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정치’가 재난이 된 시대

- 이진경

푸코에 따르면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이전, ‘통치하다’라는 말은 “공간에서의 이동·운동, 물질적 생필품의 조달, 개인에게 부과되는 치료나 약속된 구제, 늘 헌신적이면서도 적극적이고 호의적인 지휘나 명령의 실행 등”을 뜻했다. 그 말이 “자신이나 타인, 타인의 신체, 더 나아가 그 영혼이나 행동방식에 행사될 수 있는 지배”를, 개인 간의 교류 등을 뜻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통치란 “목적에 용이하게 이를 수 있도록 정리된, 사물들의 올바른 배열”이라고 재정의한다. 국가와 결부되어 사용될 때에도, 통치란 “가능한 최대의 부가 산출되도록 보장해야 하며, 사람들이 충분한 생계수단을 제공받도록, 또한 인구가 증가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등과 같은 긍정적인 내용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저 억압적인 지배를 행사하거나 강제적으로 어떤 의지를 관철시키는 그런 종류의 권력과는 구별된다.

여기에 푸코가 덧붙이는 것은 사물들의 올바른 배열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테크닉의 존재이다. 군주에 대한 관념이 ‘자신의 인민을 보살피는’ 어떤 보호자라는 의미를 명시하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부나 생계수단, 생명 등을 생산하고 보장할 수 있는 실질적 수단(테크닉)이 없을 경우에는 통치라는 개념과 대응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테크닉을 통해 통치가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사물들이 제자리에 들어서며 올바르게 정렬되고 배열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정당한 몫을 받게 되는 것일 게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통치의 개념은 사물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도록 하고, 사람들이 주어진 몫을 받도록 하는 랑시에르의 ‘치안’ 개념과 정확하게 상응한다.

“국가란 부르주아지의 집행위원회”라는 맑스의 말을 국가적 통치를 계급적 이해에 직접 귀속시키는 협소한 해석과 반대로, 계급적 특수이해와 구별되는 인민의 보편이익에 연결하는 통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국가란, 그것이 아무리 부르주아적 국가라고 해도 단지 부르주아지의 이익만을 위해서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인구/주민’이라고 불리는 전체가, 통계적인 의미에서 적절하게 생존을 지속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국가적 통치의 임무다.

물론 그 인민이 적대적인 두 계급으로 분할되어 있을 때, 그리고 그 계급이 대결적인 상황에 돌입했을 때, 국가가 그런 단일한 전체성을 지속하긴 어려우며, 얼른 자신의 계급적 성격에 맞추어 작동한다. 이런 적대적 대결의 상황이 오래 지속될 경우, 국가가 통치적 ‘보편성’의 형식을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그래서 국가는 계급적 대결이 발생할 경우, 기본적으로 단지 특정 부르주아지의 ‘편을 드는’ 것을 넘어 대결을 봉합하고 분열을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통상적이다. 자신의 계급적 편향성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은 통치 내지 치안의 불가결한 요소다. 그럴듯한 단일성, 보편적인 전체의 형상을 억지로라도 만들어내는 것이 통치의 기본원리가 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명박 정부는 정치는 그만두고, ‘치안’ 내지 ‘통치’라는 개념과도 너무나 거리가 멀다. 공동체까지는 아닐지라도 평화롭게 화합하여 살던 제주도 강정마을 사람들을, 해군기지를 만든다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부 주민들을 꼬드겨 턱도 없는 주민투표를 하고, 그것을 근거로 마을 전체를 전쟁터도 만들어버린 것은 아주 국지적인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건축업자들의 ‘부흥’을 위해 멀쩡한 강들에 대대적인 공사판을 벌여 있어야 할 자리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살던 생명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그걸 둘러싸고 모든 지역에서 부당한 몫의 할당을 통해 이익에 따라 사람들이 대립하고 대결하게 만들었던 것 역시 사물들의 올바른 배열을 통해 주민들을 하나의 전체로 만드는 통치의 개념과는 반대된다. 대통령의 종교적 입장에 따라 ‘편향된’ 조치들을 만들어내어 종교간의 대립을 만들어낸 것은 물론, 특정 종교 안에서조차 스스로를 권력자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만들어낸 것 역시 새로운 대결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은 최소한의 법적 균형감각은 물론 심지어 계급적 균형감각도 잃고 사적인 방어를 행하거나 사적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되어, 법이 갖는 형식적 보편성조차 사적 집단의 진창 속에 처박아 버렸다. 청문회에 올라가는 고위공무원은 불법행위가 기본 스펙이 되어버렸고, 반대로 법의 준수라는 엄준한 명령은 오직 ‘아랫것들’, 못살고 약한 자들에게만 의무가 되어버렸다.

