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강정마을에 평화를

- 박정수(수유너머R)

지난 주말에 제주도로 1박 1일 가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처음 보는 아열대성 풍광이 이국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집과 논밭 둘레로 친 돌담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돌탑 쌓듯이 하나씩 얹어 놓은 돌들의 틈새 때문에 발도 차면 넘어질까 태풍에도 끄떡없다 합니다. ‘제주도의 제주도’라는 우도의 어촌마을과 산호백사장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습니다. 너무나 이국적인 풍광에 감탄하다가 문득 서울에서 제주시까지 비행기로 50분밖에 안 걸린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이상한 거리감에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제주시에서 제주공항까지 시내버스로 10분 남짓, 5분마다 있는 비행기로 김포공항까지 50분, 김포에서 서울시내까지 공항철도로 20분 남짓, 두 시간 거리밖에 안 되는 곳에 이렇게 먼 나라의 풍경이 있다니! 그러고 보니 제주시는 말투나 거리모습이나 음식맛이 서울문화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주시는 부산보다 서울에 인접해 있습니다. 수도권에 속해 있는 것 같습니다. 영토적 풍광의 거리감과 교통, 문화적 인접성이 묘하게 충돌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제주시에서 50분, 용산 우리 집에서 3시간 거리에 강정마을이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공항버스를 타고 강정마을로 갔습니다. 중덕삼거리로 옮긴 농성장에 들른 후 바다로 갔습니다. 하지만 9월 2일 해군이 친 높이 5m 길이 1.6Km의 펜스로 눈도, 발도 구럼비 해안에는 닿지 못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펜스에 놀랐습니다. 이스라엘 군이 친 가자지구 분리장벽을 연상케 하는 장벽이었습니다. 이 분리장벽으로 구럼비 해안은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곳곳에 군인이 지키고 서 있고 개구멍까지 봉쇄되었습니다. 가지지구 고사작전같은 구럼비 바위 고사작전에 항의하는 일체의 ‘외부세력’도 진입이 금지되었습니다. 강정포구의 풍경보다 그 구럼비 분리장벽이 훨씬 더 이국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구럼비 분리장벽은 그대로 팔레스타인의 분리장벽으로 이어집니다. 그 사이의 물리적 거리와 영토적 국적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구럼비 해안에 건설하려는 해군기지는 오키나와 해군기지와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 사이의 바다와 국적은 눈이 만들어낸 가상일 뿐입니다. 일본, 이스라엘, 한국, 미국이라는 영토적 거리는 오키나와 해군기지와 제주도 해군기지, 가지지구 분리장벽과 구럼비 분리장벽이라는 점들을 직접 잇는 선의 외관일 뿐입니다.

매일 8시에 열리는 촛불문화제에 참석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 또한 탈영토적입니다. 세계 곳곳의 평화세력과 전쟁세력이 충돌하는 점들의 연결선을 타고 활동가, 예술가, 학자 등 다양한 인종과 분야의 사람들이 강정마을에 모였습니다. 마을 주민들도 단순히 보상액을 높이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었습니다. 수억의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마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구럼비 해안의 뭇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다시는 4.3같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지속하기 위해 낯설 법도 한 ‘외부세력’과 한 몸이 되어 싸우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에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고 다니다 강정마을에 뿌리를 내린 송광호 박사님이 “저는 언제든 강정마을을 떠나 지구촌의 또 다른 분쟁지역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해군기지 계획이 좌초되어 구럼비 해안에 쌓아놓은 콘크리트 삼발이를 걷어내는 날 마지막 삼발이를 뽑아내는 기쁨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마을 주민들은 “네, 사랑합니다.”고 외쳤습니다.

협상을 위한 싸움이 아니기에 그들은 조급해 하지도 않습니다. 생명누리공동체의 권술용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해안 농성텐트가 철거되고 펜스로 가로막혔다고, 동료들이 구속되었다고, 강제수용이 임박했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작은 일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할 일은 걱정해도 오고 걱정하지 않을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십시오. 지금 이곳,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인생에 언제 또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과 만나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배우고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될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무엇보다 여기서 우리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적인 평화 활동가가 탄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반해 정부와 해군은 너무나 반세계적이고 조급증에 시달립니다. 그들은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국민국가적 관점에 가둬놓으려 발버둥칩니다. 북한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해적으로부터 국부를 지키기 위해 해군기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제주해군기지가 세계 전체를 상대로 싸우는 미 해군의 전략 기지로 사용되리라는 건 삼척동자도 압니다. 아랍혁명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이 궁지에 몰린 것만 봐도 ‘세계’와 등지고 미국하고만 유착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드러난 마당에 정부는 여전히 냉전시대의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생명, 평화, 공동체를 위해 해군기지 건설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보상액을 높이려는 지역주민과 외부세력으로밖에 안 보이는 정부당국자의 벼룩이 간댕이 만한 인식수준이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국익’과 ‘지역개발’이라는 경주마의 눈가리개는 사람을 조급증에 빠뜨립니다. 이런 조급증은 주민 의사 결정과정에서도 드러납니다. 2007년 4월 사전 모의된 엉터리 마을총회와 사전 토의 한번 없는 엉터리 여론조사를 근거로 정책후보지로 결정되기까지 불과 17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그 절차의 하자 없음을 선고하여 강정마을 주민들의 운명이 일부 개발이익에 눈 먼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어 버린 황망한 상황을 법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소위 ‘민주적’ 절차가 민주주의를 추방하는 수단이 되는 흔하디 흔한 상황이 강정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지금 강정마을에서는 두 개의 탈영토화된 세력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구럼비 해안을 탈영토화된 미해군의 동아시아 전략 거점으로 만들려는 군사세력과 영토적(지역개발, 국익) 이해관계를 뛰어 넘어 탈영토적 생명 공동체로 만들려는 평화세력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 같은 그 지역에 ‘세계’가 다 들어 있습니다. 세계의 분리장벽을 걷어내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댓글 남기기