해서 보내주지, 이 골목길까지 말야, 어쩌고.

울산 삼촌이 먼저 들이받았습니다. 어르신이니 쟈들도 듣고는 있지만, 미동은 안 하더군요.

그런데 우리의 히어로, ‘부산 영도’ 번호판을 단 오도바이(우리는 그 오도바이를 ‘희망오도바이’라 부르기로 합의했습니다)가 시속 100키로에 육박하는 속도로 폴리스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친 겁니다. 부다다다다..끼익.. 폴리스들이 확실히 쫄더라구요.

그리고 바로 들이받았습니다. 물론 오도바이 말고 몸과 입으로. 헬멧을 떨어뜨리는 둔탁한 리와 함께. 있는 그대로 옮기겠슴다. “지기미 씨발꺼, 이기 도란짓 아이요, 뭐하는 기요! 여 가도 막고 저 가도 막고” 신분증만 내 놓으면 보내주고, 왜 화를 내냐 어쩌고 하는 이 폴리스의 옹색한 대거리는 껨이 안되더군요. “와요, 내 말이 틀렸능교. 이기 미친 지랄뼝 아니면 뭔교? 와요? 와 꼬라보는데요? 뭐 잘못 됐능교? 내가 뭐 틀린 말 했능교!!”

와우, 부산 갈매기의 화려한 말빨 속에 폴리스들이 넋을 놓은 사이, 한 여인이 저기가 우리집이라며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재바른 우리 골무 김여사가 덩달아 ‘일행’이라면서(이미 일행 컨셉으로 재미본 전력이 있으니) 길을 타고 나갔고, 바로 그 다음 제가 길을 열어야했는데, 그때서야 정신을 수습한 폴리스들이 제 앞에서 길을 턱 막더라구요. 아이, 쓰바. 확실히 인생은 타이밍이야. 쩝. 하는 찰나, 졸지에 사랑하는 아내와 폴리스를 경계로 생이별을 하게 된 오늘의 히어로, 석이 아빠, 우리의 박작가께옵서 휘발유처럼 확 불이 붙어버린 겁니다.

“길 열어!(천오백 데시빌짜리 비명)”

그래도 폴리스들이 길을 열어줄 택이 있나요. 쟈들이 누군데.

몇초간 옥신각신하던 끝에, 아마도 2km 전방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계신 김진숙 님께도 들릴, 아니 3km 전방 연안부두에서 졸고 있을 갈매기들이 후다닥 깨어날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온 겁니다.

“저기 내 마누라야, 내 마누라!!!”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홍해바다를 앞에 두고,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를 굽어보며 그리고, 발을 동동 구르던 가련한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며 하늘을 향해 크게 고하고 지팡이를 두드렸을 때, 홍해 바다가 쩍하고 갈라지듯, 순식간에 그 철옹성 같은, 조갑지처럼 이를 꽉 다물던, 그 폴리스 대오가 쫙 갈라져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그 길로, 저도, 박작가도, 예닐곱명의 다른 선수들도 유유히 통과했던 거지요. 박작가님은 방금의 그 사태가 좀 멋쩍었는지, 애꿎은 골무님을 향해, “김**! 어딜 가면 말을 해야지, 말도 안하고” 하는 씨도 안 먹힐 말씀을 하시더만요. 다 압니다. 그 마음. 그 멋쩍은 마음. 우리도 결혼생활 하잖습니까.ㅎㅎ

여튼 그리하여, 우리는 산길을 휘휘 돌아 영도를 한 바퀴 뺑 돌아 청학성당으로 갔고, 본 대오를 만났던 것입니다. 아, 이제 목적지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안고 걷는 길은 얼마나 평안하고 산뜻하던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청학성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개념찬 버스기사 아저씨의 도움과 영도 주민인 친구의 도움으로 버스를 탈출한 밀양참가단 1진과(맞습니다, 당신들이 일진이오!!) 감동의 해후를 하게 된 거지요.

그 이후에도 재미난 일들이 많았는데, 특히 우리 ‘스캇 밴드’를 다시 만나 신나게 흔들어 제낀 일과, 그날 애정전선을 완벽하게 과시함으로써 항간에 떠돌던 불화설을 잠재우신 박작가님이 한 턱 내신 ‘부어치킨’을 먹고 얼굴이 부어버린 일과, 여기저기 드러누운 분들과 침튀기며 토론하는 분들과 춤추며 노래하는 분들과, 그리고 저기 85호 크레인 뒤편으로 부옇게 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뜨끈함으로 눈시울이 지펴지는 것을 느낀 것까지, 그렇게 3차 희망버스는 저물어갔던 거지요.

그러게요, 3차 희망버스까지 개근을 하고 보니, 김진숙님을 우리가 위로하러 간 게 아니라 우리가 위로받고, 우리끼리 결속하고 다지는, 그러니까 ‘엠티’를 다녀온 것만 같군요. 한나 아렌트는 어디선가, ‘정치 행위는 연극적인 데가 있어서, 정치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배우의 페르소나가 바뀌기도 한다’고 말한 바 있지요. 그래요, 저는 대학입학 이후로 지금껏 거의 대부분의 세월을 이른바 ‘운동’이란 것을 해 왔지요. 그러면서 세상을 배웠고, 사람을 사귀었고, 기뻐했고, 슬퍼했지요. 대책 없는 우울로 구죽죽하던 청춘의 골방을 훌쩍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운동’의 광장이 어디서든 불 밝히고 저를 불러 주었던 것이었지요.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의 우정과 만남과 헤어짐이 제 관계의 모든 것입니다.

김진숙 선생님! 힘내세요~. 당신의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희망버스를 탔지만, 당신께 드리고 온 연대의 기운보다 실은 우리가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그리웁습니다.

응답 2개

  1. 이계삼말하길

    현민님.. 저도 참 이거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몇번이나, 수유너머 위클리에 오르는 님의소식이나 글을 보면서 편지라도 띄워야지, 하다가 차일피일 미루다 이렇게 인사를 드리네요. 반갑습니다. 언제 한번 아랫쪽으로 다녀가실 일 있으시면 꼭 연락주세요. 016-459-7173 입니다. 학교(밀성고)로 전화주셔도 돼요. 식사라도 꼭 한끼 대접하고 싶어요. 평안하시구요~~^^ㅎ

  2. 현민말하길

    이계삼 선생님, 이런 문체도 구사할 줄 아시는군요!! 웃으며 읽어도 되는 글인지지 모르겠지만, 집에 전화해서 진짜 제사 맞는지 확인하는 교사들 부분에서 빵 터졌어요. 수감 중에 보내주신 시집은 잘 간직하고 있어요. 좀 더 길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드려야하는데… 이것 참… 명절 잘 보내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