250일이 넘도록 크레인 줄에 목숨을 건 채 정리해고문제의 해결을 요구하고 있는, 그러나 이미 그 기업의 사주로선 어떤 해결책도 갖고 있지 못한 채 사회적 대결의 장이 되고 있는 한진중공업 문제를 이런 정부가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대학생들의 등록금은 세계최고의 수준이 되어 알바 사이의 빈 시간에 대학을 다녀도 채무자가 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대학을 졸업해도 3분의 1은 취직을 할 수 없는 현실, 노동하는 ‘인구’의 반 이상이 비정규직의 고달픈 삶에 시달리고, 자살율은 헝가리 일본을 크게 웃돌아 또 하나의 ‘세계최고’가 되었어도 그것이 소위 ‘정치인’의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는 세상, 물가인상의 비상벨이 물리고 있는 게 몇 년 인데, 대통령이란 사람이 나와서 “어쩔 수 없으니 소비를 줄이라”는 걸 물가대책이라고 말하는 나라, 여기 어디에서 푸코가 말했던 ‘통치’를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정확하게 반대의 것을 본다. 국가적 통치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른 권력의 일방적 행사가 되어 버렸고, ‘치안’은 그런 권력에 대한 항의와 저항을 압살하고 억압하는 일방적인 폭력이 되어 버린 것, 그리하여 전국 모든 곳이, 일상의 모든 시간이 갈수록 거대한 분열과 대립, 대결의 장이 되어 가고 있는 것. 따라서 통치적 행위에 의해 은폐되는 분열과 적대를 드러내는 고전적인 좌파적 정치학이 따로 있을 곳을 잃어버렸다.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는 것도, 감추어진 계급적 이해를 드러내는 것도 따로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 문제는 사적이거나 계급적인 것을 그 본질을 은폐하며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뻔뻔스레 다 까놓고 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흔히 ‘정치’나 ‘통치’라는 말로 지칭되는 것은 애초에 그것이 뜻하던 것과 정반대의 것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푸코가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올바로 배열되어 있던 사물들을 뒤집어 놓고, 평화롭게 ‘하나처럼’ 살던 사람들을 이해관계의 대립을 쑤셔넣어 서로 반복하며 싸우게 하고, 취업이나 교육, 물가나 건강 등 ‘인구’의 생존은 간당간당한 끈에 매달아 매일매일의 삶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전위적인’ 조직행동이 되어버렸다.

재난, 정말 ‘재난’이란 말 아니곤 전국적인 범위에서,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는 이 끔찍하고 처참한 상황을 지칭할 말을 찾기 어렵다. 국가적 재난이다. 다만 홍수나 태풍과 같은 통상적 ‘재난’과 다른 것은, 이 재난이 그런 재난과 달리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며, 국지적이지 않고 전국적이라는 점, 하나의 영역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권력이 미치는 모든 영역에 파고든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그것이 흔히는 재난의 해결을 임무로 하는 국가적 통치행위 그 자체에 의해 야기되고 생산되고 있다는 점일 게다. ‘정치’가 재난이 된 시대, ‘통치’가 재난을 야기하는 시대,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초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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