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눈이 보배란다. – 1. ‘눈’의 여러 의미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습관이 있단다. 그래서 상대가 무안해 하면 덩달아 나도 무안해지곤 하지. 내 호기심이 너무 강한 시선을 만드나 보다. 아마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눈으로 마음을 읽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눈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네가 태어났을 때 맨 먼저 네 눈을 보았는데 눈이 부셨는지 감고만 있더구나. 어쩌다가 살짝 떴는데 초점이 분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눈이 시원하게 커서 기뻤단다.

하버지는 눈이 인간의 생명력(생기)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믿기 때문에 눈에 관심이 많단다. 눈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생명력이 왜 눈으로 드러날까. 그래서 눈을 밝히려면 어찌할까. 이번에는 눈 얘기를 하고 싶구나. 수안아, 지난 해 네 생일에는 네 영혼의 모습이 다이아몬드를 닮기 바라고 다이아몬드와 같은 네 영혼 또는 인격, 정체성을 그려 보았다. 금년 네 생일 선물로는 네 눈을 밝혀 주고 싶구나. 눈을 밝혀 주다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아, 글쎄 들어 보렴.

어떤 유기체든지 외부에서 에너지를 끌어들여야만 생존·성장·번식할 수 있잖니. 식물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물과 양분이 있는 쪽으로 뿌리를 뻗고 햇빛을 향하여 가지를 뻗어 얻은 것으로 광합성을 한다. 식물의 감각기관과 그 기능을 다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가지와 뿌리가 에너지원을 향한다는 사실로 보아 어떤 형태로든지 에너지원을 지각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동물들은 에너지원을 감지하고 그 쪽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진화되었는데 그러기 위해 감각 기관과 운동기관을 진화시켰을 것이다. 물론 동물마다 에너지원이 다르니까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을 다르게 발전시켜왔겠지.

다른 동물에 비해 사람의 경우는 오랫동안 수렵과 채집을 위해 후각이나 청각은 퇴화되는 대신 시각이 매우 진화되었을 게다. 인간이 직립한 것은 앞발을 손으로 쓰기 위해서였겠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멀리보기 위해였다. 이제 인간은 직립하여 멀리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눈으로 보고 이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가 다른가를 판단하기 위해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인간의 지각활동과 인식활동의 중심 감각은 시각이란다. 그래서인지 영어로 ‘나도 알고 있다’를 ‘I see’라고 하더구나.

자, 그럼 수안아, 이제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눈과 관련된 관용어구들(자주 쓰여 익숙한 구절)로 눈의 의미와 눈을 밝게 하는 방법들을 찾아 나서자. 왜냐하면 언어 특히 관용어구 속에는 그 말을 쓰는 이들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물론이고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 체계까지 담겨있기 때문이다.

‘눈을 깜박이다.’에서 ‘눈’은 감각기관이고 ‘TV를 너무 가까이서 보면 눈 버린다.’에서 ‘눈’은 시력이겠다. 남의 시력을 잃게 하면 형법상 팔 다리나 다른 감각기관을 못 쓰게 한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형벌이나 배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으로 보아 인간의 삶에서 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만 하겠다. 언제나 이동하며 수렵 채집하던 원시시대라면 눈이 없이 생존 그 자체가 어려웠을 게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에서 ‘눈’은 ‘드러난 마음’ 뜻하는구나.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에서 눈은 관심이나 호기심을, ‘그는 사장의 눈에 들어 고속 승진을 했다.’에서 눈은 호감을 ‘두 사람은 눈이 맞아 달아났다.’에서 눈은 사랑을 ‘그 일로 그는 사장의 눈 밖에 났다.’에서 눈은 미움을 뜻할 게다.

뭔가를 보자마자 본 것에 대하여 어떤 생각이 시작되고 다른 것으로 시선이 바뀌면 생각도 따라서 바귄다. 이름도 모르는 사물을 처음 보았다면 컴퓨터에서 관련 파일이 없어 검색을 못하듯이 이름을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을 거다.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머릿속에 그것과 관련된 파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검색, 비교·대조, 판단, 저장, 활동을 할 수가 없겠지. 그러나 아는 사물을 보았을 때는 즉시 그 이름의 파일을 검색하고 그 파일 속에 있는 관련 정보(경험 내용)와 비교· 대조해 볼 거야. 어떤 감각으로 무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특히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본 것에 대하여 검색해서 비교·대조하여 판단하고 저장한다는 거고 그러한 사고 내용(파일 내용)과 과정이 눈으로 내비친다는 거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새로운 사물을 지적인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것도 보는 동안 이전의 경험(배경지식)에서 그것과 비슷하거나 관련이 있는 사물의 정보를 검색하여 비교·대조하고 그 새로운 것이 어떤 집합의 부분집합인지, 지식 체계에서 어떤 구성요소인지를 판단하고 있단다. 그런 다음 새로 얻은 정보내용을 새로운 사물의 이름으로 새로운 파일을 만들고 집합적이고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사고로 그 파일의 위치를 찾아 입력시킨 뒤에 저장해야만 보는 동작이 끝난단다. 이와 같이 감각과 생각은 언제나 함께 가므로 그래서 모든 감각의 중추는 사고의 중추 가까운 머릿속에 들어 있게 되었어.

보는 동안 이성적인 인지활동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비장한 장면이나 희극적인 장면을 보면서 장면에 어울리는 감정을 느끼고 또 어떤 행위를 보면서 뒤따를 의지를 굳히거나,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한다. 슬퍼 눈물을 흘리는 눈도 있고 기뻐 웃는 눈도 있고 다짐하거나 거부하는 눈 등 마음가짐이 다 눈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란다. 그래서 때로는 눈으로 드러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내비치기가 민망하지만 ‘눈(시선)을 어디에 둘지 난처’할 수도 있단다. 특히 거짓말을 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시선을 감추려 하지.

수안아, ‘눈이 보배다.’라는 말도 있단다. 이때의 ‘눈’은 관찰력, 분별력을 뜻하는 마음의 눈을 가리켜. 심마니들이 산삼의 모습을 떠올리고 산기슭을 오르내리며 산삼을 찾아다니다가 혹시 그 비슷한 것을 찾으면 이를 다시 확인한 후에 큰 소리로 ‘심봤다’고 외친다더라. 비슷한 풀들 가운데에서 흘깃 한 번 스쳐 지나갈 뻔했다가 다시 찾아낼 수 있는 심마니의 관찰력과 분별력은 분명히 보배일 게다. 심(산삼) 몇 뿌리만 찾아도 팔자를 고칠 수가 있으니까.

만약 남의 지식이나 기술을 한번만 보아도 배우고 익힐 수 있다면 보배가 될만한 눈을, 즉 관찰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천재일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건의 현장을 보자마자 사건의 인과관계를 꿰뚫어보고 실마리를 찾아 사건을 해결한다면 보배가 될 만한 탐정이나 학자 또는 정치가의 눈을, 즉 관찰력과 분별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으로 지도력(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만 읽고도 내용을 다 파악할 수 있는 눈, 즉 독해력을 가지고 있다면 학문이나 실무 처리에 얼마나 유능할까. 정말 몸의 눈을 밝혀주는 것은 마음의 눈이니 마음의 눈이 밝다면 정말 보배를 가진 것이구나.

이번에는 윤리적인 자아성찰의 눈을 살펴보자. 예수의 말씀인 ‘눈은 몸의 등불이다.’에서 눈은 자신의 몸이 벌거벗지는 않았는지, 때가 묻지는 않았는지, 옷을 거꾸로 입지는 않았는지 자기 몸을 살펴볼 수 있는 눈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 뜻이고 속뜻은 이성적인 눈보다는 자아를 성찰하는 윤리적인 차원의 눈일 거야. 만약 깜깜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면 등불을 켜야 한다. 어떤 사람은 등불을 밝히고 보는 것처럼 ‘마음의 눈’이 밝아서 자신의 몸가짐과 행동을 밝히 보고 잘못을 바로 잡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기 얼굴이나 몸 또는 옷에 때가 묻은 것을 보지 못하니까 자신을 깨끗하게 여긴다. 그러니 자기의 양심의 눈이 어둡다면 자기 마음과 행동이 얼마나 더러운지 어찌 알고 고칠 수 있겠니. 그러니까 윤리적이고 양심적인 눈의 관찰력이나 분별력도 당연히 보배랄 수 있지.

이번에는 정서적 차원의 눈이 밝음도 보배임을 살펴보자. ‘질투에 눈이 멀었다.’에서 눈은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관찰력이나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온통 질투에만 사로잡혀있는 감정적인 눈이로구나. 그러나 남의 얘기를 듣거나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내가 등장인물이나 화자의 입장에서 감정이입(공감)하지 못한다면 등장인물이나 시적 화자와 소통할 수도 문학 문제를 풀 수도 없게 된다. 공감하는 감정의 눈이 없다면 그 자신이 삭막한 삶을 살게 되고 또 남들과 소통하며 살 수 없으니 정서적인 눈의 관찰력과 분별력인 공감 능력도 보배 중에 보배구나.

눈이 보배라면 수안아, 너의 눈을 어떻게 밝힐까. 이 과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먼저 ‘마음의 눈’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알아보자.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지. 만약에 전지자가 있다면 그는 안경을 쓰지 않고도 사물을 볼 수 있겠으나,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배경지식)으로 안경을 만들어서 자기 것을 쓰고 사물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단다. 배경지식(경험)이 없어서 마음의 안경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갓 태어난 아이는 사물을 보아도 배경지식에 비춰볼 수 없으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마음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할 거다.

‘내가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지!’에서 ‘삐었다’는 ‘어긋났다’는 뜻으로 배경지식이 적거나 잘못 정리되었기 때문에 안경의 굴절이 불규칙하거나 색깔이 칙칙해서 사물을 바로보지 못하고 판단을 그르쳤음을 한탄하거나 후회하고 있구나. 경험들(배경지식)을 많이 얻고 이를 체계화하는 것이 마음의 안경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며, 풍부하고 체계화된 배경지식이라는 안경이 있어야 새로운 경험이 가능해진단다. 경험이란 그 새로운 경험에 맞추어 기존 경험을 재배치하는 것이며 동시에 새로운 경험이 제자리를 찾는 과정이란다. ‘재배치’가 바로 보는 것이고 경험하는 것이란다.

그런데 수안아,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은 나와 다르다.’에서는 사람마다 다른 안경. 즉 다른 관점을 지닌 것을 보여주는구나. 사람마다 본 것 즉 경험한 것이 다르고 또 그것의 체계화 즉 재배치가 다르니까 안경이 굴절과 색깔도 당연히 다르게 마련이지. 그래서 사람마다 크게, 작게, 바로, 비뚤게, 밝게, 흐릿하게 보기도 하며. 또 붉게, 푸르게, 색깔이 마구 뒤섞여 칙칙하게 보기도 하는구나. ‘그는 골동품을 보는 눈이 있다.’에서 골동품에 대한 많은 배경지식이 잘 정리되어 있어 그의 안경은 굴절이 아주 작고 일정하며 색깔도 아주 옅고 단일하여 골동품의 가치를 보는 안목(눈)이 있다는 거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안경의 굴절을 할 수만 있다면 작고 균일하게, 그리고 색깔은 옅고 단일하게 만들어야 잘 보이는 것이로구나. 전지자는 안경을 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안경이 좋은 안경인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빗나간 해석을 사실인 양 잘못 믿으면 인식 체계가 헝크러진다. 헝크러진 인식 체계는 헝크러진 만큼 안경의 굴절과 색깔을 바꾸어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러니까 굴절이나 색깔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안경이 좋은 안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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